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육조·대간에서 신효창·박만 등의 죄를 청하다
의정부·육조(六曹)·대간(臺諫)에서 예궐(詣闕)하여 신효창(申孝昌)·박만(朴蔓)·정용수(鄭龍壽)·임순례(任純禮) 등의 죄를 청하였느나, 임금이 윤허(允許)하지 아니하고 전교(傳敎)하기를,
"난신 적자(亂臣賊子)는 사람이 이를 죽일 수가 있다. 임오년(壬午年)의 일은 지금까지 17년인데, 그 사이에 정부·육조의 신하들이 모두 대간(臺諫)을 지냈으면서 신효창 등의 죄를 알지 못하여서 거론하지 않았는가? 술에 취하여서 거론하지 않았는가?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나에게 권(勸)하여 이를 죽이려 하니, 모두 간사한 무리이다. 이것은 연(燕)나라로써 연(燕)나라를 치는 것이다. 대간(臺諫)이 모두 신진(新進)의 사람이라면 오히려 말할 만하다. 정부·육조에서 어찌 이처럼 억지로 시끄럽게 구는가?"
하니, 조말생(趙末生) 등이 대답하기를,
"제경(諸卿)과 대간(臺諫)에서 법을 들어 죄를 청하는데, 어찌 감히 간악(奸惡)한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소환(小宦) 엄영수(嚴永壽)로 하여금 전교(傳敎)하기를,
"태조(太祖)가 입북(入北)한 뒤에도 신효창·정용수 등이 피혐(避嫌)하지 않고 시위(侍衛)하지 않은 것도 또 죄가 있는가?"
하니, 조말생 등이,
"과연 성상의 명(命)이 있었고 모의에 참여한 정상이 없었다면 죄의 경중(輕重)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하고, 이명덕(李明德)은 홀로,
"이미 도망하여 오지 않았는데, 무슨 경중(輕重)의 구별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신효창과 전 부윤(府尹) 안우세(安遇世)와 환자(宦者) 김수징(金壽澄)·조주(趙珠) 등을 한경(漢京)에 부르니, 며칠 만에 신효창 등이 이르렀다. 하교(下敎)하기를,
"정용수·신효창 등의 죄는 그 당시에 그 경중(輕重)을 의논하여 논죄하였는데, 이제 정부·육조(六曹)·삼성(三省)283) 에서 날마다 소장(疏章)을 올려 죄를 청하여 마지 않으므로 내가 그 실상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하옥(下獄)할 수가 없다. 마땅히 그때 태조(太祖)를 시위(侍衛)하였던 내관(內官) 김수징·김용기(金龍奇)·최한(崔閑)·김중보(金重寶)·조주(趙珠)와 안우세(安遇世) 등에게 물어야 한다. 또 사약(司鑰) 박영필(朴英弼)이 비록 소인(小人)이라 하더라도 심히 정직하므로 나를 속이지 아니할 것이니, 또한 마땅히 나아오게 하여 그 실정을 물어서 아뢰어라. 만약 혹시라도 모의에 참여하였다면 내가 마땅히 용서하지 아니하겠다."
하니, 조말생 등이 교지(敎旨)를 받들고 안우세를 문초하니, 안우세가 말하였다.
