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가 내관 박지생을 보내어 친히 지은 수서를 상서하다
세자가 내관(內官) 박지생(朴枝生)을 보내어 친히 지은 수서(手書)347) 를 상서(上書)하였는데, 사연은 이러하였다.
"전하(殿下)의 시녀(侍女)는 다 궁중(宮中)에 들이는데, 어찌 다 중하게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입니까? 가이(加伊)를 내보내고자 하시나, 그가 살아가기가 어려울 것을 불쌍히 여기고, 또 바깥에 내보내어 사람들과 서로 통(通)하게 하면 성예(聲譽)가 아름답지 못할 것이므로, 이 때문에 내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지금에 이르도록 신(臣)의 여러 첩(妾)을 내보내어 곡성(哭聲)이 사방에 이르고 원망이 나라 안에 가득차니, 어찌 스스로에게서 반성하여 구하지 않으십니까? 선(善)함을 책(責)한다면 이별 해야 하고, 이별한다면 상(祥)스럽지 못함이 너무나 클 것인데, 신은 이와 같은 일이 없었던 까닭으로 악기(樂器)의 줄을 끊어 버리는 행동을 차마 할 수가 없었고, 장래 성색(聲色)을 마음대로 할 계책을 오로지 뜻에 따르고 정(情)에 맡겨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산동(山東)에 거(居)할 때에 재물을 탐내고 색(色)을 좋아하였으나 마침내 천하(天下)를 평정하였고, 진왕(晉王) 광(廣)이 비록 그 어질다고 칭하였으나 그가 즉위함에 미치자 몸이 위태롭고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전하는 어찌 신이 끝내 크게 효도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이 첩(妾) 하나를 금하다가 잃는 것이 많을 것이요, 얻는 것이 적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잃는 것이 많다고 하느냐 하면, 능히 천만세(千萬世) 자손(子孫)의 첩(妾)을 금지할 수 없으니, 이것이 잃는 것이 많다는 것이요, 첩(妾) 하나를 내보내는 것이 얻는 것이 적다는 것입니다. 왕자(王者)는 사(私)가 없어야 하는데, 신효창(申孝昌)은 태조(太祖)를 불의(不義)에 빠뜨렸으니 죄가 무거운데 이를 용서하였고, 김한로(金漢老)는 오로지 신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를 일삼았을 뿐인데 포의지교(布衣之交)348) 를 잊고 이를 버려서 폭로(暴露)하시니, 공신(功臣)이 이로부터 위험하여질 것입니다. 숙빈(淑嬪)이 아이를 가졌는데 일체 죽(粥)도 마시지 아니하니, 하루 아침에 변고(變故)라도 생긴다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스스로 새 사람이 되어, 일호(一毫)라도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임금이 이를 읽어보고 육대언(六代言)과 변계량(卞季良)에게 내어 보이고,
"이 말은 모두 나를 욕하는 것이니, 이른바 ‘아버지가 올바르게 하지 못한다.’는 말인데, 내가 만약 부끄러움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 글을 너희들에게 보이겠느냐? 모두 망령된 일을 가지고 말을 하니, 내가 변명(辯明)하고자 한다."
하고, 변계량으로 하여금 답서(答書)를 짓게 하니, 아뢰기를,
"이 일은 모두 망령된 것인데, 어찌 족히 답(答)하여 줄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의(義)를 들어 꾸짖는 것이 가(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옳다. 세자는 나의 선(善)하라고 꾸짖는 말을 싫어한다. 옛날에 아들을 바꾸어서 가르쳤으니, 금후로는 대신이 이를 가르치고 나는 관대(寬大)할 것이다. 내가 옛날에 내풍류(內風流)349) 를 들이었는데, 다만 내 몸이 한가로운 데 나아가기 위함이 아니었고 태조(太祖)의 오락을 위함이었던 것을 지신사(知申事)가 알고 있는 바이다. 형세가 장차 가르치기가 어렵겠으니, 이를 어떻게 처리할까?"
