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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4권, 세종 1년 5월 13일 정사 3번째기사 1419년 명 영락(永樂) 17년

황해도 감사가 왜선과의 대치 상황을 보고하니 김효성·장우량 등을 더 파견하다

황해도 감사가 급보하기를,

"본월 11일에 조전 절제사(助戰節制使) 이사검이 만호 이덕생과 함께 병선 5척으로써 적을 해주연평곶이[延平串]에서 엿보고 있을 때, 적선 38척이 짙은 안개 속으로 갑자기 와서, 우리의 배를 에워싸고 협박하여 양식을 구하며, 사검 등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조선을 목적하고 온 것이 아니라, 본래 중국을 향하여 가려고 하였으나, 마침 양식이 떨어졌으므로 여기에 왔노라. 만일 우리에게 양식을 주면 우리는 곧 물러가겠으며, 전일에 도두음곶이에서 싸움한 것은 우리가 먼저 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대의 나라 사람들이 우리들을 하수(下手)하기에 부득이 응하였을 뿐이라.’ 하니, 사검이 이에 사람을 보내어, 쌀 5섬과 술 10병을 주었더니, 적은 아무런 고맙다는 말도 없이 도리어, 보낸 사람을 붙잡고 양식을 더 토색질하거늘, 사검이 진무(鎭撫) 2인과 선군(船軍) 1인을 보내어 쌀 40섬을 주었으나, 적은 이속(吏屬)과 진무는 보내면서, 또 선군(船軍)을 잡아두고 사검과 서로 대치하고 있거늘, 성달생경기(京畿) 병선이 역풍(逆風)으로 인하여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고 말하고, 이에 역마를 빨리 달려 황해도의 병선을 타고 가려 했으나, 가서 본즉, 그 배는 매우 적은 데다가 이미 사검 등이 타고 있어서, 달생은 할 수 없었다."

하므로, 상왕과 임금이 심히 근심하여, 곧 대호군(大護軍) 김효성(金孝誠)경기·황해도 조전 병마사에, 전 예빈 소윤(禮賓少尹) 장우량(張友良)을 황해도 경차관(敬差官)으로 각각 명하고, 인하여 효성은 별군 약장(別軍藥匠) 20인과 우량은 30인을 거느리고 즉일로 떠나가게 하고, 임금은 수레를 몰아 환궁하여서, 또 이지실을 황해도 조전 병마 도절제사에, 김만수를 평안도 병마 도절제사로 삼으니, 그때에 만수가 죄로 인하여, 평안도 정주에 와 있었으므로, 지인(知印)을 보내어 유시(諭示)하였다. 박은·이원조말생·이명덕을 대궐로 불러, 허술한 틈을 타서 대마도를 섬멸한 뒤에 물러서서 적의 반격을 맞을 계책을 밀의하고, 밤늦게야 파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3장 B면【국편영인본】 2책 316면
  • 【분류】
    외교-왜(倭) / 인사-임면(任免) / 군사-병법(兵法)

黃海道監司飛報: "本月十一日, 助戰節制使李思儉與萬戶李德生, 以兵船五艘, 候賊于海州延平串, 賊船三十八艘乘霧暗突至圍之, 逼脅求糧, 語思儉等曰: ‘我等非爲朝鮮來, 本欲向中國, 因絶糧而至此, 若給我糧, 我當退去矣。 前日都豆音串之戰, 非我也。 汝國人先下手, 故我不得已而應之爾。’ 思儉遣吏, 遺以米五斛、酒十甁。 賊拘吏又索糧, 思儉遣鎭撫二人船軍一人, 遺以米四十斛, 賊還吏及鎭撫, 又拘船軍, 與思儉等相持。 成達生京畿兵船逆風難進爲辭, 乃乘傳疾馳, 欲以黃海兵船赴之, 至則其船本少, 而已爲思儉等所騎, 達生叵奈何?"

兩上甚憂之, 卽命大護軍金孝誠京畿黃海道助戰兵馬使, 前禮賓少尹張友良 黃海道敬差官, 因令孝誠率別軍藥匠二十人, 友良率三十人, 卽日發行。 趣駕還宮。 又以李之實黃海道助戰兵馬都節制使, 金萬壽 平安道兵馬都節制使。 時, 萬壽得罪在平安道 定州, 遣知印往諭之。 召見朴訔李原趙末生李明德于內, 密議乘虛殄殲對馬, 退邀賊還之策, 夜分乃罷。


  •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3장 B면【국편영인본】 2책 316면
  • 【분류】
    외교-왜(倭) / 인사-임면(任免) / 군사-병법(兵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