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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36권, 태종 18년 11월 8일 갑인 6번째기사 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예문관 대제학 변계량이 찬한 태종의 신도비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신(臣)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찬(撰)하게 하였다. 그 글은 이러하였다.

"하늘이 장차 유덕(有德)한 이에게 큰 임무를 내려주려 할 때에는 반드시 성자(聖子)·신손(神孫)을 낳게 하여 큰 운수를 열고 큰 복조(福祚)를 길게 하는 것이다. 우리 조선(朝鮮) 태조 강헌 대왕(康獻大王)이 일어나시고, 우리 태종으로써 아들을 삼고 우리 전하로써 손자를 삼았었다. 아아, 성하도다! 어찌 인위(人爲)로써 능히 미칠 수가 있는 바이겠는가? 하늘이 상(商)나라567) 왕가(王家)에 어질고 착한 임금을 잇달아 내신 것과 주(周)나라 왕가(王家)에 태왕(太王)·왕계(王季)·문왕(文王)·무왕(武王)과 같은 임금을 서로 잇달아 내신 것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신(臣)이 삼가 선원(濬源)을 살펴 보니, 이씨(李氏)전주(全州)의 이름난 대성(大姓)이었다. 사공(司空) 휘(諱) 이한(李翰)신라(新羅)에 벼슬하여 종실(宗室)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6세(六世) 휘(諱) 이긍휴(李兢休)에 이르러 비로소 고려(高麗)에 벼슬하였고, 13세(十三世) 황현조(皇玄祖) 목왕(穆王)568) 에 이르러 원조(元朝)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千夫)569) 의 장(長)이 되었고, 그 후 4세(四世)가 작위(爵位)를 이어받아서 모두 능히 선대의 업(業)을 잘 받들어 이루었다. 원(元)나라 정치가 이미 쇠약하자, 황조(皇祖) 환왕(桓王)570) 은 돌아와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조에 벼슬하여 공(功)을 쌓고 인(仁)을 쌓은 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우리 신의 왕태후(神懿王太后)께서 지정(至正) 정미년(丁未年) 5월 신묘(辛卯)에 태종(太宗)함흥부(咸興府) 후주(厚州)의 사제(私第)에서 낳으니, 우리 태조의 제5자(第五子)이었다. 나면서부터 신이(神異)하고, 점점 자리면서 영예(英睿)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고 글 읽기를 좋아하여 배움이 날로 진전하였다. 나이 20이 못되어 고려의 과거(科擧)에 급제하였다. 당시의 정사(政事)가 문란하고 백성들이 유리(流離)하여 나라 형세가 위태로우니, 개연(慨然)히 세상을 구제(救濟)할 뜻을 가지게 되었다. 태조께서 사랑하기를 여러 아들과 달리 하였고,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시중(侍中) 이색(李穡)과 함께 명나라 서울[京師]에 조현(朝見)하였고, 관(官)을 여러 번 옮겨 밀직사(密直司) 대언(代言)에 이르렀다. 홍무(洪武) 신미년(辛未年) 9월에 신의 왕후(神懿王后)가 훙(薨)하니, 제릉(齊陵)571)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상(三年喪)을 마치고자 하였는데, 임신년 봄에 태조(太祖)께서 서쪽으로 행차하였다가 병에 걸려 돌아오니, 달려와서 탕약(湯藥)을 받들어 모시었다. 공양왕(恭讓王)의 신하들이 그 틈을 타서 경복(傾覆)하기를 꾀하여 형세가 매우 위급하므로, 태종이 시기에 응하여 변(變)을 제압하고 그 괴수(魁首)를 쳐서 없애니, 모든 음모가 와해되었다. 가을 7월에 여러 장상(將相)들과 더불어 대의(大義)를 제창하여 태조를 추대(推戴)하여 집을 바꾸어 나라를 만드니, 정안군(靖安君)에 봉(封)해졌다. 갑술년 여름에명나라 고황제(高皇帝)태조의 친아들을 보내도록 명하니, 태조(太祖)가 우리 태종(太宗)이 경서(經書)에 능통하고 예(禮)에 밝아서 여러 아들중에서 가장 어질다고 하여, 즉시 보내어 명에 응(應)하게 하였다. 명나라에 이르러 황제에게 아뢴 것이 황제의 뜻에 맞았으므로, 황제가 예를 우대하여 돌려보내 주었다.

무인년(戊寅年) 가을 8월에 태조가 편찮으시니, 권신(權臣)들 가운데 집안끼리 무리를 짓고 붕당(朋黨)을 모아서 유얼(幼孼)을 끼고 정권을 마음대로 잡고 자기들의 뜻을 마음대로 펴고자 하는 자가 있어서 화(禍)의 발생이 임박하여지니, 태종이 기미(幾微)를 밝게 알아 모두 없애버리니, 그때에 종친(宗親)과 장상(將相)들이 모두 우리 태종을 세자로 삼기를 청하였으나, 태종이 굳이 사양하고, 공정왕(恭靖王)572) 을 추대하여 높이고, 위로 태조에게 청하여 세자(世子)에 책봉(冊封)하게 하여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안정시켰다. 9월 정축(丁丑)에 태조(太祖)가 병이 낫지 않으므로 공정왕(恭靖王)에게 선위(禪位)하였다.