하니, 조말생(趙末生) 등 5인이 모두 어리(於里)를 참(斬)하여서 그 유혹을 근절하고자 청하였으나, 변계량·김효손(金孝孫)은,
"도리어 어둡고 고집이 세기가 이미 심하여, 사세가 즉시 중지시키기가 어렵겠으니, 우선 그 여자를 돌려 주소서."
하였다. 임금이,
"육대언(六代言)의 말과 같이 한다면, 그의 원망과 혐의를 가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장차 사람을 보내어 이를 꾸짖겠다."
하고, 명하여 박지생의 공초(供招)를 받게 하니, 그 공초에 말하기를,
"세자가 금후로 만약 계문(啓聞)할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반드시 먼저 보내어 계문하고, 주상이 허락한 뒤에 예궐하여 직달(直達)하겠습니다. 식(式)에 의하여 일 이외에 입전(入傳)하거나 상서(上書)하지 말게 하고, 이와 같은 뜻을 윤덕인(尹德仁)과 전내(殿內) 내관(內官)에게 전(傳)하여 설명하여 시행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크게 징계하여 뒷사람에게 감계(鑑戒)가 되게 하고, 만약 모반(謀叛)과 시사(時事)는 이 한계에 두지 마소서."
하였다. 박지생에게 명하여 세자에게 전하여 유시(諭示)하였는데, 그 사연에 이르기를,
"일전에 내가 너에게 김한로가 여자를 바친 일을 고(告)하고, 또 말하기를, ‘이 말이 만약 나간다면 국가에서 반드시 이를 죽이고자 할 것이다.’하였고, 김한로도 또한 말하기를, ‘신의 죄는 열 번 죽어야 한다.’하였는데, 너는 어찌하여 김한로가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신효창(申孝昌)이 왕명(王命)을 받고 태조(太祖)를 수종(隨從)하였던 까닭에 유사(有司)가 비록 청(請)하더라도 내 마음에는 미편(未便)하다고 생각하여 윤허(允許)하지 않았는데, 너는 어찌하여 신효창의 죄가 무겁다고 생각하느냐? 숙빈(淑嬪)이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죄인의 딸이라고 혐의하지 아니하고 전(殿)에 돌아오게 하였는데, 비록 죽더라도 내가 어찌 아까와하겠느냐? 네가 어찌 죽(粥)을 먹지 않아 변고(變故)가 있으면 보통 일이 아니라고 하여 내 마음이 움직일까 두려워하겠는가? 사부(師傅)·빈객(賓客)이 김한로와 절연(絶緣)하여 어버이로 삼지 않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절연하여 나주(羅州)로 부처(付處)하였다. 만약 다시 청함이 있으면 그의 죽음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하였다. 박지생이 즉시 경도(京都)로 돌아갔다. 세자의 사람됨이 광포(狂暴)하고, 미혹(迷惑)하고, 음란하고, 오락을 즐기고, 말을 달리기를 좋아하고, 유생(儒生)을 좋아 하지 아니하고, 학문(學問)을 일삼지 않았다. 매양 서연(書筵)에는 병이라 칭하고 나오지 않다가, 서연관(書筵官)이 두세 번씩 청한 뒤에야 혹은 나왔다. 강론(講論)하는 스승이 앞에 있으면서 전에 한 말과 지나간 행동을 이끌어다가 되풀이하여 이를 타일러도 전심(專心)하여 이를 듣지 않았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은 활 쏘고 말 타고 힘이 센 무사(武士)가 아니면 반드시 맞추는 폐인(嬖人)350) ·영인(伶人)351) 의 무리였다. 