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세종실록 6권, 세종 1년 12월 10일 경진 4번째기사 1419년 명 영락(永樂) 17년

두 임금이 윤회·원숙과 중국으로 도망간 중들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다

두 임금이 수강궁 편전에서 촛불을 켜고 병조 참의 윤회·지신사 원숙을 불러서, 좌우의 근시를 물리치고 중들의 사건에 대하여 말하였다. 상왕이 말하기를,

"오늘 주상이 나에게 중 30명이 도망하여 중국에 들어간 사건을 보고하였다. 이 말을 듣고, 문득 전자에 윤이(尹彝)·이초(李初)가 도망하여 명나라에 들어가 본국이 가짜 왜구를 꾸며 명나라를 엿본다고 거짓으로 고한 일이 생각나는데, 그때 고황제(高皇帝)126) 의 총명으로도 또한 의혹하여, 우리 나라에서 여러 해를 두고 변명하여도 마침내 제대로 밝히지 못하였다. 과인의 초년에 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를 외방에 귀양보냈는데, 중 하나가 도망하여 중국에 들어가 사실을 지나치게 고하였으므로, 지금 황제가 또한 이것을 믿고 본국 사신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 왕이 친족을 죽였다.’ 하였다. 오랜 뒤에 과인의 심지를 자세히 알고 고해 바친 자의 거짓임을 깨달았거니와, 또 황제가 우리 나라에서 야인을 초안(招安)하여 사모(紗帽)와 품대(品帶)를 주니, 그들이 돌아가서는 품대와 사모를 말 옆구리에 매달았다는 말을 듣고 비웃었다 하는데, 이와 같은 것은 전부 불령(不逞)한 무리가 도망하여 명나라에 들어가 거짓말로 사건을 일으키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또 동서 양계(兩界)127) 는 경계가 명나라와 연해서 사람이 도망쳐 들어가기 매우 쉬운데, 하물며 중들이 도망쳐 들어가기는 평민보다도 더 쉬움에랴.

지금 황제가 부도(浮屠)128) 를 신봉하는 것이 소량(蕭梁)129) 보다 더 심하여, 《명칭가곡》을 외우는 소리가 천하에 퍼져 있고, 공화(空花)와 불상(佛像)의 상서를 그린 그림이 파다하여, 일시에 풍습이 쏠려서 미연(靡然)히 따라가고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앞서 이미 사사(寺社)의 전토와 백성을 혁파하여 겨우 열에 하나를 남기고, 이번에 또 절의 노비를 다 없앴으니, 비록 그들이 자취(自取)한 것이라 할지라도 어찌 원망이 없겠는가. 이들이 이미 희망을 잃었고, 또 황제가 불도를 숭상한다는 것을 들었으니, 반드시 도망하여 중국에 들어가 말을 꾸며서 참소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물며 황제가 〈불도를〉 숭상하고 신봉함이 저와 같은데, 우리 나라의 〈불도를〉 혁파함이 이와 같음이겠느냐. 중들이 여기서 도망하여 저곳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는 것이다. 옛날 사람도 때에 따라 변고(變故)를 제압하기 위하여 권도(權道)로 임시변통(臨時變通)하는 일이 있었으니, 지금 중들에게 스스로 위안하고 기쁘게 하는 마음을 열어 주기 위하여, 속히 서북면(西北面)과 황해도 등 사신이 내왕하는 곳에 중과 늙은이들을 모아서 황제가 하사한 《명칭가곡》《위선음즐(爲善陰騭)》 따위를 항상 읽고 외우게 하며, 또 가곡과 시를 지어 부처를 숭상하고, 황제의 믿음으로 받은 상서로운 응답이 자주 나타난 모양을 무녀들에게 가르치게 하였다. 그리하여 명나라 사신이 와서, 연도(沿道)를 지날 때에 경을 외우는 자가 있고, 연회에서 가무할 때에 〈황제의〉 덕을 칭송(稱誦)하는 자가 있을 것 같으면, 황제가 듣고 반드시 우리 나라가 황제의 마음을 본받는다 하여 기뻐할 것이니, 비록 도망하여 들어가 참소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 말이 행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자복사(慈福寺)의 전지(田地)를 중들이 모이는 곳에 이속시켜 그들의 마음을 편케 하고자 한다. 이것은 과인이 불씨의 화복설(禍福說)을 겁내서가 아니요, 또 천자가 불교를 배척한다 하여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우리 나라를 치겠느냐마는, 그러나 지금의 권도로서는 이렇게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니, 너희들도 어찌 모르겠느냐. 변계량·허조 및 3의정과 더불어 비밀히 논의하고 충분히 계획하여, 원숙은 주상에게 아뢰어 과인에게 전달하게 하라."