건문(建文) 경진년 정월(正月)에 역신(逆臣) 박포(朴苞)가 동기(同氣)를 살해할 음모를 하여 몰래 방간(芳幹) 부자(父子)를 꼬이어 군사를 일으켜 난(亂)을 일으키니, 태종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평정하여, 박포를 베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고 방간을 안치(安置)하여 의친(懿親)의 정을 폐하지 아니하였다. 공정왕(恭靖王)이 후사(後嗣)가 없고, 또 개국(開國)과 정사(定社)가 모두 우리 태종의 공적이라 하여 세자(世子)로 책봉하고, 겨울 11월에 또한 병으로 우리 태종에게 전위(傳位)하였다.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니, 다음해 신사년 6월에 건문제(建文帝)가 통정시 승(通政寺丞) 장근(章勤) 등을 보내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들고 와서 우리 태종을 왕(王)으로 봉(封)하고, 겨울에 홍려시 행인(鴻臚寺行人) 반문규(潘文奎)를 보내어 와서 면복(冕服)을 하사하였는데, 그 직질(職秩)을 친왕(親王)과 같게 하였다. 임오년 겨울에 지금의 황제(皇帝)573) 가 즉위하자, 좌정승 하윤(河崙)을 보내어 등극(登極)을 하례하니, 황제가 충성을 아름답게 여겨 이듬해 계미년 4월에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하사하고,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 와서 그대로 왕(王)으로 봉(封)하였다. 가을에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을 보내 와서, 곤면(袞冕) 9장(九章)574) 금단 사라(錦段紗羅)와 서적(書籍)을 하사하고, 태조에게는 금단 사라를, 원경 왕태후(元敬王太后)에게는 관포(冠袍)와 금단 사라를 각각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이때부터 그 뒤로 황제의 하사함이 거듭 이르러 해마다 거르는 때가 없었다. 을유년에 한양(漢陽)태조께서 도읍한 곳이라 하여 여러 의논을 물리치고 환도(還都)하였다. 정해년에 황제가 정조 사신(正朝使臣)에게 말하기를, ‘조선 국왕이 지성(至誠)으로 사대(事大)한다.’ 하였고, 그 뒤부터 매양 사신이 이를 때를 당하면, 문득 임금의 지성을 칭찬하였다.

무자년 5월에 태조안가(晏駕)575) 하니, 슬퍼하고 그리워하기가 끝이 없었고, 양암(諒闇)576) 에 거처하면서 상장(喪葬)을 예(禮)로 하였다. 사신를 보내어 부고(訃告)를 알리니, 황제가 몹시 슬퍼하고 조회를 파(罷)하였으며, 예부 낭중(禮部郞中) 임관(林觀) 등을 보내어 제사에 대뢰(大牢)577) 로써 사제(賜祭)하고 시호(諡號)를 강헌(康獻)이라 주었고, 또 태종에게 칙서(勅書)를 내려 후하게 부의(賻儀)를 하사하였다. 임진년 겨울에 왕씨(王氏)의 후예(後裔)로서 민간(民間)에 숨었던 자가 있어 상언(上言)하니, 유사(攸司)에서 베기를 청하였으나, 태종이 말하기를, ‘제왕(帝王)이 일어남은 천명(天命)이 있는 것이니, 왕씨의 후예를 죽인 것은 우리 태조의 본의가 아니었다.’하고, 이에 하교(下敎)하기를, ‘왕씨의 후예로서 생존한 자들은 그들로 하여금 각각 생업(生業)에 안정하게 하라.’하였다. 갑오년 6월에 감로(甘露)578)함흥부(咸興府) 월광(月光) 구미리(仇未里)정평(定平) 백운산(白雲山)에 내렸다. 이듬해 을미년 4월에 감로(甘露)가 또 함흥부(咸興府) 덕산동(德山洞)에 내렸다. 우리 동방(東方)에서는 전고(前古)에 있지 않았던 일이었으므로 정부에서 함께 전(箋)을 올려 하례했으나, 임금이 받지 않았다. 무술년 6월에 세자 이제(李禔)가 패덕(敗德)하였으므로, 폐하여 양녕 대군(讓寧大君)으로 봉하고, 우리 전하가 총명하고 효도하고 우애가 있고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아서 나라 사람들이 촉망(屬望)하기 때문에 세자로 책봉(冊封)하고 중국에 아뢰니 황제가 윤허하였다.

이 해 8월에 우리 전하에게 선위(禪位)하고 사신을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였다. 11월에 우리 전하께서 책보(冊寶)를 받들어 호(號)를 ‘성덕 신공 상왕(聖德神功上王)’이라 바치었다. 이듬해 기해년 1월에 황제가 홍려시 승(鴻臚寺丞) 유천(劉泉) 등을 보내어 고명(誥命)을 받들고 우리 전하를 왕(王)으로 봉(封)하였다. 5월에 대마도(對馬島)왜구(倭寇)가 변경을 침범하여 군사를 죽이거나 노략질하니, 영의정 신(臣) 유정현(柳廷顯)장천군(長川君) 신(臣) 이종무(李從茂) 등에게 명하여 주사(舟師)579) 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니, 대마도왜적이 성심으로 복종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8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사연(賜宴)하였는데, 칙서(勅書)의 대략은 이러하였다. ‘왕의 지성(至誠)이 돈독하고 후(厚)하여 삼가 중국 조정을 섬겨 한결같은 덕(德)과 한결같은 마음이 처음이나 끝이나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능히 어진 사람을 고르고 덕(德)있는 사람에게 명하여 종묘(宗廟)·사직(社稷)이 의탁(依託)할 데가 있게 하니, 나라 사람들의 소망에 부응(副應)하였다.’하였고, 또 우리 전하에게 사연(賜宴)하였는데, 칙서(勅書)는 대략 이러하였다. ‘그대의 아비가 독후(篤厚)하고 노성(老成)하여 천도(天道)를 삼가 공경하고, 충순(忠順)의 정성은 더욱 오래 갈수록 변하지 않았다.’하였다.

