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 양홍달·박거 등을 의금부에 가두다
의원(醫偃) 양홍달(楊弘達)·박거(朴居)·조청(曹聽)·원학(元鶴)을 의금부(義禁府)에 가두었다. 처음에 임금이 최한(崔閑)을 시켜 승정원(承政院)에 전(傳)하였다.
"성녕(誠寧)의 졸(卒)함에는 비록 ‘죽고 사는 것이 명(命)이 있다.’고 하나, 발병(發病)하던 초기를 당하여 허리와 등이 몹시 아팠는데, 의원 박거 등이 병세를 진찰하고 말하기를, ‘풍증(風證)입니다.’고 하고 인삼(人蔘) 순기산(順氣散)을 마시게 하여 땀을 지나치게 많이 흘렸다. 또 감응원(感應元)·대금음자(對金飮子)를 바쳤으나 그 창진(瘡疹)이 이미 발생하여 병세가 위태롭기에 이르니, 또 말하기를, ‘이것은 창진의 보통 있는 일입니다.’ 하고 약(藥)을 꺼리고 한 첩(貼)도 바치지 않았으니, 아 아! 슬프다. 생각지도 않다가 하루 저녁에 이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의서(醫書)를 보니, 허리와 등이 몹시 아픈 것은 두창(豆瘡)이 발생하기 전의 초기 증상이었고 또 창진(瘡疹)의 증세가 순조롭지 못한 뒤에도 능히 구원할 수 있는 약(藥)으로써 방서(方書)에 보이는 것이 하나가 아니었다. 의원이 된 자가 진실로 능히 마음을 써서 정밀하게 살피고, 알맞은 데 따라 변통(變通)하여 그 서로 부합되는 약(藥)을 청한다면 어찌 변통할 수 있는 이치가 없겠는가? 대저 약이(藥餌)의 일을 극진히 하여 유감이 없게 하였으나 갑자기 대고(大故)를 면치 못하였다면, 이것은 하늘에서 명(命)을 받은 것이 그러한 것이다. 창진(瘡疹)은 사람들이 함께 경험하는 바이요, 미묘하여 살피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의원 등이 처음에는 풍증(風證)이라 하여 그 상극(相克)되는 약을 바치다가, 나중에는 증세에 순응한다 하여 능히 구할 수 있는 처방을 쓰지 않았다. 거의 열흘을 고생하다가 사망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인사(人事)의 잘못한 것이 아니겠느냐? 이것이 내가 몹시 슬퍼하여 능히 스스로 마음을 너그러이 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전날 이원(李原)이 말하기를, ‘목숨이 길고 짧은 이치는 오직 하늘에 있을 뿐이요, 의원이 능히 구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이원이 평일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죽고 사는 이치는 각각 명(命)을 받은 바가 있으니, 사람의 힘으로 능히 할 수 있는 바가 아닌데, 어찌 성녕(誠寧)이 졸(卒)하였다고 하여 죄를 의원에게 돌리는가.’ 하고 하여, 이원이 마음속에 품은 바를 숨기지 않고 진달(陳達)하였으니, 가히 정직하다고 이를 만하다. 이것은 진실로, 나의 마음에 애통하고 한스러워 하는 데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여 그러한 것이다. 너희들은 항상 내 곁에 있어서 그 성녕(誠寧)이 졸(卒)할 때에 들은 것이 익숙하고 아는 것이 상세할 것이니, 마땅히 널리 타일러서 대소 신민(大小臣民)으로 하여금 의원이 기꺼이 마음을 쓰지 않았던 사실을 다 알게 하라. 지금 이에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아니하여 대신(大臣)에게 이르기까지도 오히려 들어서 알지 못하게 하니, 너희들이 간교(奸巧)하기가 지극하다. 너희들은 다만 간교(奸巧)를 가지고 한 몸의 벼슬을 잇는 자들이다. 성녕(誠寧) 졸(卒)한 지가 이제 이미 60여일인데, 하루라도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일찍이 없었다. 즉시 옥관(獄官)에게 명하여 의원을 가두어 묶고 그 까닭을 국문(鞫問)하여서 후래(後來)를 징계하여도 지나친 것이 아니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이를 말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내가 어찌 속히 하고자 하겠는가?"