일찍이 임금이 강무(講武)로 평강(平康)에 출행(出行)하던 날에 연고를 칭탁하고 나오지 않아서 도성(都城) 문에서 배송(拜送)하는 예(禮)를 폐(廢)하였으나, 즉시 그날 그 군소배(群小輩)를 거느리고 몰래 금천(衿川)·부평(富平) 등지로 가서 말을 달려 사냥하고 매를 놓고 배를 띄워서 즐기다가 3일 만에 돌아왔다. 또 임금이 중국 조정(朝廷)의 사신(使臣)을 연회하던 날에 세자에게 명하여 시연(侍宴)하게 하니, 바야흐로 창기(倡妓)에게 빠져서 병이라 핑계하고 따르지 않았다. 함길도 절제사(咸吉道節制使)가 훌륭한 매를 바친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길에서 요구하게 하여 유혹하여 이를 빼앗고 다른 매를 대신하여 바치게 하였다. 또 4월 8일 밤에 궁(宮)의 담장을 넘어 가서 간사한 소인배의 무리와 더불어 탄자(彈子)를 가지고 등(燈)을 쏘는 놀이를 하였다. 일찍이 폐인(嬖人) 구종수(具宗秀)·영인(伶人) 이오방(李五方) 등과 몰래 결탁하여 담장을 넘어서 궁(宮)에 들어오게 하여 바둑을 두고 술을 마시면서 저녁까지 이르렀고, 혹은 달밤에 군소배와 담장을 넘어 나가서 길 위에서 노닐고 비파(琵琶)를 치면서 놀이하였다. 또 이오방 등과 더불어 구종수의 집에 가서 술에 취하여 새벽녘까지 이른 적이 두 번이었는데, 그 일이 발각되자, 구종수·이오방 등이 모두 복주(伏誅)되었다. 제(禔)가 잘못을 뉘우친다는 뜻으로 맹세의 글을 지어서 종묘(宗廟)에 고(告)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어리(於里)를 김한로의 집에 숨겨 두고 다시 전(殿)에 들이었다가, 일이 또 발각되니, 임금이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위하여 통절(痛切)히 이를 꾸짖어 거의 스스로 새 사람이 되도록 하였고, 또 김한로를 외방에 유배하였다. 세자가 도리어 원망하고 분개하는 마음을 품고 드디어 상서(上書)하였는데, 사연이 심히 패만(悖慢)하고, 또 큰 글씨로 특별히 써서 2장이나 부진(敷陳)352) 하여 심히 무례(無禮)하였다. 이에 조말생에게 명하여 세자의 글을 가지고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좌의정 박은(朴訔) 등에게 보이고 말하였다.
"세자가 여러 날 동안 불효(不孝)하였으나, 그러나 집안의 부끄러움을 바깥에 드러 낼 수가 없어서, 나는 항상 그 잘못을 덮어두고자 하였다. 다만 직접 그 잘못을 말하여 뉘우치고 깨닫기를 바랐는데, 이제 도리어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싫어함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어찌 감히 숨기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16책 35권 61장 A면【국편영인본】 2책 228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역사-고사(故事) / 사법(司法)
- [註 347]수서(手書) : 손수 쓴글.
- [註 348]
포의지교(布衣之交) : 벼슬하지 않을 때 사귐.- [註 349]
내풍류(內風流) : 궁내(宮內)의 노래와 춤을 맡아보던 창기(娼妓).- [註 350]