9월에 공정왕(恭靖王)즉세(卽世)580) 하니, 참최복(斬衰服)을 입었고, 역월(易月)의 복제(服制)581) 를 마치었다. 사신을 보내어 부고를 알리니, 이듬해 4월에 황제 사신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시호를 ’공정왕(恭靖王)’이라 내렸다. 이 해 봄에 우리 전하께서 군신(群臣)을 거느리고 태상왕(太上王)의 호를 올리도록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가을 7월에 원경 왕태후(元敬王太后)가 훙(薨)하니, 우리 전하께서 심히 슬퍼함이 예(禮)에 지나치므로 〈태종께서〉 역월(易月)의 복제를 따르도록 명하였으나, 전하께서 눈물을 흘리고 울며 굳이 사양하였다. 이에 명하여 장례 뒤에는 최복(衰服)을 벗고 백의(白衣)로 복제(服制)를 마치게 하였다. 9월 임오(壬午)에 태후를 광주(廣州)의 관내 대모산(大母山)에 장사지내고 능을 ‘헌릉(獻陵) ’이라 하였다. 신축년 가을 9월에 우리 전하께서 책보(冊寶)를 받들어 태상왕의 호(號)를 바치었다. 10월 태종에게 품신(稟申)하니, 원자(元子) 향(珦)582) 을 책봉하여 세자로 삼도록 명하였다. 태종은 좀처럼 세상에 없는 뛰어난 자질로서 성학(聖學)에 밝았으며, 효도와 우애가 신명(神明)에 통하고, 정성과 공경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이르렀으며, 사대(事大)하는 일은 천자가 그 지성(至誠)을 칭송하였고, 교린(交隣)하는 일은 왜국(倭國)이 그 도(道)가 있는 데 복종하였다. 하늘을 흠모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며 검소함을 숭상하고 비용을 절약하였다. 덕(德)과 예(禮)를 먼저 하고 형벌을 삼갔으며, 충직(忠直)한 이를 등용하고 간사한 이를 내쳤으며, 이단(異端)을 물리치고 음사(淫祀)583) 를 금지하였다. 고금(古今)을 참작하여 제도를 정하고, 문교(文敎)를 밝게 하고 무비(武備)를 엄하게 하였다. 쌓였던 폐단을 모두 개혁하니, 모든 공적(功績)이 다 빛나고, 사방(四方)이 안도(按堵)하여 백성이 편안하고 산물이 풍족하니 제왕(帝王)의 도(道)가, 아! 성하였도다. 그 황제의 사랑을 얻음이 융성하였던 것과, 두 번씩이나 감로(甘露)의 상서(上瑞)를 얻었던 것도 마땅하다 하겠다. 임인년 4월에 비로소 몸이 편찮아서 5월 병인(丙寅)에 이궁(離宮)에서 훙(薨)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3일 동안 철선(輟膳)584) 하니, 군신(君臣)들이 체읍(涕涖)하면서 진선(進膳)585) 하기를 청하였으나, 마침내 허락하지 않았다. 3년상(三年喪)으로 정하고 역월(易月)의 제도를 쓰지 않았다. 태종은 춘추가 56세이고, 왕위(王位)에 있은 지 19년이었다. 왕위를 물려주고 한가하게 거(居)하면서 정양한 지 5년 만에 갑자기 승하(昇遐)하시니, 대소 신료(大小臣僚)에서 아래로 복례(僕隷)에 이르기까지 목이 메어 울지 않은이가 없고, 세월이 오랠수록 더욱 슬퍼하기를 고비(考妣)586) 의 상사(喪事)와 같이 하였다. 아, 슬프도다! 이 해 9월 초2일 병진(丙辰)에 존호(尊號)를 ‘성덕 신공 문무 광효 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라하고, 묘호를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초6일 경신(庚申)에 원경 왕태후(元敬王太后)의 능에 합장(合葬)하였으니, 이것은 유명(遺命)이었다. 중국에 부음(訃音)을 알리자, 황제가 애통하여 철조(輟朝)587) 하였고, 특별히 예부 낭중(禮部郞中) 양선(楊善) 등을 보내어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글은 대략 이러하였다. ‘오직 왕이 독후(篤厚)하고 지성(至誠)하며 총명하고 현달(賢達)하여, 삼가 중국 조정을 섬겨서 충순(忠順)한 마음이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었다. 부음(訃音)이 멀리 들리니, 진실로 깊이 애도(哀悼)한다.’하였고, 또 고명(誥命)을 하사하여 시호를 ‘공정(恭定)’이라 하였다. 또 전하에게 내린 부의(賻儀)가 넉넉하고 후(厚)하였다. 대개 우리 태종의 공덕의 성함과 우리 전하의 효성의 지극함이 전후에서 서로 이어서 황제의 마음을 잘 누린 까닭으로 시작과 마지막 때에 있어서 남달리 총애(寵愛)하는 은전(恩典)이 이와 같았으니, 그 갖춤이 지극하다 하겠다.

