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단유와 박송비 자손의 노비 송사를 담당했던 형조·대간의 관원을 모두 의금부에 하옥하다
갑오년542) 의 형조(刑曹)·대간(臺諫)의 관원과 지금의 형조·대간의 관원들을 의금부에 하옥시켰다. 육조 판서(六曹判書)·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를 불러 말하였다.
"내가 어려서부터 결사(決事)하는 관직을 거치지 못하였던 까닭에 장획(臧獲)543) 의 시비(是非)를 알지 못하면서 나라를 다스린 지 이미 17년이 되었으나, 유사(有司)에서 장획의 일을 가지고 아뢰면, 내가 생각하기에는 ‘각기 맡은 자가 있어서 반드시 이치에 합당할 것이다.’하여, 다만 ‘그래, 그래.’하고 응낙할 뿐이었다. 그런데, 전일에 박은(朴訔)이 나에게 원통함을 호소하여, 내 실로 그것을 달게 여기지 않았으나 천천히 그것을 살핀 연후에 효연(曉然)히 그 시비를 알게 되었다. 황단유(黃丹儒)의 자손은 바로 박은·박자청(朴子靑)·조원(曹瑗)이고, 박송비(朴松庇)의 자손은 바로 정탁(鄭擢)·이숙번(李叔蕃)·이내(李來)이다. 목진공(睦進恭)·원숙(元肅) 등이 갑오년에 변정 도감(辨正都監)의 원리(員吏)가 되어, 이 소송을 결절할 때, 황단유가 옳고 박송비가 그르다고 하니, 정탁의 무리가 양언(揚言)하여 ‘이 노비는 속공(屬公)함이 마땅하다.’하고, 근신(近臣)도 또한 ‘가하다.’하기에, 나도 그렇게 여겨 속공(屬公)하게 하였더니, 박은이 호소하기를, ‘속공시킨 것은 잘못입니다.’하므로, 삼성(三省)544) 에 명하여 이를 변정하게 하였더니, 삼성이 미연(靡然)545) 하게 이숙번(李叔蕃)의 말을 따라 ‘신축년 이전의 일이라 속공시켰다.’고 하였다. 박은이 이제 또 상서(上書)하여 전날의 삼성의 잘못을 아뢰었으므로, 곧 삼성에 명하여 변정하게 하니, 또한 전등(前等)의 결절을 따랐는데, 오늘날 군신(君臣)이 함께 다스려가는 때에 있어, 이같이 붕비(朋比)546) 와 기망(欺罔)하는 풍습이 있으니 이것이 옳겠는가? 그것을 모조리 국문(鞫問)하게 하고, 장획(臧獲)의 시비(是非)같은 것은 병문(幷問)하지 말게 하라. 내 뜻은 이미 결정되었다."
임금의 이른바 근신(近臣)도 또한 ‘가하다.’한 것은, 정탁이 이미 소송에 이기지 못하자, 단자(單子)로 신정(申呈)하기를, ‘원컨대, 이 노비를 속공(屬公)시키소서.’한 것인데, 임금이 그 단자를 승정원(承政院)에 내려, 속공시키는 것의 타당한 여부를 물으니, 유사눌이 이숙번의 청(請)을 들어 아뢰기를, ‘가합니다.’고 한 까닭에서이다. 이에 의금부에 하지(下旨)하였다.
"지금의 형조·대간이 황단유와 박송비의 자손들이 서로 소송한 노비를 분간(分揀)한 계본(啓本)과 박은의 상서(上書)를 빙거하여, 지난 갑오년에 이 노비를 분간하였던 형조·대간의 관원이 모롱(冒弄)547) 하여 계문(啓聞)한 사의(事意)를 자세히 추고(推考)하여 아뢰라. 지금의 형조·대간의 관원들이 또 말하기를, ‘을미년 2월에 육조(六曹)에 분하(分下)한 소지(所志) 안에는, 「양쪽이 부당하여 속공시킨 노비는 다시 거론(擧論)하는 일이 없게 하라」는 교지(敎旨)가 있었습니다.’고 한다. 그러나 황단유의 자손은 갑오년 12월 기한 내에 격고(擊鼓)하여 신정하였는데도 그 소장[所志]을 아직 육조에 계하(啓下)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을 이미 육조에 분하(分下)한 소지(所志)로써 아울러 논함은 불가한 것이다. 그 〈육조에〉 분하(分下)하지 못한 사연(辭緣)을 즉시 취지(取旨)하지 아니하고, 문득 도로 속공시킨 것과, 또 갑오년에 형조·대간의 관원들이 기망한 죄와, 함부로 허론(許論)을 가지고 계문(啓聞)한 사의(事意)도 아울러 추고(推考)하여 아뢰도록 하라."