"처음에 신이 변현(邊顯)·조홍(趙洪) 등 16인과 별시위(別侍衛)로서 명(命)을 받고 시종(侍從)하였는데, 11월 초4일에 금화(金化) 도창역(桃昌驛)에 이르니, 정용수와 신효창이 비밀히 나를 불러서 말하기를, ‘함승복(咸承復)·배상충(裵尙忠)이 북쪽 땅으로 들어가 군마(軍馬)를 뽑으니, 반드시 변란(變亂)이 일어날 것이다. 이같이 좋지 않은 기별(奇別)을 즉시 주상(主上)에게 아뢰겠느냐? 그 사건이 발발하기를 기다려서 이에 아뢰겠느냐?’ 하였으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초야(初夜)에 이 사건을 듣고 어찌하여 5경(五更)을 기다려서 이에 말하는가?’ 하고, 즉시 도망하여 말을 달렸습니다. 초5일 초경(初更)에 예궐(詣闕)하여 바로 아뢰니, 성상이 친히 물으시고 눈물을 흘리고, 곧 김옥겸(金玉謙)을 보내어 먼저 동북면(東北面)에 들어가 도순문사(都巡問使)와 각 고을의 수령(守令)을 타일러서 군사를 뽑지 말게 하고, 순문사(巡問使)는 인신(印信)을 봉(封)하여 즉시 바쳐 오게 하였습니다. 또 신에게 명하기를, ‘너는 몰래 가서 사변(事變)을 탐지(探知)하라.’고 하였으므로, 신이 이를 받들고 11월초 8일에 밤을 틈타서 복장을 바꾸어 입고 남산역(南山驛)막차(幕次)284) 에 이르러 두 재상(宰相)의 막사(幕舍)를 찾았으나, 마침내 발견하지 못하고, 또 변현을 찾아서 서로 만나고, 또 조홍을 만나 성상의 교지(敎旨)를 자세히 알리고, 이어서 두 재상에게 전교(傳敎)하도록 약속하고, 말을 끝내자 몰래 도망하여 나왔습니다."
김수징(金壽澄)에게 물으니, 김수징이 말하였다.
"안우세가 도망하여 돌아간 뒤에 조사의(趙思義)의 당(黨)이 신효창과 정용수를 태조(太祖)에게 참소(譖訴)하여 말하기를, ‘다른 마음이 있으니, 청컨대 이를 죽이소서.’하였으나 태조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혹은 시선(侍膳)285) 할 때에라도 그 밖의 다른 언동(言動)은 모두 듣거나 볼 수가 없었습니다."
대언(代言) 등이 같이 듣고 각인(各人)의 공초(供招)한 것을 글로 써서 최한(崔閑)에게 주어서 아뢰었다. 명하여 각인을 석방하여 되돌려 보내니, 신효창이 모자를 벗고 고두(叩頭)하여 말하기를,
"만약 성명(聖明)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이를 변별(辨別)하겠습니까? 한경(漢京)에 있을 적에 수직(守直)286) 을 당한 지 여러 날이었는데, 지금 이곳에 이르러서도 또한 수직(守直)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니, 헌사(憲司)에 전교(傳敎)하기를,
"수직(守直)시키지 말라. 이와 같은 공사(公事)를 나는 시행하지 않겠디. 다시 무슨 일을 가지고 우순 풍조(雨順風調)287) 를 바라겠느냐?"
하고, 최한을 시켜 전지(傳旨)하였다.
"지금 신효창 등의 죄를 청하는 자들은 모두 그 실정을 알지 못한다. 그때 정승 조영무(趙英茂)·이무(李茂)·하윤(河崙) 등의 대신이 지극히 상량(商量)하여 시행하였으나, 신효창 등이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이었으니, 어찌 그들의 뜻이 없었겠느냐? 옛부터 어진 임금이 있고 어리석은 임금이 있었으나, 그러나 그 신하들은 그 임금의 말을 듣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말하는데 신하가 이에 듣는 것이 가(可)하다. 여러 신하들이 다시 이 일을 청하더라도 나는 따르지 않겠다. 내가 따르지도 않는데 여러 신하들이 극간(極諫)하다가 마침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필(史筆)이 반드시 아름답지 못할 것이다. 대언(代言) 등은 소사(所司)에 나의 뜻을 유시(諭示)하도록 하라."
- 【태백산사고본】 16책 35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2책 219면
- 【분류】사법-탄핵(彈劾) / 변란(變亂) / 정론(政論)
- [註 283]삼성(三省) : 대간(臺諫)과 형조(刑曹).