조말생(趙末生)이 대답하였다.
"성녕(誠寧)이 졸(卒)하는 날, 충녕 대군(忠寧大君)이 밖으로 나와서 신(臣)에게 말하기를, ‘박거 등이 이르기를, 「창진(瘡疹)의 증세로서는, 이것이 가장 순조로운 것이다.」고 하였다.’ 하였으므로 반드시 나으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증세를 변하게 할 약(藥)을 한 번도 바치지 아니하여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이 이 말을 듣고 즉시 정부·육조(六曹)에 전하여 유시(諭示)하여 이미 또 진위(陳慰)하였는데, 대소 신료(大小臣僚)로서 누가 전하의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전날에 이원이 계사(啓事)할 때에 신과 하연(河演)이 이를 변별(辨別)하고자 하였으나, 자리를 피하여, 부복(俯伏)하였으므로 계달(啓達)하지 못하고 나갔으니, 신 등이 진실로 죄가 있습니다."
임금이 충녕 대군(忠寧大君)으로 하여금 전교(傳敎)하게 하였다.
"내가 너희들이 잘못 되었다고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대신(大臣)들로 하여금 나의 뜻을 알지 못하게 하여, 마침내 ‘죽을 사람은 의원이 구원할 바가 못된다.’는 말을 발(發)하게 한 때문이다. 내가 의자(醫者)에게 어찌 그 직임에 봉사하기를 다하였으나, 죽음에 이르렀다고 하여 죄를 주겠는가? 양홍달은 경안 궁주(慶安宮主)가 병(病)이 났을 때에 열(熱)이 나는 증세였는데도 정기산(正氣散)을 바쳐서 병을 위독하게 만들어 그가 졸(卒)하였는데, 말하기를, ‘신이 의료를 업(業)으로 한 이래 이와 같은 병은 보지 못하였습니다.’고 하여 폐인(廢人)이 된 자식이 졸(卒)하기에 이른 것에 비유하였다. 내가 친히 방서(方書)를 보니, 열이 나는 증세인데도 보약(補藥)을 먹이면 괴로와하는 데 이른다고 분명하게 갖추 실려 있었으나, 나는 도리어 천명(天命)이니 어찌 하겠는가고 생각하였다. 또 소경(昭頃)229) 이 처음에 병이 났을 때에 허리와 등이 몹시 아팠는데, 양홍달 등은 ‘풍진(風疹)’이라고 하여 정기산(正氣散)을 먹여서 땀을 흘리게 하였다. 두통(頭痛)인데도 땀을 흘리게 하면 사는 경우는 하나이고 죽는 경우는 열이라는 말이 여러 창진(瘡疹)의 방서(方書)에 실려 있다. 그 처음으로 증세가 나타나기에 이른 뒤에 불휘(不諱)230) 함이 있을까 염려 하여 증세를 변(變)하게 할 약(藥)을 많이 바쳤는데, 박거는 생각하기를, ‘황랍색(黃蠟色)231) 은 순조로운 증세이니 약(藥)으로 치료하는 것은 심히 불가(不可)하다.’고 하고, 마침내 증세를 변하게 할 약(藥)을 먹이지 아니하였다. 그 처음에는 창진(瘡疹)을 가지고 풍증(風證)이라 하였고, 그 증세가 나타나자 회랍색(灰蠟色)을 가지고 황랍색(黃蠟色)이라 하여 불우(不虞)의 변(變)에 이르게 하였다. 지금까지 60여 일 동안 눈물이 눈에 그칠 적이 없었다. 나는 그들을 가쇄(枷鎖)232) 하여 하옥(下獄)해서 소경(昭頃)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조말생이 아뢰기를,
"이원의 아뢴 바는 뜻이 의원(醫員)을 죄 주려는 데 있었기 때문에, 말이 강회중(姜淮仲)의 처의 죽음에 미쳤습니다. 가쇄(枷鎖)하여 하옥(下獄)하고, 율(律)에 의하여 죄를 처단하여서 대소 신료(大小臣僚)의 소망에 답(答)하는 것이 신 등의 소원(所願)입니다. 비록 외사(外事)233) 라도 그 직책에 삼가지 못하였다면 죄를 과(科)하는 것이 나라의 상헌(常憲)인데, 하물며 내사(內事)234) 에 삼가지 아니하여 변(變)에 이르게 하였으니, 비록 우부 동치(愚婦童稚)235) 라도 오히려 모두 알것입니다."
