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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12권, 세종 3년 6월 1일 임진 2번째기사 1421년 명 영락(永樂) 19년

예조에서 대열의 의식과 절차에 대하여 건의하다

예조에서 대열(大閱)의 의식(儀式)을 계하였는데, 그 의식은

"9월이나 10월 중에 도성(都城) 밖에서 대열을 행하는데, 반드시 강일(剛日)071) 을 쓴다. 기일 전 11일에 병조에서 대열을 청하여 전교를 받고, 드디어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뽑도록 한다. 유사(有司)가 먼저 풀을 베고 땅을 소제하여 장소를 만든다. 사방을 1천 2백 보(步)로 하고, 사방의 출입하는 데는 화문(和門) 【군문(軍門). 】 을 만든다. 또 그 안에 보군(步軍)과 기군(騎軍)의 군영(軍營)을 만들어, 처소(處所)를 2진(陣)으로 나누어 동쪽과 서쪽에서 서로 마주보게 하고, 그 사이는 서로 거리가 3백 보(步)나 되게 한다. 매 50보(步)마다 표(表)를 한 줄[行]로 세워서 모두 다섯 줄로 하고, 표 사이는 서로 거리가 각각 50보로 하여, 군사들의 전진하고 정지하는 한절(限節)을 삼는다. 또 따로이 북상(北廂)에 남향으로 선소(墠所)072) 를 마련하여, 임금의 수레가 머물러 관람하는 장소로 한다. 기일 전 2일에 충호위(忠扈衛)에서 대차(大次)와 어좌(御座)를 그 안에 설치하고, 또 소차(小次)를 대차의 동쪽에 설치하되, 지형(地形)에 따라 적당하게 마련한다. 통례문(通禮門)이 종실 이하 문무 여러 신하의 배례하는 자리를 대차의 남쪽에 설치하되, 평상시의 의식(儀式)과 같이 한다. 기일 전 1일에 장수(將帥)와 사졸(士卒)이 선소(墠所)에 모여서 떠드는 소리를 금하고, 방위(方位)의 색깔에 따라 기(旗)를 세워 화문(和門)을 삼고, 기고(旗鼓)와 갑주(甲胄)와 의장(儀仗)의 위의(威儀)는 모두 선소에 갖추어 둔다. 대장(大將) 이하로 각기 그 부하를 통솔하는 법이 평상시의 법식과 같이 한다. 장수가 먼저 군사들에게 깃발[旌旗]이 지휘(指揮)하는 방향(方向)과 【깃발을 눕히면 곧 꿇어앉고, 깃발을 쳐들면 곧 일어난다. 】 금고(金鼓)를 따라 동작하고, 정지하는 절차를 【북을 치면 즉시 전진(前進)하고, 쇠를 울리면 즉시 정지한다. 】 바라보고 따르게 교련(敎鍊)한다. 대열하는 날이 되면, 새벽 십각(十刻)에 군사들은 모두 엄중히 장비(裝備)하는데,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은 모두 갑옷을 입고 각기 직진(直陣)을 만들어 대기하고, 장군과 대장군은 각기 의식에 의하여, 기고(旗鼓)가 서 있는 밑에 가서 선다. 그날 새벽 칠각(七刻)에 북을 한 번 치면, 일엄(一嚴)이 되는데, 유사(有司)는 궁문(宮門)과 성문(城門)을 열기를 계청(啓請)한다. 새벽 오각(五刻)에 북을 두 번째로 치면, 재엄(再嚴)이 되는데, 판통례가 중엄(中嚴)을 계청하고, 종실(宗室) 이하 문무 여러 신하가 모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며, 유사는 소가(小駕)의 의장(儀仗)을 진열한다. 새벽 이각(二刻)에 북을 세 번째로 치면, 삼엄(三嚴)이 되는데, 여러 시위(侍衛)하는 관원이 각기 그 복장을 입고, 임금의 수레가 움직이면, 종실 이하 문무 여러 신하가 시위하기를 평상시의 의식과 같이 한다. 임금의 수레가 선소에 이르면, 병조 판서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말을 타고 전하를 받들어 인도하여, 도선(都墠) 북쪽 화문(和門)으로 들어가 소차(小次) 앞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소차로 들어간다. 통례문이 종실 이하 문무의 여러 신하를 나누어 인도하여 대차(大次)의 남쪽으로 들어와서, 문관은 동쪽에, 무관은 서쪽에 서게 하되, 중심이 머리가 되고, 관위가 다르면, 줄은 겹으로 하되, 모두 북향하여 선다. 전하께서 황금빛 갑옷을 입고, 소차에서 대차에 들어가서 자리에 앉으면, 산선(繖扇)과 의장(儀仗)은 평상시의 의식과 같다. 통찬(通贊)이 재배하라고 외치[唱]면, 자리에 있던 자가 다 두 번 절한다. 중군장(中軍將)이 기(旗)를 눕히면, 군사들은 각기 그 진(陣)에서 북향하여 두 번 절하고, 기를 들면, 기병(騎兵)은 말에 오르고, 보병(步兵)은 일어난다. 