- [註 284]
막차(幕次) : 막(幕)을 쳐서 임시로 만들어 주련(駐輦)하던 곳.- [註 285]
시선(侍膳) : 수라를 모시던 일.- [註 286]
수직(守直) : 죄를 지은 사람이 도망하지 못하도록 헌사(憲司)에서 서리를 보내어 그 집을 지키게 하던 일.- [註 287]
우순 풍조(雨順風調) : 기후가 순조로와 곡식이 잘됨. 곧 천하가 태펑스러운 것.○丁未/議政府、六曹、臺諫詣闕請孝昌、朴蔓、龍壽、純禮等罪, 上不允。 傳敎曰: "亂臣賊子, 人得而誅之。 壬午之事, 于今十七年矣。 其間政府、六曹之臣, 皆經臺諫, 孝昌等罪, 不知而不擧乎? 醉而不擧乎? 以至今日, 勸予殺之, 皆奸詐之徒, 是以燕伐燕也。 臺諫皆新進之人, 猶可說也。 政府、六曹何若是强聒也?" 趙末生等對曰: "諸卿臺諫擧法請罪, 何敢有奸惡之心乎?" 上使小宦嚴永壽傳敎曰: "太祖入北之後, 孝昌、龍壽等不避嫌侍衛, 亦且有罪乎?" 末生等曰: "果有上命, 而無與謀之狀, 則似有輕重。" 李明德獨曰: "旣不逃來, 何有輕重之別?" 乃召孝昌及前府尹安遇世、宦者金壽澄ㆍ趙珠等于漢京。 數日, 孝昌等至, 敎曰: "龍壽、孝昌等罪, 當其時, 議其輕重而論之。 今政府、六曹、三省日上章疏, 請罪不已, 予未知其實, 不可妄下, 宜問於其時侍衛太祖內官金壽澄、金龍奇、崔閑、金重寶、趙珠及安遇世等也。 且司鑰朴英弼雖小人而甚直, 必不欺予, 亦當進之而問其情實以聞, 如或與謀, 予當不宥。" 趙末生等奉旨問遇世, 遇世曰: "初臣與邊顯、趙洪等十六人, 以別侍衛受命侍從, 十一月初四日至金化 桃昌驛, 龍壽、孝昌密招予曰: ‘咸承復、裵尙忠入北抄軍馬, 生變必矣。 如此不好奇別, 卽聞于主上乎? 待其事發乃聞乎?’ 臣答曰: ‘初夜聞此事, 何其待五更乃言乎?’ 卽逃出馳馬, 初五日初更, 詣闕直啓, 上親問下淚, 卽遣金玉謙, 先入東北面, 說諭都巡問使及各官守令毋抄軍, 巡問使則封印卽上來。 又命臣曰: ‘汝則潛往, 探知事變。’ 臣奉此, 十一月初八日乘夜變服, 到南山驛幕次, 尋兩相幕, 竟未得見。 又尋邊顯相見, 又見趙洪, 備宣上敎, 仍約傳敎于兩相。 語訖, 潛逃出來, 問壽澄, 壽澄等曰: ‘遇世逃歸後, 趙思義之黨, 譖孝昌、龍壽于太祖, 以爲有異心, 請殺之。’ 太祖不許。 二人或有侍膳之時, 其他言動, 皆未得聞見。"
〔○〕 代言等同聽各人所供, 具書授崔閑以啓, 命放各人還歸。 孝昌去帽叩頭曰: "若非聖明, 何以辨之? 在漢京被守直多日, 今至於此, 亦被守直。" 傳敎憲司曰: "勿令守直。 如此公事, 予不施行, 更將何事, 望雨順風調乎?" 使崔閑傳旨曰: "今之請孝昌等罪者, 皆未知其實耳。 其時政丞趙英茂、李茂、河崙等大臣, 極商量施行, 而孝昌等不與焉, 豈無其意乎? 自古有賢君有暗君, 然其臣皆不得不聽其君之言。 今予言之, 而臣乃聽之可也。 群臣再請此事, 而予不從, 予不從, 而群臣極諫, 竟未得成, 則史筆必不美矣。 代言等諭所司以予意。"
- 【태백산사고본】 16책 35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2책 219면
- 【분류】사법-탄핵(彈劾) / 변란(變亂) / 정론(政論)
- [註 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