중궁(中宮) 원경 왕태후(元敬王太后)는 성(姓)이 민씨(閔氏)이요, 여흥(驪興) 세가(世家)였다. 고려의 문하 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문경공(文景公) 휘(諱) 민영모(閔令謨)로 부터 6세(世)에 황고조(皇高祖) 휘(諱) 민종유(閔宗儒)에 이르러 의릉(毅陵)588) 을 도와서 도첨의 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에 벼슬하였고, 시호는 충순공(忠順公)이었다. 충순공(忠順公)은 황증조(皇曾祖)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시호 문순공(文順公) 휘(諱) 민적(閔頔)을 낳았으며, 문순공(文順公)은 황조(皇祖) 대광(大匡) 여흥군(驪興君)민변(閔抃)을 낳았으며, 대광(大匡)은 황고(皇考) 순충 동덕 찬화 공신(純忠同德贊化功臣)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시호 문도공(文度公) 휘(諱) 민제(閔霽)를 낳았다. 어머니 송씨(宋氏)삼한 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封)해졌는데, 고려 중대광(重大匡) 여양군(礪良君) 휘(諱) 송선(宋璿)의 딸이었다. 선(善)을 쌓아 경사(慶事)가 돌아와서 이에 숙덕(淑德)을 낳으니, 총명하고 지혜로움이 남보다 뛰어났으므로, 곧 계년(筓年)589) 이 되자 짝을 골라서, 와서 우리 태종의 빈(嬪)이 되었다. 태종이 젊어서 세상을 구제하려는 뜻이 있어서, 마음을 경전(經典)과 사기(史記)에 두고 가산(家産)을 돌보지 않으니, 태후가 능히 집을 다스리는 데 검소하게 하고 주궤(主饋)590) 에 삼가하여서 그 공(功)을 이루게 힘쓰고, 많은 아들들을 가르쳐서 의방(義方)591) 을 따르게 하였고, 첩(妾)과 시녀를 예로 대우하여 부인의 도리를 극진히 하였다. 홍무(洪武) 임신년(壬申年)에 정녕 옹주(靖寧翁主)로 봉(封)해졌다.

무인년(戊寅年)에 태종이 정사(定社)할 때에 형세가 심히 외롭고 위태로왔는데, 태후가 마음을 다하여 도와서 큰 일을 이루게 하였다. 경진년(庚辰年) 봄에 정빈(貞嬪)으로 봉(封)해졌고, 그 해 겨울에 태종의 즉위하자 정비(靜妃)로 봉해졌다. 영락(永樂) 계미년(癸未年)에 황제가 관포(冠袍)를 하사하였으며, 이 해로부터 정유년(丁酉年)에 이르기까지 누차 황제의 하사(下賜)를 받은 것이 모두 다섯 번이었다. 무술년(戊戌年) 겨울에 우리 전하가 호(號)를 ‘후덕 왕대비(厚德王大妃)’라 바치었고, 경자년(庚子年) 9월에 시호(諡號)를 ‘원경 왕태후(元敬王太后)’라 올렸다. 춘추는 56세였다. 태후는 유한(幽閑)하고 정정(貞靜)592) 한 덕(德)을 타고났으며, 태종에게 능히 짝이 되어 내치(內治)에 오로지하여서 20년 동안 궁중의 법도[壼儀]가 엄숙하고 화목(和穆)하였고, 또 거룩한 아들[聖子]을 낳아서 종묘와 사직을 맡도록 하여 영광스러운 봉양(奉養)을 누리었다. 훙(薨)하자 빈(嬪)·잉(媵)·첩(妾)·시녀(侍女)들이 마음을 다하여 비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부인(婦人)은 모의(母儀)가 지극하였으니, 4남 4녀를 낳았는데, 우리 전하는 세째이다. 장자는 곧 제(禔)이고, 다음은 보(𥙷)이니 효령 대군(孝寧大君)에 봉해졌고, 다음은 종()이니 성녕 대군(誠寧大君)에 봉해졌으나 먼저 졸(卒)하였다. 장녀(長女)는 정순 공주(貞順公主)이니, 청평 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으나 같은 이씨(李氏)가 아니다. 다음은 경정 공주(慶貞公主)이니, 평양 부원군(平壤府院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경안 공주(慶安公主)이니, 길창군(吉昌君) 권규(權跬)에게 시집갔으나 또한 먼저 졸(卒)하였다. 다음은 정선 공주(貞善公主)이니,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에게 시집갔다. 의빈(懿嬪) 권씨(權氏)가 1녀를 낳았는데, 정혜 옹주(貞惠翁主)이니, 운성군(雲城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시집갔다. 소혜궁주(昭惠宮主) 노씨(盧氏)가 1녀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신녕 궁주(信寧宮主) 신씨(辛氏)가 3남 7녀를 낳았는데, 장남 인(䄄)공녕군(恭寧君)에 봉해졌으며,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장녀 정신 옹주(貞信翁主)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季童)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정정 옹주(貞靜翁主)이니 한원군(漢原君) 조선(趙璿)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숙정 옹주(淑貞翁主)이니 일성군(日城君) 정효전(鄭孝全)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아직 어리다. 궁인(宮人) 안씨(安氏)가 1남 3녀를 낳았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김씨(金氏)가 1남을 낳았는데, 비()이니 경녕군(敬寧君)에 봉해졌다. 고씨(高氏)가 1남을 낳았고, 최씨(崔氏)가 1남1녀를 낳았고, 이씨(李氏)가 1남을 낳았고, 김씨(金氏)가 1녀를 낳았으나 모두 아직 어리다. 우리 중궁(中宮) 공비(恭妃) 심씨(沈氏)는 문하 시중(門下侍中) 휘(諱) 심덕부(沈德符)의 네째아들 심온(沈溫)의 딸인데, 4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곧 세자(世子)이고, 나머지는 모두 아직 어리다. 양녕 대군(讓寧大君)김한로(金漢老)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으나 모두 아직 어리다. 효령 대군(孝寧大君)이 전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 정역(鄭易)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낳았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성녕 대군(誠寧大君)이 전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성억(成抑)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자식이 없다. 정순 공주(貞順公主)가 1녀를 낳았는데, 용양 시위사(龍驤侍衛司) 호군(護軍) 이계린(李季疄)에게 시집갔으나, 또한 같은 이씨가 아니다. 경정 공주(慶貞公主)가 4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돈녕부 승(敦寧府丞) 안진(安進)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유학(幼學) 김중암(金仲淹)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경안 공주(慶安公主)가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한성 소윤(漢城少尹) 정연(鄭淵)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다음은 아직 어리다. 정선 공주(貞善公主)가 2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경녕군(敬寧君)이 호조 참의(戶曹參議) 김관(金灌)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으나, 모두 아직 어리다. 공녕군(恭寧君)이 병조 참판(兵曹參判) 최사강(崔士康)의 딸에게 장가들어 2녀를 낳았으나, 모두 아직 어리다.