이를 마치면, 병조 판서와 참판이 동상(東廂)에 머물러 서서 서향하고, 장의(仗儀)는 조금 뒤로 물러가게 하여 관람하는 길을 통하게 한다. 시신(侍臣)은 좌상(左廂)과 우상(右廂)에 의하여 대차 앞에 동쪽·서쪽으로 서되, 북쪽을 윗자리로 한다. 문무 9품관 이상은, 문관은 동쪽에 서고, 무관은 서쪽에 서되, 시신(侍臣)이 서 있는 자리 밖에서 10보(步) 거리에 떨어져 있게 하여 겹줄로 서되, 북쪽을 윗자리로 한다. 대각(大角)을 세 번 불면, 중군장(中軍將)이 각기 비고(鞞鼓)를 흔들어서 북을 치게 호령하면, 이군(二軍)이 함께 북을 친다. 유사가 기를 눕히면, 기병은 말에서 내려 서고, 보병은 꿇어앉는다. 이군의 여러 장수와 상호군(上護軍) 이상의 장관(將官)은 각기 중군 대장의 기고(旗鼓) 밑으로 모인다. 좌상(左廂) 중군 대장(中軍大將)은 기고의 동쪽에 서서 서쪽을 향하고, 제군(諸軍)의 장수는 기고의 남쪽에 서서 북향으로 하되, 동쪽을 윗자리로 하며, 우상(右廂)의 중군 대장은 기고의 서쪽에 서서 동향하고, 제군(諸軍)의 장수는 기고의 남쪽에 서서 북향하되, 서쪽을 윗자리로 하여 서사(誓辭)를 듣는다. 대장이 맹서하기를, ‘지금 대열을 시행하여 군사들에게 전투를 교련시키는데, 앞으로 나가고 뒤로 물러서며, 왼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는 것을 한결같이 군법(軍法)대로 하라. 명령대로 행하면 떳떳이 상이 있고, 명령대로 행하지 않으면 떳떳이 벌을 받을 것이니, 가히 힘쓰지 않을 것인가. ’라고 한다. 맹서를 마치면, 좌군과 우군의 사후(伺候)가 각각 두 사람씩 나와서 방울[鐸]을 흔들며 나누어서 군중에 돌면서 군사들을 깨우치고, 여러 상호군(上護軍)은 각기 그 부하에게 두루 서사(誓辭)를 알리고, 드디어 북을 울린다. 유사(有司)가 기를 들면, 기병은 말에 오르고, 보병(步兵)은 일어나서 모두 행진하여 표(表)에 이르렀을 때에, 징을 치면, 기병과 보병이 행진을 그친다. 또 세 번째 북을 울리고, 유사가 기를 눕히면, 기병은 말에서 내리고, 보병은 꿇어앉는다. 또 북을 치고, 유사가 기를 들면, 기병은 말에 오르고, 보병은 일어나서, 기병은 빨리 달리고, 보병은 빨리 쫓아가서 표(表)에 이르러 그치며, 정렬(整列)하여 자리를 정한다. 동군(東軍)과 서군(西軍)은 오행(五行)의 서로 이기는 법에 의하여, 서로 진(陣)을 만들어 응한다. 매양 진(陣)을 변경하여 각기 칼과 방패를 가진 군사 50명을 뽑아 양군 앞에서 도전(挑戰)한다. 제1, 제2의 도전(挑戰)에는 양편이 번갈아 가면서 용맹하여 이기고, 겁내어 패배하는 형상을 보이게 되고, 제3의 도전은 서로 대적(對敵)하여 균등한 형세가 되게 하고, 제4, 제5의 도전은 실력대로 이기고 패하는 형세가 나타나게 된다. 오진(五陣)이 다 마치면, 양쪽의 군대가 모두 직진(直陣)이 되고, 또 세 번 북을 친다. 유사가 기를 눕히면, 기병은 말에서 내리고, 보병은 꿇어앉는다. 또 북을 울리고 기를 쳐들면, 기병은 말에 오르고 보병은 일어나서, 기병은 쫓아가고, 보병은 달려간다. 좌군과 우군이 모두 가운데 표(表)에 이르러, 서로 겨누어 치다가 돌아온다. 매양 물러나 가다가 한 표(表)의 줄[行]에 갔을 때에, 그치기를 앞에 한 것과 같이 하고, 드디어 그 처음대로 돌아가서 다시 한다. 【무릇 서로 겨누어 치는 것은 모두 칼날이 서로 미치지 못하게 한다. 무릇 보병이 쫓아가고 물러가는 것은 가운데의 표에서 20보(步)를 지나면 그친다. 기병만은 이 예외로 한다. 】 판통례가 꿇어앉아 대열의 예(禮)가 마쳤음을 아뢰면, 전하가 자리에서 내려와 소차(小次)에 들어가서 금빛 갑옷을 벗는다. 병조에서 전교(傳敎)를 받아, 군사 이외의 백관은 모두 갑옷을 벗게 한다. 전하가 대차(大次)에 돌아와서 자리에 앉으면, 다담상[茶床]을 평상시의 의식(儀式)과 같이 올린다. 이를 마치면, 판통례가 대궐로 돌아가기를 계청하고, 임금의 수레가 의식과 같이 환궁한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12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책 433면
  • 【분류】
    군사-병법(兵法)

  • [註 071]
    강일(剛日) : 갑·병·무·경·임일.
  • [註 072]
    선소(墠所) : 임금이 임어하는 단소(壇所).