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반드시 말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우선 기다리겠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부·육조(六曹)·대간(臺諫)에서 그 죄를 바로잡도록 청하고, 또 이원이 양홍달 등 4인이 약이(藥餌)를 잘못 바쳐서 대군(大君)을 졸(卒)하게 만든 죄를 갖추 청하니, 임금이, 의원(醫員)들이 약(藥)을 쓰는 데 마음을 다하지 아니한 사실을 일일이 들었다.
"을미년에 경안 궁주(慶安宮主)의 병의 증세가 열(熱)이 나고 괴로움이 심하여 눈을 바로 뜨고 손이 뒤틀리니, 양홍달이 말하기를, ‘이와 같은 병의 증세는 의가(醫家)에서 아직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고 하고, 양위탕(養胃湯)·평위산(平胃散)을 바쳤다. 내 마음에 보통 증세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남에게 알려질까 부끄러워 하였으나, 졸(卒)한 뒤에 내가 방서(方書)를 보니, 눈을 바로 뜨고 손이 뒤틀리는 것은 바로 발열(發熱)하는 증세에 있었다. 성녕군(誠寧君)의 창진(瘡疹)이 발(發)하던 처음에 허리와 등이 아팠는데, 조청·원학 등이 풍증(風證)이라고 아뢰어서 인삼(人蔘) 순기산(順氣散)을 바쳐 땀을 흘리게 하였다. 뒤에 의서(醫書)의 두진문(豆疹門)을 보니, 또한 허리와 등의 아픈 것이 실려 있었다. 또 병이 위독하던 날에 이미 증세가 변하게 되어 안색이 회백색(灰白色)이 되었는데, 박거가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순조로운 증세입니다. 안색이 황랍색(黃蠟色)이 되면 최상의 증세입니다.’고 하였다. 이 사람들이 비록 고의로 해치려는 생각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실로 이것은 마음을 쓰지 않아서 그러한 것이다."
헌부(憲府)에 명하여 그 죄를 일일이 국문(鞫問)하여서 아뢰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35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2책 214면
- 【분류】사법-재판(裁判)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의약-의학(醫學) / 의약-약학(藥學) / 왕실-종친(宗親)
- [註 229]소경(昭頃) : 성녕 대군(誠寧大君)의 시호(諡號).
- [註 230]
불휘(不諱) : 죽음.- [註 231]
황랍색(黃蠟色) : 밀랍색깔.- [註 232]
가쇄(枷鎖) : 죄인이 목에 거는 형틀과 자물쇠.- [註 233]
○甲申/囚醫員楊弘達、朴居、曹聽、元鶴于義禁府。 初, 上使崔閑, 傳于承政院曰: "誠寧之卒, 雖曰死生有命, 然當發病之初, 腰背疼痛, 醫員朴居等(胗候)〔診候〕 曰: ‘風證飮之以人蔘順氣散。’ 出汗過多, 又進感應元對金飮子, 及其瘡疹已發, 病勢殆矣則又曰: ‘此乃疹疾之常事。’ 諱藥而不進一貼。 嗚呼痛哉! 不意一夕至於此也。 今見醫書, 腰背疼痛者, (豆疹)〔痘疹〕 未發之初證也。 且瘡疹逆證之後, 能救之藥, 見於方者非一。 爲醫者苟能用心精察, 變通從宜, 請其相合之藥, 則豈無可變之理也?
