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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3권, 세종 1년 2월 3일 무인 3번째기사 1419년 명 영락(永樂) 17년

상왕이 양녕에게 간곡히 심회를 말하고 매사냥이나 하며 하고 싶은 대로 살게 하다

상왕이 편전에 좌정하니, 임금은 시종하고 양녕도 곁에 있었다. 상왕은 병조 판서 조말생·참판 이명덕·지신사(知申事) 원숙(元肅)·좌대언(左代言) 김익정(金益精)·좌부대언(左副代言) 윤회(尹淮)를 불러 앉히고 이르기를,

"나는 여러 날을 두고 양녕을 처우하는 방법을 깊이 생각하여 이제야 단안을 얻었다. 경(卿)들은 다 고금을 통달한 선비들이니, 나의 말을 분명히 들으라. 양녕의 하는 짓이 광태하여 가르쳐도 고치지 못하고 드디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반역을 도모한 죄는 전혀 없기 때문에 서울 근방에 두고 목숨이나 보존케 하려고 하였는데, 또 다시 오늘 같은 일이 있게 되니,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젊은 시절에 아들 셋을 연이어 여의고 갑술년에 양녕을 낳았는데, 그도 죽을까 두려워서 본방댁(本房宅) 【즉 여흥 부원군.】 에 두게 했고, 병자년에 효녕을 낳았는데, 열흘이 채 못되어 병을 얻었으므로, 홍영리(洪永理)의 집에 두게 했고, 정축년에 주상을 낳았다. 그때 내가 정도전 일파의 시기로 말마암아 형세가 용납되지 못하게 되니, 실로 남은 날이 얼마 없지 않나 생각되어 항상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런 낙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비와 더불어 서로 양녕을 안아 주고 업어 주고 하여, 일찍이 무릎 위를 떠난 적이 없었으며, 이로 말마암아 자애하는 마음이 가장 두터워 다른 자식과 달랐다. 그러나 세자로 봉하는 날에 있어서는 다만 적자요 장자인 때문으로 양녕을 봉한 것이며, 내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그 사이에 사정을 두었겠느냐. 양녕이 이미 동궁(東宮)에 있으면서 행동이 착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불효한 것은 차마 말할 수가 없으니, 이 뒤로는 양녕을 의정부에 회부하건 육조에 회부하건 나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며, 또 만약 법을 범한다면, 의정부가 잡아오건 육조가 잡아오건 나는 상관하지 않고 한결같이 국가의 처분만을 따를 것이며, 내시나 궁첩(宮妾)들이 감히 사정을 두고 양녕의 일을 들어 나에게 고한다면, 나는 단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그때 가서 나더러 잔인하다는 말은 말 것이며, 오직 연중의 정지 세시(正至歲時) 같은 명절에 부모를 보고자 하여 대궐 문밖에 와 있다면, 마땅히 불러 볼 것이며, 양녕의 몸에 만약 병이 있어 위급하여 빈사 상태에 빠졌다면, 또한 나에게 알려야 할 것이다. 나와 양녕은 부자지간이라, 인정상 차마 못할 일이 있거니와, 임금과 신하에 있어서는 이와 다르다. 신하가 임금에게 진실로 명분을 범한다면, 죽음을 내리는 법이 있을 따름이니, 양녕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다지만 어찌 모르겠느냐. 옛적에 당 명황(唐明皇)이 하루에 아들 셋을 죽였기로 사가[史氏]가 너무도 어질지 못하다고 꾸짖었지만, 이것은 세 아들이 죄가 없는데, 명황이 남의 중상하는 말을 듣고서 한 일이기 때문이며, 만약 그들이 참으로 죄가 있다면,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전위(傳位)한 것은 본시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한가롭게 지내고자 함에서이다. 유독 군사 관계만은 아직도 내가 거느리고 있는 것은, 주상은 나이 젊어 군무를 모르기 때문이나, 나이 30이 되어 일에 대한 경험이 많아지면, 다 맡길 생각이다. 지난날 만약 여러 아들로 원수(元帥)를 삼아 각도 병마를 갈라 맡고 장사(將士)들을 접견하게 했다면, 주상이 어찌 지금까지 군무를 모르겠느냐. 그러나 내가 감히 못한 것은 저런 험상한 위인이 동궁에 있는데, 여러 아우들이 각기 병권을 잡는다면, 어떻게 서로 용납될 수 있겠느냐."

고 하며, 양녕을 보고 말하기를,

"네가 도망해 갔을 적에, 나나 대비는 너의 생사를 알지 못하여 늘 눈물을 흘리니, 주상이 곁에 있어 역시 눈물을 흘렸다. 가령 네 몸은 편안한데, 아우들이 연고가 있다면, 너는 주상의 처사와 같이 하겠느냐. 주상은 효도와 우애가 참으로 지극하여, 너희 형제가 다 같이 보전될 수 있을 것이니, 나는 근심이 없다.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은 너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수치가 되기 때문이다. 네가 만약 도주하여 불행했다면, 후일에 어찌 네가 광망(狂妄)해서 스스로 그렇게 된 것임을 알 수 있으랴."