신은 간절히 보건대, 우리 태종의 성한 덕과 높은 공이 진실로 이미 백왕(百王)의 위에 높이 뛰어났으며, 배필(配匹)의 어짊과 내조(內助)의 공(功)도 또 촉(蜀)·도(塗)·신(莘)·지(摯)593) 와 더불어 부서(符瑞)를 같이하여서 아름다움을 짝할 만한 것이었다. 군신(群臣)들이 다 능(陵)의 신도비(神道碑)에 명(銘)을 새기어 영세(永世)에 밝게 보이기를 원하므로, 전하께서 신(臣)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시니, 신 변계량이 명을 받들어 삼가고 두려워하나, 감히 사양하지 못하여 삼가 배수(拜手)하고 계수(稽首)하여 명(銘)을 바친다.

명(銘)에 이르기를, ‘하늘이 해동(海東)을 사랑하여 우리 태종을 내려 주셨네. 부지런하신 태종께서 성한 덕(德)을 몸에 지녔네. 거룩한 아버지를 추대하여 능히 위대한 공업을 이루고 이에 황제의 조정에 조근(朝覲)하여 아뢰니 황제가 따르고 용납하였네. 황제의 은총(恩寵)을 넉넉히 입어 백성들을 보호하였도다. 기미(幾微)를 훤하게 알아 난(亂)을 평정하고, 적장(嫡長)594) 을 이에 높이었네, 비록 집안 싸움을 만났으나, 우애가 오히려 두터웠네. 효제(孝悌)의 지극함은 전고(前古)에 듣기 드물었네. 오직 덕이 두텁고 오직 공(功)이 성하니, 천감(天鑑)595) 이 매우 밝아 이에 거듭 보우(保佑)하셨네. 휘황찬란한 금보(金寶)가 전후(前後)에 빛나고, 황제의 고명(誥命)이 잇달아 이르니, 내가 이에 왕위를 받았네, 할아버지의 훈계에 오로지 복종하여 한북(漢北)에 환도(還都)하고 예악(禮樂)을 제작하니, 밝게 빛나도다. 상(喪)을 당하여 여막(廬幕)에 살면서 애모(哀慕)함이 끝이 없고, 장례(葬禮)와 제례(祭禮)를 옛 법대로 식(式)을 삼았네. 중국 조정을 공경하여 섬기니, 황제가 지성(至誠)함을 칭송하였네. 엄숙히 제사를 받드니, 신명(神明)에 감응하였네. 교린(交隣)함에 도(道)가 있으니, 왜방(倭邦)내정(來庭)596) 하였네. 왕씨(王氏) 후예(後裔)를 불상히 여겨 그 생업(生業)을 이루게 하였네. 중외(中外)가 평안한 지 20년을 내려오니, 촉촉한 감로(甘露)가 해마다 함흥부(咸興府)에 내렸도다. 혼매(昏昧)한 이를 폐하고 덕(德) 있는 이에 명하여서 백성들의 임금을 삼았도다. 오랜 세월을 향수(享壽)하여 아버님이 이 땅에 임(臨)하기를 기약하였더니, 어찌 빈천(賓天)597) 을 재촉하여, 한 병이 낫지 않았던가? 슬프고 슬프도다. 거룩한 아드님[聖子]이 몹시 애통함이 비할 데 없도다. 철선(輟膳)을 3일 동안 하고 상심을 이기지 못하네. 무릇 온갖 상사(喪事)을 오직 예(禮)대로 이행하였네. 황제가 듣고 몹시 슬퍼하여 사자를 보내어 제사지내며, 시호(諡號)를 주어 포장(褒奬)하여 높이고, 부의(賻儀)를 내려 줌이 매우 융숭하였네. 휼전(䘏典)598) 을 갖추어 신공(臣工)에게 기뻐함이 넘치게 하였도다. 태후(太后)를 생각하고 사모하니, 진실로 숙옹(肅雝)599) 하였네. 정사(定社)함을 비밀히 도우고 진실로 크게 총명한 이의 짝이 되어 성철(聖哲)한 아들을 낳아 종묘(宗廟)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네. 하늘처럼 건전하고 밝으심은 공정 대왕(恭定大王)의 덕이요, 땅처럼 후(厚)하고 바르심은 원경 왕후(元敬王后)의 법칙이네. 살아서는 금슬(琴瑟)의 벗이요, 죽어서는 같은 땅에 묻히었네. 자손이 번성하니, 아아! 그 기린(麒麟)같은 자손이 끊이지 않고 종묘 제사를 억만 년 이어가리.’하였다.

신이 절하고 사(詞)를 바치니 굳고 단단한 돌에 새기어 만세토록 마멸(磨滅)되지 않고, 우리 동방(東方)에 비추게 하소서."