大抵藥餌之事, 極盡無憾, 而卒不免於大故, 是則稟於天者然也。 瘡疹人之所共經驗, 非微妙難察者也。 醫員等始則以爲風證, 進其相克之藥; 終則以爲順證, 而不用能救之方, 呼苦一旬至於亡, 是豈非人事之所失歟? 此予所以痛悼而不能自寬也。 前日李原言曰: ‘修短之理, 只在於天, 非醫員之所能救也。’ 是則原平日自以謂: ‘死生之理, 各有所稟, 非人力之所能, 何以誠寧之卒, 歸罪於醫員乎?’ 原以中心所抱, 不諱陳之, 可謂直矣。 是眞不知予心之痛恨有由然也。 汝等常在予側, 其於誠寧之卒, 聞之熟矣, 知之悉矣。 宜當布諭, 使大小臣民, 咸知醫員之不肯用心, 今乃含默不言, 至使大臣尙不聞知, 汝等之奸極矣。 汝等徒以奸巧襲身者也。 誠寧之卒, 今已六旬, 未嘗一日不下淚也。 卽命獄官囚繫醫員, 鞫問其故, 以徵後來, 未爲過也。 雖然必有言之者, 予何欲速乎?"
趙末生對曰: "誠寧卒日, 忠寧大君出外語臣曰: ‘朴居等云: 「瘡疹之證, 此爲最順, 意必愈也。 變證之藥, 不進一度, 以至於此。」’ 臣聞是語, 卽傳諭於政府、六曹, 旣且陳慰, 大小臣僚誰不知殿下之意乎? 前日李原啓事之時, 臣與河演欲辨之, 避席俯伏, 未啓而出, 臣等誠有罪焉。" 上使忠寧大君傳敎曰:
予以汝等爲曲者, 無他, 使大臣不知予志, 遂發死者非醫所救之言。 予於醫者, 豈以盡稱其職, 而致死爲罪乎? 弘達當慶安之病, 熱證而進正氣散, 以至病極。 其卒以爲: "臣業醫以來, 未見如此之疾。" 比於非人之子, 及其卒也, 予親見方書, 熱症而飮補藥, 則至於煩憫, 明明具載。 然予反以爲: "命也如之何?" 又當昭頃之始病也, 腰背疼痛, 弘達等謂風疹也, 飮以正氣散而出汗。 以頭痛而出汗, 則一生十死之言, 載諸瘡疹之方, 及其始發之後, 慮有不諱, 多進變證之藥。 朴居以謂: "黃蠟色是順證也, 而治藥甚不可也。" 卒不飮變證之藥。 其初也, 以瘡疹而爲風證; 其發也, 以灰蠟而爲黃蠟, 以致不虞之變, 于今六十餘日, 淚不輟眼。 予欲其枷械下獄, 以報昭頃之讎如何?
末生啓曰: "李原之所啓, 意在罪醫, 故言及淮仲之妻之死。 枷械下獄, 依律處罪, 以答大小臣僚之望, 臣等所願也。 雖外事, 不謹其職, 則科之以罪者, 邦之常憲也。 況內事不謹, 以至於變, 雖愚婦童稚, 尙皆知之。" 敎曰: "必有言者, 姑待之。" 至是, 政府、六曹、臺諫請正其罪, 又李原具請弘達等四人誤進藥餌, 以致大君之卒之罪。 上枚擧醫員不用心治藥曰: "歲在乙未, 慶安宮主病證, 發熱苦極, 直視手反, 弘達曰: ‘如此病證, 醫家所未知也。’ 進養胃湯、平胃散, 予心以謂非常, 而愧聞于人。 卒後, 予見方書, 直視手反, 正在發熱之證。 誠寧君發疹之初腰脊痛, 曺聽、元鶴等啓以風證, 進人蔘順氣散發汗。 後見醫方豆疹門, 亦載腰脊之痛, 又於病極之日, 已爲變證, 色至灰白; 朴居曰: ‘此乃順證。 色爲黃蠟, 上品之證。’ 此人等雖無故害之情, 實是不用心之致然。" 命憲府究問其罪以聞。
- 【태백산사고본】 16책 35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2책 214면
- 【분류】사법-재판(裁判)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의약-의학(醫學) / 의약-약학(藥學) / 왕실-종친(宗親)
- [註 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