하며, 또 말하기를,

"어리의 죽음은 진실로 슬프고 민망하다. 어리 자신이 양녕에게 들어온 것이 아니고, 양녕이 재상의 첩을 탈취한 것이며, 또 양녕이 달아난 것도 어찌 어리 때문이겠느냐."

고 하며, 또 말하기를,

"이제 양녕에게 매[鷹子] 2연(連)과 말 3필을 주어 매사냥이나 하며 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겠다."

하고, 따라서 광주 목사나 판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하여금 수행하게 하였다. 양녕이 다시 매를 길들이는 자 장립(張立) 등 3명을 청하니, 상왕은 돌이켜보며 이르기를,

"무릇 천인이 귀인을 따르는 것은, 귀인이 잘 비호해 주기 때문인데, 너는 불초하여, 네 몸도 잘 보전치 못하면서 하물며 딴 남이랴. 사람치고 누가 너를 즐겨 따르겠느냐. 또 너는 비록 다른 기술은 없으나 매를 길들이는 것은 네 자신이 능하니, 다른 사람이 필요치 않다."

고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2책 300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사급(賜給) / 왕실-국왕(國王) / 역사-고사(故事)

○上王御便殿, 上侍, 讓寧在側。 上王召兵曹判書趙末生、參判李明德、知申事元肅、左代言金益精、左副代言尹淮賜坐, 乃言曰: "予數日深思, 所以處讓寧之方, 乃今得之。 卿等皆通今達古之儒, 明聽予言。 讓寧所爲狂悖, 敎之不悛, 遂至於此, 然謀叛之罪則其所絶無。 是以置諸近地, 欲使保全, 而乃復有今日之事, 可謂羞愧。 予早歲連失三子, 甲戌, 讓寧乃生, 恐其又死, 置諸本房宅。 【卽驪興府院君】 丙子, 孝寧生, 不十日而得疾, 置諸洪永理家, 丁丑, 主上生。 于時我爲鄭道傳輩所忌, 勢不見容, 實慮餘日無幾, 常懷鬱悒無聊, 我與大妃更相抱負, 未嘗離于膝上。 由是慈愛最篤, 異於他子。 然當建儲之日, 但以嫡長命讓寧, 予豈有一毫私意於其間乎? 讓寧旣在東宮, 而所行不善, 不孝父母, 不可忍言。 自今以後, 以讓寧付之議政府、六曹, 予不與焉。 如又犯法, 政府拿來, 吾不管; 六曹拿來, 吾不管, 一從國家處置。 宦官宮妾, 敢有私以讓寧之事告我者, 我定不饒他, 到其時莫道予忍心也。 唯正至歲時之類, 告於主上, 欲見父母, 到於闕門之外, 則當召見之。 讓寧之身若有疾病, 危急濱死, 則亦須使我知之也。 予於讓寧, 父子也, 故情有所不忍, 至於君臣, 則異於是。 臣之於君, 苟干名犯分, 則有賜死之法。 讓寧雖至愚, 豈不知乎? 昔 明皇一日殺三子, 史氏譏其不仁之甚。 此則三子無罪, 而明皇聽讒故耳。 如其眞有罪, 則亦不得已焉耳。" 又曰: "予之傳位, 本欲遺棄世事, 優游自適也。 獨於軍事, 尙且親摠者, 以主上年少, 不知軍事故耳。 待年三十, 更事旣多, 則將盡以相授矣。 向也若使諸子爲元帥, 分掌諸道兵馬, 接見將士, 則主上豈至今不知軍事哉? 然予之未敢者, 以彼猜險, 方在東宮, 而諸弟各執兵權, 則安能相容哉?" 目讓寧曰: "汝之逃出, 予與大妃未知汝生死, 常流涕, 主上在側亦流涕。 假令汝身安穩, 而諸弟有故, 則汝肯如主上之今日乎? 主上孝悌天至, 汝兄弟俱可以保全, 予無憂矣。 予之流涕者, 非爲汝也, 爲國家羞耳。 汝若走而不幸, 則後日安知汝狂妄自致乎?" 又曰: "於里之死, 誠可哀憫。 於里非自媒於讓寧也, 乃讓寧奪宰相之妾耳。 且讓寧出走, 豈於里之故哉?" 又曰: "今欲賜讓寧鷹子二連、馬三匹, 使之放鷹, 以從其欲。" 仍使廣州牧使、判官中一人隨之。 讓寧復請調鷹人張立等三人, 上王顧曰: "夫小人之從貴人者, 以貴人能庇護也。 汝旣不肖, 身且不能保, 況於他人乎? 人誰肯從汝? 且汝雖無他技, 調鷹則汝自能之, 不須他人也。"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2책 300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사급(賜給) / 왕실-국왕(國王)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