  • 【태백산사고본】 16책 36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2책 249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국왕(國王) / 역사-사학(史學) / 어문학-문학(文學)

  • [註 567]
    상(商)나라 : 은(殷).
  • [註 568]
    목왕(穆王) : 목조(穆祖).
  • [註 569]
    천부(千夫) : 천 명의 군사.
  • [註 570]
    환왕(桓王) : 환조(桓祖).
  • [註 571]
    제릉(齊陵) : 신의 왕후의 능.
  • [註 572]
    공정왕(恭靖王) : 정종(定宗).
  • [註 573]
    황제(皇帝) :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
  • [註 574]
    9장(九章) : 조선조 때의 임금의 정복인 면류관과 곤복에, 의(衣)에는 산(山)·용(龍)·화(火)·화충(華蟲)과 종이(宗彝)의 다섯 가지를 그리고, 상(裳)에는 마름·분미(粉米)·보(黼)·불 등 네 가지를 수놓은 것.
  • [註 575]
    안가(晏駕) : 임금의 죽음.
  • [註 576]
    양암(諒闇) : 임금이 부모의 상중(喪中)에 있음, 또는 그 기간 중에 거처하는 방. 양음(諒陰).
  • [註 577]
    대뢰(大牢) : 나라 제사 때에 소를 통째 제물로 바치던 일. 처음에는 소·양·돼지를 함께 바치는 것을 대뢰라고 하였으나, 뒤에는 소만 바치게 하였음.
  • [註 578]
    감로(甘露) : 단 이슬. 임금이 선정(善政)을 하여 천하가 태평하면 하늘이 상서(祥瑞)로 내리는 것이라 함.
  • [註 579]
    주사(舟師) : 수군(水軍).
  • [註 580]
    즉세(卽世) : 죽음.
  • [註 581]
    역월(易月)의 복제(服制) : 상제(喪制)에 있어 날을 달로 계산하여 복제(服制)를 빨리 끝마치던 제도.
  • [註 582]
    향(珦) : 뒤의 문종(文宗).
  • [註 583]
    음사(淫祀) : 옳지 않은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
  • [註 584]
    철선(輟膳) : 수라를 들지 않음.
  • [註 585]
    진선(進膳) : 수라를 듬.
  • [註 586]
    고비(考妣) : 돌아간 부모.
  • [註 587]
    철조(輟朝) : 제왕이 조회를 폐함.
  • [註 588]
    의릉(毅陵) : 충숙왕(忠肅王).
  • [註 589]
    계년(筓年) : 여자가 시집갈 나이로 처음 비녀를 꽂는 해.
  • [註 590]
    주궤(主饋) : 공궤(供饋)를 주장함.
  • [註 591]
    의방(義方) : 의(義)를 지켜 외모를 단정히 함.
  • [註 592]
    정정(貞靜) : 부녀가 인품이 높아 얌전하고 점잖음.
  • [註 593]
    촉(蜀)·도(塗)·신(莘)·지(摯) : 모두 고대 중국 후비(后妃)의 출신지를 말함. ‘촉’은 황제(皇帝)의 아들 창의(昌意)의 아내 촉산씨(蜀山氏)의 딸의 출생지이고, ‘도’는 우(禹)임금이 아내 도산씨(塗山氏)를 맞이한 곳임. ‘신(莘)’은 문왕(文王)의 아내 태사(太姒)의 출신지이고, ‘지’는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의 출신지임.
  • [註 594]
    적장(嫡長) : 적실(嫡室)에서 난 후손의 맏아들과 맏손자.
  • [註 595]
    천감(天鑑) : 상제(上帝)의 감시(監視).
  • [註 596]
    내정(來庭) : 조정에 들어와서 임금을 뵘.
  • [註 597]
    빈천(賓天) : 임금의 죽음을 말함.
  • [註 598]
    휼전(䘏典) : 사망한 사람의 사후를 장식하는 의식 제도.
  • [註 599]
    숙옹(肅雝) : 삼가고 화합함.

○命藝文館大提學臣卞季良撰神道碑文。 其文曰:

天之將降大任於有德也, 必生聖子神孫, 以開景運, 以永洪祚。 我朝鮮 太祖康獻大王之興也, 以我太宗爲子, 以我殿下爲孫。 噫戲盛矣, 豈人爲之所能及哉? 天也其與商家賢聖之君繼作; 周家 太王王季之相承, 何以異哉?

臣謹按璿源, 李氏, 之望姓。 司空諱新羅, 娶宗室之女, 六世而至諱兢休, 始仕高麗。 十三世而至皇玄祖穆王, 入仕元朝而長千夫, 四世襲爵, 咸能濟美。 政旣衰, 皇祖桓王還仕高麗 恭愍王, 積功累仁, 其來久矣。 我神懿王太后至正丁未五月辛卯, 誕太宗咸興府 厚州私第, 我太祖之第五子。 生而神異, 稍長英睿絶倫, 好讀書, 學日進, 年未冠, 中高麗科第。 時, 政散民離, 國勢杌隉, 慨然有濟世之志, 太祖愛之異諸子。 嘗以書狀官, 偕侍中李穡朝京師, 累官至密直司代言。 洪武辛未九月, 神懿王后薨, 廬于齊陵之側, 欲終三年, 壬申春, 太祖西行, 遘疾而還, 來侍湯藥。 恭讓之臣, 乘隙謀傾, 勢甚急。 太宗應機制變, 討除渠魁, 群謀瓦解。 秋七月, 與諸將相倡以大義, 推戴太祖, 化家爲國, 封靖安君