○己卯/世子遣內官朴枝生, 上書親製手書。 辭曰:
殿下侍女, 盡入宮中, 豈盡重念而納之? 欲出加伊, 憐其居生艱難, 且出外與人相通, 則聲譽不美, 以此不出。 到今出臣數妾, 哭聲及於四隣, 怨望盈於國內, 何不反求諸身乎? 責善則離, 離則不祥莫大焉。 臣無如此, 故絶樂器之絃之行, 無含忍, 將來縱意聲色之計, 唯率意任情, 以至於此。 漢 高祖居山東時, 貪財好色, 乃終定天下; 晋王 廣雖稱其賢, 及其卽位, 身危國亡。 殿下安知臣之終有大孝也? 禁此一妾, 所失多而所得少。 何謂所失多? 不能禁千萬世子孫之妾, 此所失多也, 出一妾, 所得少也。 王者無私, 申孝昌陷太祖於不義, 罪重赦之。 漢老唯以悅臣心爲事, 忘布衣之交, 棄之暴也, 功臣自此危矣。 淑嬪有孕, 一不飮粥, 一朝有故, 則非常。 願自今自新, 無一毫動念。
上覽之, 出示六代言及卞季良曰: "此言皆辱予, 所謂夫子未出於正之辭也。 予若有愧, 何敢示此書於爾等乎? 皆以妄事爲言, 予欲明辨。" 使季良製答書, 啓曰: "此事皆妄也, 何足與答? 但使大臣擧義責之可也。" 上曰: "可。 世子惡我責善。 古有易子而敎, 今後大臣敎之, 予則寬大。 予昔納內風流, (止)〔不〕 爲予身就閑, 爲太祖娛也, 知申事之所知也。 勢將難敎, 處之若何?" 末生等五人皆請斬於里, 以絶其惑。 季良、孝孫言: "蔽固已甚, 勢難卽止, 姑還其女。" 上曰: "如六代言之言, 則其讎嫌可不畏乎? 予將送人責之。" 命取枝生招。 其招曰〔上曰〕 : "世子今後如有啓聞事, 必先送啓聞, 上許然後詣闕直達, 毋令依式事外, 入傳及上書。 如此之意, 傳說尹德仁及殿內內官施行, 不然則大懲鑑後。 如謀叛及時事則不在此限。" 命枝生傳諭世子, 其辭曰:
日者, 予告汝以漢老納女之事, 且曰: "此言若出, 則國家必欲殺之。" 漢老亦曰: "臣罪十死。" 汝何以爲漢老無罪乎? 申孝昌承命隨太祖, 故有司雖請, 予心以爲未便而不允, 汝何以爲孝昌罪重乎? 淑嬪有子, 故不以罪人之女爲嫌而還殿, 雖死予何惜乎? (予)〔汝〕 何以不飮粥有故非常, 恐動我乎? 師傅、賓客請絶漢老, 不以爲親, 故絶而付處羅州, 如有再請, 其死必矣。
枝生卽歸京都。 世子爲人狂惑淫戲, 好馳馬, 不喜儒生, 不事學問, 每於書筵, 稱疾不出, 書筵官請之再三, 然後或出。 論師在前, 援引前言往行, 反覆諭之, 不專心聽之。 其所好者, 非射御有力之士, 則必便嬖伶人之徒。 嘗於上講武出幸平康之日, 託故不出, 以廢都門拜送之禮, 卽其日率其群小, 潛往衿川、富平等處, 馳騁放鷹, 游舟爲樂, 三日而還。 又上之宴朝廷使臣之日, 命世子侍宴, 方溺於倡妓, 辭疾不從。 咸吉道節制使進俊鷹聞之, 使人要於路, 誘而取之, 代他鷹進之。 又於四月八日夜, 踰宮墻, 與憸小之徒, 挾彈彈燈爲戲。 嘗陰結嬖人具宗秀、伶人李五方等, 使踰墻入宮, 博奕飮酒達夕, 或於月夜, 與群小踰墻而出遊, 街上(踰)〔彈〕 琵琶爲戲。 又與五方等往宗秀家, 酣飮達曙者再矣。 及其事覺, 宗秀、五方等皆伏誅。 禔以悔過之意, 作誓告于宗廟, 旣而匿於里於漢老第, 復納于殿, 事又覺。 上以宗社大計, 痛切責之, 庶幾自新。 且流漢老于外, 世子反懷怨憤, 遂上書, 辭甚悖慢。 且大書特書, 敷陳二張, 甚爲無禮。 乃命趙末生, 齎世子書, 示于領議政柳廷顯、左議政朴訔等曰: "世子多日不孝, 然家醜不可外揚, 予常欲掩其過, 而但面說其非, 冀悔悟, 今反有怨懟之心。 爲惡至於如此, 予何敢隱?"
- 【태백산사고본】 16책 35권 61장 A면【국편영인본】 2책 228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역사-고사(故事) / 사법(司法)
- [註 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