하였다. 등이 물러나와 계량와 논의하였는데, 계량이 아뢰기를,

"상교(上敎)가 매우 옳으니, 경을 외우고 부처를 숭봉하는 일은 당연히 거행할 것이나, 그러나 요는 그들의 마음을 편케 하여서 도망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있으니, 신의 의견으로서는 〈절의〉 노자(奴子)를 돌려주어서 그들의 마음을 편케 하고, 양계(兩界)에 엄령(嚴令)을 내려 도망치는 것을 막고, 또 이미 도망쳐 들어간 중을 돌려보내도록 청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는 아뢰기를,

"신이 명을 듣고 보니, 전하의 천 가지 생각 만 가지 생각은 국가의 장원한 계획에서 나온 것으로서 신들의 미치는 바가 아닙니다. 불도를 숭상하고 경을 외우는 일은 삼가 하교를 받들어 거행하겠습니다마는, 노자를 돌려준다는 것은 불가합니다. 다만 서울 절에 거주하는 중들은 거의 모두가 양반의 자제로서 나무를 지고 물을 긷는데 반드시 원망이 있을 것이니, 얼마쯤 노자를 주어서 그 마음을 위로하소서."

하였다. 계량 등과 함께 3정승 댁에 가서 비밀히 의논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6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2책 349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사상-불교(佛敎)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신분(身分)

○兩上御壽康宮便殿燃燭, 召兵曹參議尹淮、知申事元肅, 屛左右近侍, 諭及僧徒之事。 上王曰: "今日主上告我以僧人三十名逃入中原之事。 聽此, 忽憶昔者尹彛李初逃入上國, 誣訴本國假作倭賊, 窺覘上朝。 以高皇帝之明, 亦且惑之, 本國辨析累歲, 終不能自明。 及寡人初年, 貶上黨君 李佇于外方, 有一僧逃入上國, 告之過實, 今皇帝亦信之, 語本國使臣曰: ‘爾國王殺了親的。’ 後久備知寡人心地, 乃悟告者之誕。 又皇帝聞本國招安野人, 賜之紗帽、品帶, 及其還則以帶帽繫於馬脅之事, 哂之。 如此之類, 全是不逞之徒, 逃入上國, 虛辭交構之使然也。 且東西兩界, 境連上國, 人之逃入也甚易。 況僧徒之逃入, 又易於平民乎? 今者皇帝深信浮屠, 勝於蕭梁, 《名稱歌曲》之誦, 遍於天下; 空花佛象〔佛像〕 之瑞, 播於圖畫, 一時俗尙, 靡然趨之, 而我國則前旣革去寺社田民, 僅存十一, 今又盡去寺社奴婢, 雖其自取, 豈無怨咨乎? 此輩旣已缺望, 又聞皇帝崇佛, 必有逃入上國, 飾辭讒訴之人, 況皇帝之崇信如彼, 而我國之革除如此, 僧徒之欲逃此而入彼也無疑矣。 古之人臨時制變, 有從權變通之理, 今宜爲僧徒, 開其自慰喜悅之心。 皇帝所賜《名稱歌曲》《爲善陰騭》之類, 速令西北面黃海道等使臣來往之地, 聚會僧徒及耆老人等, 常加讀誦, 又製歌詩, 稱讃佛氏及皇帝崇信獲報瑞應屢現之狀, 令上妓肄習, 如有上國使臣, 則沿道經歷有誦經者, 燕饗歌舞有誦德者, 皇帝聞之, 必喜我國能體聖心, 雖有逃入讒訴之人, 不得售其說矣。 且欲合慈福寺田, 移屬僧人會處, 以安其心。 寡人非怵於佛氏禍福之誘也, 天子亦豈以我國排斥佛氏, 遽興師問罪哉? 然當時權宜, 不得不爾, 汝等豈不知乎? 其與卞季良許稠及三議政密議熟計, 啓于主上, 以轉達於寡人。" 等退, 與季良議之, 季良曰: "上敎甚是, 當行誦經崇佛之事, 然要在安其心, 而禁防逃逸。 臣意以爲, 宜還其奴子, 以安其心; 嚴令兩界, 以防逃逸, 且請還已逃之僧。" 曰: "臣聞命, 乃知殿下千思萬慮, 欲爲長遠之計, 非臣等所及也。 崇佛誦經之事, 謹奉敎矣, 還給奴子則不可。 但京中之寺依住僧徒, 率皆兩班子弟, 負薪汲水, 必有怨咨。 可量給奴子, 以慰其心。" 季良等偕就三相第密議。


  • 【태백산사고본】 3책 6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2책 349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사상-불교(佛敎)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신분(身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