○禮曹啓大閱儀曰:

九月、十月中, 大閱於都外, 用剛日。 前期十一日, 兵曹請大閱承敎, 遂命將帥簡軍士, 有司先芟萊除地爲場, 方一千二百步, 四出爲和門。 【軍門】 又於其內, 爲步騎軍營域處所, 分兩陣東西相向, 中間相去三百步, 每五十步立表爲一行, 凡五行。 表間相去, 各五十步, 爲軍士進止之節。 又別墠地於北廂南向, 爲車駕停觀之所。 前二日, 忠扈衛設大次及御座於其中, 又設小次於大次之東, 隨地之宜。 通禮門設宗室以下文武群臣拜位於大次之南, 如常儀。 前一日, 將帥及士卒集於墠所, 禁止喧嘩, 依方色, 立旗爲和門, 旗鼓甲仗威儀, 悉備於墠所, 大將以下各有統帥, 如常式。 將帥先敎士衆, 望聽旌旗指揮之蹤、 【旗臥卽跪, 旗擧卽起】 金鼓動止之節。 【聲鼓卽進, 鳴金卽止。】 大閱日, 未明時十刻, 軍士皆嚴備, 騎徒皆貫甲, 各爲直陣以相候, 將軍及大將軍各依儀, 立於旗鼓之下。 其日未明七刻, 搥一鼓爲一嚴, 有司啓開宮殿門及城門。 未明五刻, 搥二鼓爲再嚴, 判通禮啓請中嚴, 宗室以下文武群臣皆具甲冑, 有司陳小駕儀仗。 未明二刻, 搥三鼓爲三嚴, 諸侍衛之官各服其器服, 車駕動, 宗室以下文武群臣侍衛如常儀。 車駕至墠所, 兵曹判書甲冑乘馬, 奉引入自都墠北和門, 至小次前下馬入次。 通禮門分引宗室以下文武群臣入大次之南, 文東武西, 中心爲頭, 異位重行, 俱北向。 立定, 殿下被金甲出小次, 入大次卽座, 繖扇儀仗如常儀。 通贊唱再拜, 在位者皆再拜。 中軍將偃旗, 軍士各於其陣, 北向再拜。 擧旗, 騎上馬徒起訖, 兵曹判書、參判停立於東廂西向, 仗儀小退, 以通觀路。 侍臣依左右廂立於大次之前, 東西北上, 文武九品以上, 文東武西, 在侍臣之外十步, 重行北上。 立定, 吹大角三通, 中軍將各以鞞令鼓, 二軍俱擊鼓。 有司偃旗, 騎下馬立徒跪, 二軍諸將上護軍以上, 各集於中軍大將旗鼓之下。 左廂中軍大將, 立於旗鼓之東西面, 諸軍將立於旗鼓之南, 北面東上, 右廂中軍大將, 立於旗鼓之西東面, 諸軍將立於旗鼓之南, 北面西上以聽誓。 大將誓曰: "今行大閱, 以敎人戰, 進退左右, 一如軍法。 用命有常賞, 不用命有常刑, 可不勉之?" 誓訖, 左右軍伺候各二人振鐸, 分循以警衆, 諸上護軍各以誓辭, 遍告其所部, 遂聲皷, 有司擧旗, 騎上馬徒起皆行, 及表擊鉦, 騎徒乃止。 又聲三鼓, 有司偃旗, 騎下馬徒跪, 又擊, 有司擧旗, 騎上馬徒起, 騎驟徒趨, 及表乃止。 整列位定, 東西軍依五行相勝之法, 互爲陣以應之。 每變陣, 各選刀楯之士五十人, 挑戰於兩軍之前。 第一第二挑戰, 迭爲勇怯之狀, 第三挑戰, 爲敵均之勢, 第四第五挑戰, 爲勝敗之形。 五陣畢, 兩軍俱爲直陣。 又擊三鼓, 有司偃旗, 騎下馬徒跪。 又聲鼓擧旗, 騎上馬徒起, 騎從徒走, 左右軍俱至中表, 相擬擊而還。 每退, 止一行表如前, 遂復其初。 【凡相擬擊, 皆不得以刃相及。 凡步士逐退, 過中表二十步而止, 騎士不在此例。】 判通禮跪啓大閱禮畢, 殿下降座入小次釋金甲。 兵曹承敎, 軍士外百官皆釋甲。 殿下還大次卽座, 進茶床如常儀畢, 判通禮啓請還宮, 車駕還宮如儀。


  • 【태백산사고본】 4책 12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책 433면
  • 【분류】
    군사-병법(兵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