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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3권, 세종 1년 1월 30일 을해 6번째기사 1419년 명 영락(永樂) 17년

양녕이 밤에 담을 넘어 도망가다

광주(廣州)에서 달려와 아뢰기를,

"양녕이 지난밤 자정에 편지를 써서 봉해 놓고 담을 넘어 도망갔습니다."

고 하니, 상왕은 근심과 한탄으로 식사도 전폐하고 내시 최한(崔閑)홍득경(洪得敬) 및 내금위(內禁衛) 홍약(洪約)들을 보내어 앞질러 광주에 가서 찾아오게 하였다. 그리고 곧 선지를 내리기를,

"양녕 대군 이제(李禔)는 성질과 행실이 광망(狂妄)하나, 내가 골육의 정으로써 양근(楊根) 지방에 집을 마련하고 녹봉을 후히 주어 편안히 부귀를 누리게 하려고 했는데, 요새 는 그 광망한 증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독신으로 걸어 나갔다. 이 일을 경기도 관찰사로 하여금 도내에 알리어 찾아서 거느리고 오되, 그 찾은 사람의 성명을 적어서 올리도록 하라. 나는 상주기를 아끼지 않겠다."

고 하였고, 임금도 하교(下敎)하기를,

"양녕 대군은 골육의 지친이니, 경기 감사는 심력을 다해서 찾아 주길 바란다. 찾은 자에게는 중한 상을 주겠다."

고 하였다. 상왕은 이배(李倍)김경(金俓)에게 임소로 돌아가서 양녕을 찾으라고 명령하였다. 양녕이 달아남에 있어 상하가 다 허물을 애첩 어리(於里)에게 돌리니, 어리는 근심스럽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날 밤에 목을 매어 죽었다. 처음 상왕이 위(位)에 있을 적에, 임금은 잠저(潛邸)에 있었고, 양녕은 세자가 되었다. 그때 어리의 사건이 발생하여 의금부에 가두고 국문하는데, 기생[女妓] 칠점생(七點生)도 연루의 혐의로 잡혀 갇히었다. 그 기생의 말이,

"심 판서(沈判書) 댁 주인도 역시 이 일을 안다."

고 하니, 의금부는 아뢰기를,

"심온은 대신의 지위에 있으니, 동궁의 실덕한 사실을 안다면, 당장에 아뢰는 것이 마땅하거늘, 끝내 아뢰지 않고 말았으니, 그 아내마저 데려다 문초해야 된다."

고 하였다. 세자가 일찍이 금상(今上)더러 이르기를,

"어리의 아름다움을 들은 적이 오래였으나, 그가 성 밖에 있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다. 그 뒤 서울에 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 친히 그 집에 가서 나오라고 했으나, 그 집에서 숨기고 내보내지 않으므로, 내가 강요했더니, 어리가 마지못해 나왔는데, 머리에 녹두분이 묻고 세수도 하지 아니했으나, 그러나 한 번 봐도 미인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집 사람더러 말을 대령하여 태우라고 했으나, 그 집 사람이 좋아하지 않는 태도였었다. 그래서 나는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가 탄 말에 태우고 나는 걸어가겠다. ’고 했더니, 그 집 사람이 마지못해 말을 대령했다. 그래서 나는 어리의 옷소매를 끌어 말을 타게 하니, 어리는 말하기를, ‘비록 나를 붙들어 올리지 않더라도 나는 탈 작정이다.’ 하고 곧 말을 탔다. 그때 온 마을 사람들이 삼대[麻] 같이 모여 구경하였다. 그날 밤에 광통교(廣通橋) 가에 있는 오막집에 와서 자고, 이튿날에 어리는 머리를 감고 연지·분을 바르고 저물녘에 말을 타고 내 뒤를 따라 함께 궁으로 들어오는데, 어렴풋이 비치는 불빛 아래 그 얼굴을 바라보니, 잊으려도 잊을 수 없이 아름다왔다."

고 하였고, 또 효령이 임금에게 말하기를,

"광대 이법화(李法華)의 아들 이오마지(李吾麽智)는 나의 반당(伴黨)인데, 세자가 항상 법화의 집에 와서 혹은 자기도 하고, 혹은 잔치도 하니, 오마지는 매양 이웃사람을 속여 말하기를, ‘우리 주공(主公) 효령 대군이 우리 집에 왔다. ’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다른 반당 한 사람이 탐색해서 알고 겉으로 모르는 체하며, 오마지더러 말하기를, ‘나도 주공을 뵙고자 한다. ’고 하니, 오마지는 온갖 탈을 하고 들여보내지 아니했다. 새벽녘에 세자가 궁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 사람이 역시 따라와 부르면서 말하기를, ‘주공을 뵙고 싶다. ’고 하니, 오마지는 말 옆에 서 있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고 하였다. 의금부에서 심온과 그 아내의 죄를 다스리자는 주청이 오게 되자, 임금은 세자의 말한 바와 효녕의 말한 바를 갖추어 상왕께 아뢰고, 또 아뢰기를,

"신의 들은 바가 이러하옵니다. 이로 미루어 보면 경사대부(卿士大夫)로부터 여염집 서민들까지도 모르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심온을 죄를 주자고 청한 대신도 역시 어찌 몰라서 말을 안했겠습니까. 유독 심온과 그 아내에게 죄를 주자고 한다면, 옳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왕은 말하기를,

"네 말이 옳다."