甲戌夏, 高皇帝命遣親男入朝, 太祖以我太宗通經達禮, 最賢諸子, 卽遣應命。 旣至, 敷奏稱旨, 優禮賜還。 戊寅秋八月, 太祖不豫, 權臣朋家聚黨, 有欲挾幼擅政, 以肆己志者, 禍發斯迫, 太宗炳幾殲除。 時, 宗親、將相皆欲請冊我太宗爲世子, 太宗牢辭, 推尊恭靖, 上請太祖, 冊封世子, 以定宗社。 九月丁丑, 太祖以疾未瘳, 禪于恭靖

建文庚辰正月, 逆臣朴苞謀戕同氣, 陰誘芳幹父子, 稱兵爲亂, 太宗勒軍平之。 誅餘悉釋, 安置芳幹, 不廢懿親。 恭靖以無嗣, 且謂開國定社, 皆我太宗之績, 冊爲世子。 冬十有一月, 亦以疾傳位于我太宗, 遣使請命。 明年辛巳六月, 建文帝遣通政寺丞章謹等, 奉誥命印章, 來封我太宗爲王。 冬, 遣鴻臚寺行人潘文奎, 來錫冕服, 秩視親王。 歲壬午, 今皇帝卽位, 遣左政丞臣河崙賀登極, 帝嘉忠誠, 明年癸未四月, 賜以誥印, 遣都指揮使高得等來, 仍封爲王。 秋, 遣翰林待詔王延齡, 來錫袞冕九章、錦段紗羅、書籍, 太祖錦段紗羅, 元敬王太后冠袍錦段紗羅各有差。 自時厥後, 帝賚荐至, 無虛歲矣。

歲乙酉, 以漢陽 太祖所都, 排群議而還。 歲丁亥, 帝語正朝使臣曰: "朝鮮國王至誠事大。" 自後每當使臣之至, 輒稱至誠。 戊子五月, 太祖晏駕, 哀慕罔極, 居于諒闇, 喪葬以禮。 遣使告訃, 帝震悼罷朝, 遣禮部郞中林觀等, 賜祭太牢, 贈諡康獻。 又勑太宗, 賜厚賻。

壬辰冬, 有以王氏之裔, 隱於民間者上言, 攸司請誅之, 太宗曰: "帝王之興, 自有天命。 誅王氏之後, 非我太祖本意。" 乃下敎曰: "王氏之後存者, 俾之各安生業。" 甲午六月, 甘露降于咸興府 月光仇未里定平 白雲山, 明年乙未四月, 甘露又降咸興府 德山洞, 吾東方前古所未有也。 政府俱進箋賀, 不受。

戊戌六月, 以世子敗德廢之, 封讓寧大君。 以我殿下聰明孝悌, 好學不倦, 國人屬望, 冊封世子以聞, 帝兪允。 是年八月, 禪于我殿下, 遣使請命。 十有一月, 我殿下奉冊寶, 獻號曰聖德神功上王。 明年己亥正月, 帝遣鴻臚寺丞劉泉等, 奉誥命封我殿下爲王。 五月, 對馬島 犯邊, 殺掠軍士, 命領議政臣柳廷顯長川君李從茂等, 以舟師往討之, 島納款如舊。

八月, 帝遣使賜宴, 勑書略曰: "王至誠篤厚, 祗事朝廷, 一德一心, 終始不怠。 能簡賢命德, 宗祀有託, 以副國人之望。" 又賜宴我殿下, 勑書略曰: "爾父篤厚老成, 祗敬天道, 忠順之誠, 兪久不替。" 九月, 恭靖王卽世, 服斬衰, 終易月之制, 遣使告訃。 明年四月, 帝遣使致祭, 賜諡恭靖。 是年春, 我殿下率群臣, 請上太上王之號, 不允。 秋七月, 元敬王太后薨, 以我殿下哀毁過禮, 命從易月之制, 殿下涕泣固辭, 乃命葬後釋服, 白衣終制。 九月壬午, 葬太后于廣州治之大母山, 陵曰。 辛丑秋九月, 我殿下奉冊寶, 獻太上王之號。 十月, 稟太宗, 命冊封元子爲世子。

太宗以不世之資, 緝熙聖學, 孝悌通於神明, 誠敬格于宗社。 事大則天子稱其至誠; 交隣則邦服其有道。 欽天䘏民, 崇儉節用。 先德禮而愼刑罰, 進忠直而黜奸邪, 闢異端而禁淫祀, 酌古今以定制度, 昭文敎而嚴武備, 積弊悉革而庶績咸熙, 四境按堵而民安物阜。 帝王之道, 嗚呼盛哉! 宜其紆帝眷之隆, 再獲甘露之上瑞矣。 壬寅四月始不豫, 五月丙寅, 薨于離宮。 我殿下不勝哀痛, 三日輟膳, 群臣涕泣請進膳, 竟不許。 定爲三年之喪, 不用易月之制。 太宗春秋五十六歲, 在王位十有九年, 居閑頤養五年, 而弓劍忽遺, 大小臣僚, 下至僕隷, 莫不失聲號哭, 愈久愈哀, 如喪考妣。 嗚呼慟哉! 以是年九月初二日丙辰, 上尊號曰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 廟號太宗。 初六日庚申, 合葬于元敬王太后之陵, 遺命也。 及訃聞, 帝哀慟輟朝, 特遣禮部郞中楊善等賜祭, 其文略曰: "惟王篤厚至誠, 聰明賢達, 敬事朝廷, 忠順之心, 終始不替。 訃音遠聞, 良深感悼。" 又賜誥命, 諡曰恭定, 又賜殿下賻優厚, 蓋我太宗功德之盛及我殿下孝誠之至, 前後相承, 克享天心, 故於始終之際, 寵異之典, 如此其備至矣。

中宮元敬王太后閔氏, 驪興世家。 自高麗門下侍郞平章事文景公令謨, 六世而至皇高祖諱宗儒, 相毅陵, 位都僉議侍郞贊成事, 諡忠順忠順生皇曾祖判密直司事諡文順, 文順生皇祖大匡驪興君, 大匡生皇考純忠同德贊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驪興府院君修文殿大提學領藝文春秋館事諡文度。 母宋氏, 封三韓國大夫人, 高麗重大匡礪良君之女。 積善流慶, 是生淑德, 聰慧異常, 將筓擇配, 來嬪于我太宗

太宗少有濟世之志, 留心經史, 不事家産, 太后能儉於治家, 謹於主饋, 以勉其功。 敎誨多男, 俾循義方; 禮遇妾侍, 克盡婦道。 洪武壬申, 封靖寧翁主。 戊寅, 太宗定社之際, 勢甚孤危, 太后盡心輔贊, 以濟大事。 庚辰春, 封貞嬪, 其年冬, 太宗卽位, 封靜妃永樂癸未, 帝賜冠袍, 自是年至丁酉, 累受帝賜凡五。 戊戌冬, 我殿下獻號曰厚德王大妃。 庚子九月, 上諡元敬王太后, 春秋五十六歲。 太后稟幽閑貞靜之德, 克配太宗, 以專內治, 二十年間, 壼儀肅穆, 又誕聖子, 俾主宗社, 以享榮養。 及薨, 嬪媵妾侍, 莫不盡心悲痛, 婦則母儀其至矣乎。

誕四男四女, 我殿下居三。 長卽; 次曰(補)〔𥙷〕 , 封孝寧大君; 次曰 , 封誠寧大君, 先卒。 女長貞順公主, 下嫁淸平府院君 李伯剛, 非一也; 次慶貞公主, 下嫁平壤府院君 趙大臨; 次慶安公主, 下嫁吉昌君 權跬, 亦先卒; 次貞善公主, 下嫁宜山君 南暉懿嬪 權氏生一女, 貞惠翁主雲城君 朴從愚昭惠宮主 盧氏生一女, 幼。 信寧宮主 辛氏生三男七女, 男長, 封恭寧君, 餘幼, 女長貞信翁主鈴平君 尹季童, 次貞靜翁主漢原君 趙璿, 次淑貞翁主日城君 鄭孝全, 餘皆幼。 宮人 安氏生一男三女, 皆幼, 金氏生一男 , 封敬寧君高氏生一男, 崔氏生一男一女, 李氏生一男, 金氏生一女, 皆幼。

我中宮恭妃 沈氏, 門下侍中諱(德苻)〔德符〕 第四子之女, 誕四男二女, 男長卽世子, 餘皆幼。 讓寧金漢老之女, 生三男一女, 皆幼。 孝寧娶前判中軍都摠制府事鄭易之女, 生四男, 皆幼。 誠寧娶前全羅道都觀察使成抑之女, 無子。 貞順公主生一女, 適龍驤侍衛司護軍李季疄, 亦非一慶貞公主生四女, 長適敦寧府丞安進, 次適幼學金仲淹, 餘幼。 慶安公主生二男, 男長娶漢城少尹鄭淵之女, 次幼。 貞善公主生二男一女, 皆幼。 敬寧娶戶曹參議金灌之女, 生二男, 皆幼。 恭寧娶兵曹參判崔士康之女, 生二女, 皆幼。

臣竊觀, 我太宗之盛德隆功, 固已高出於百王之上矣, 而配匹之賢、內助之功, 又有可與同符而儷美者矣。 群臣咸願刻銘于陵之神道碑, 昭示永世, 殿下以命臣季良, 臣季良承命祗慄, 不敢辭, 謹拜手稽首而獻銘, 銘曰:

天眷海東, 降我太宗。 亹亹太宗, 盛德在躬。 推戴聖父, 克集大功。 乃覲帝庭, 敷奏從容。 優荷睿恩, 保我黎元。 炳幾靖亂, 嫡長是尊。 雖値鬩墻, 友愛猶惇。 孝悌之至, 從古罕聞。 維德之厚, 維功之懋。 天鑑孔昭, 式申保佑。 煌煌金寶, 輝映前後。 帝誥荐臻, 我乃龍受。 祖訓惟服, 還于北。 制作禮樂, 煥乎郁郁。 遭喪居廬, 哀慕罔極。 以葬以祭, 古典是式。 祇事朝廷, 帝稱至誠。 肅肅承祀, 感于神明。 交隣有道, 邦來庭。 存䘏王裔, 俾遂其生。 中外乂安, 垂二十齡。 浥浥甘露, 歲降咸府。 廢昏命德, 以作民主。 期享永年, 父臨下土。 何促賓天? 一疾莫愈。 哀哀聖子, 痛悼無比。 輟膳三日, 不勝摧毁。 凡百喪事, 維禮之履。 帝聞慟悼, 遣使以祀。 贈諡褒崇, 賜賻優隆。 䘏典之備, 喜(諡)〔溢〕 臣工。 思齊太后, 允也肅雝。 密贊定社, 克配亶聰。 篤生聖哲, 俾主宗祏。 乾健離明, 恭定之德。 坤厚柔貞, 元敬之則。 琴瑟以友, 藏同其域。 子孫振振, 于嗟其麟。 綿綿宗祀, 垂億萬春。 臣拜獻詞, 刻之貞珉。 萬代不磨, 照我東垠。

太宗恭定大王實錄卷第三十六終


  • 【태백산사고본】 16책 36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2책 249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국왕(國王) / 역사-사학(史學)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