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상왕은 친히 지신사(知申事) 및 대간(臺諫)을 불러들여 임금의 아뢴 바와 같이 갖추어 말하고 또 말하기를,

"심온충녕(忠寧)의 장인인데, 인정상 세자의 일을 어떻게 말하겠느냐."

고 하니, 하연(河演)이 때마침 대관(臺官)이 되어 면전에서 아뢰기를,

"전하의 분부가 지당하옵니다."

고 하였다. 그래서 신문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양녕이 간사한 소인들과 사통하여 동궁(東宮)에 드나들게 하니, 상왕이 알고 진무(鎭撫)한 사람들로 하여금 항상 동궁에 있으면서 살피게 하였는데, 하루는 양녕이 금상에게 이르기를,

"오늘 문을 지키는 진무가, 내가 세수할 때 잡인이 문에 드나드는 것을 보고 겉으로 검찰하는 시늉을 하며 언성을 높여 꾸짖기는 하나, 실상은 나를 두둔하는 모양 같았다."

고 하며, 성명을 말하지를 아니하였다. 대개는 권이(權頤)일 것이다. 금상이 동궁에 있을 적에, 심온이 금상에게 아뢰기를,

"조정 관원들의 떠드는 말이, 양녕이 만약 폐위를 당하지 않고 1, 2년만 지났다면, 임군례(任君禮)·권이(權頤)는 다 구종수(具宗秀)와 같이 될 것이라 한답니다."

고 하였다. 그 뒤에 임금은 이 사실을 다 상왕에게 아뢰었다.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8장 B면【국편영인본】 2책 300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신분(身分)

廣州馳報: "讓寧前夜三更, 作書封置, 踰垣而逃。" 上王憂歎不進膳, 命宦官崔閑洪得敬、內禁衛洪約等, 前往廣州尋之。 卽下宣旨曰: "讓寧大君 性行狂妄, 予以骨肉之意, 造家於楊根之地, 厚其俸祿, 欲使安享富貴, 今不勝狂妄, 獨身步出。 其令京畿觀察使諭道內尋訪率來, 倂見尋人姓名以聞, 予不吝賞。" 上亦下敎曰: "讓寧大君骨肉至親, 仰京畿監司盡心尋訪, 得者重賞。" 上王命李倍金俓還任, 尋訪讓寧讓寧之走也, 上下皆歸咎於嬖妾於里, 於里不勝憂憤, 是夜自縊而死。 初, 上王在位, 上在潛邸, 讓寧爲世子, 於里事發, 下義禁府鞫之。 女妓七點生, 辭連亦逮, 言曰: "沈判書宅主, 亦知此事。" 義禁府請曰: ", 大臣也, 知東宮失德之事, 義當啓之, 終不以聞。 請竝其妻收而問之。" 世子嘗謂上曰: "聞於里美久矣, 在外無如之何。 及聞入京, 親至其家令出之, 其家匿不出, 我强之, 於里不得已而出, 髮着澡豆, 面不洗, 然一見可知其美也。 我令其家人出鞍馬騎之, 其家人不肯出, 我曰: ‘然則以我所騎馬騎之, 我將步歸。’ 其家人不得已出馬, 我執於里袖, 引使騎馬, 於里曰: ‘雖不我執, 我將騎之。’ 卽騎馬。 於其時, 四隣之人聚觀如麻, 其夜至廣通橋邊小家宿。 翼日, 於里沐髮施朱鉛, 其夕騎馬, 立我後偕入宮。 火光微照, 顧見顔色, 何可忘也?" 又孝寧謂上曰: "伶人李法華之子吾麽智, 我之伴黨也。 世子常常至法華家, 或經宿或宴樂。 吾麽智每誑隣人曰: ‘我主公孝寧大君至我家。’ 我之他伴黨一人詗知之, 陽若不知, 謂吾麽智曰: ‘我亦欲見主公。’ 吾麽智百計防之不納。 及曉, 世子將入宮, 其人亦隨而呼曰: ‘欲見主公。’ 吾麽智在馬側無如之何。" 及義禁府請治及妻之罪, 上具以世子及孝寧所言啓于上王, 且曰: "臣所聞如此。 由是觀之, 自卿士大夫至閭閻小人, 無不知之者。 今請罪之大臣, 亦豈不知而不言者耶? 獨請與妻之罪, 其可乎?" 上王曰: "汝言是也。" 詰朝, 上王親見知申事及臺諫備言之, 如上所啓, 且曰: ", 忠寧之妻父也, 而言世子之事, 於情理何如?" 河演時爲臺官對曰: "上敎至當。" 於是, 乃命勿問。 讓寧私通憸小, 出入東宮, 上王知之, 令鎭撫一人常在東宮以察之。 一日, 讓寧謂上曰: "今日守門鎭撫見我洗(水)〔手〕 , 間人之出入於門, 陽爲檢察之狀, 作高聲以叱之, 心實右我也。" 不言姓名, 蓋權頤也。 上在東宮, 沈溫白上曰: "朝士喧說: ‘讓寧若不廢一二年, 則任君禮權頤, 皆如具宗秀矣。’" 其後上皆啓上王。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8장 B면【국편영인본】 2책 300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신분(身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