이어서 갑오년의 형조 참의(刑曹參議) 윤임(尹臨), 좌랑(佐郞) 송명산(宋命山)·박융(朴融)과 지금의 참의(參議) 오식(吳湜), 정랑(正郞) 송기(宋箕)·허항(許恒), 좌랑(佐郞) 양수(楊脩)·김연지(金連枝), 사헌 집의(司憲執義) 이감(李敢), 지평(持平) 홍도(洪陶)·진중성(陳仲誠), 사간(司諫) 최순(崔洵), 정언(正言) 안지(安止)·정지담(鄭之澹) 등을 의금부에 하옥시키고, 병조 판서 윤향(尹向)과 조말생(趙末生)에게 명하여, 의금부에 가서 그들은 국문(鞫問)하게 하였더니, 조말생이 아뢰기를,
"신(臣)의 동모형(同母兄) 여흥 부사(驪興府使) 조유중(趙惟中)이 박송비의 자손들과 같은 소장[同狀]에 있는 까닭에, 상피(相避)548) 함이 있어 이 옥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번에 묻는 일은 본래 노비의 결절과는 관계가 없고, 전후(前後)로 삼성(三省)에서 기망한 죄만을 묻는 것이다. 또 비록 상피함이 있다 하더라도 그대는 내 명(命)을 받들었으니 어찌 사사를 용납할 수 있겠는가? 가서 듣도록 하라."
하고, 또 의금부에 명하여, 지수천군사(知隨川郡事) 김희(金熙), 나주 교수관(羅州敎授官) 이초(李椒), 지진산군사(知珍山郡事) 유선(柳善), 전 헌납(獻納) 정곤(鄭坤)을 잡아 오게 하니, 김희와 이초는 갑오년의 형조 정랑이었고, 유선은 장령이었으며, 정곤은 헌납이었기 때문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33권 61장 B면【국편영인본】 2책 173면
- 【분류】사법-행형(行刑) / 사법-재판(裁判) / 신분-천인(賤人) / 인사-관리(管理)
- [註 542]갑오년 : 1414 태종 14년.
- [註 543]
장획(臧獲) : 노비.- [註 544]
삼성(三省) : 형조(刑曹)와 양사(兩司).- [註 545]
미연(靡然) : 초목이 바람에 나부끼듯 쏠리는 모양.- [註 546]
붕비(朋比) : 붕당을 지어 자기 편을 두둔함.- [註 547]
모롱(冒弄) : 함부로 희롱함.- [註 548]
상피(相避) : 친족(親族) 또는 기타의 관계로 같은 곳에서 벼슬하는 일이나, 청송(聽訟)·시관(試官) 같은 것을 피함.○癸巳/下甲午年刑曹、臺諫員及今刑曹、臺諫員等于義禁府。 召六曹判書、義禁府提調曰: "予自幼不經決事之官, 故不知臧獲之是非, 而享國已十有七年矣。 有司以臧獲之事啓之, 則予以謂, 各有任之者, 必當於理, 徒唯唯耳。 前日, 訔訴冤於予, 予實不肯焉。 徐察之然後, 曉然知其是非也。 黃丹儒子孫, 乃朴訔、朴子靑、曺瑗也; 朴松庇子孫, 乃鄭擢、李叔蕃、李來也。 睦進恭、元肅等爲甲午辨正都監員吏, 決此訟, 是丹儒而非松庇。 擢輩揚言此奴婢當屬公, 近臣亦曰可, 予以爲然屬公。 訔訴曰: ‘屬公非也。’ 命三省辨正之, 三省靡然從叔蕃之言, 稱爲辛丑年前事屬公。 訔今又上書, 陳昔日三省之非, 乃命三省辨之, 亦從前等之決。 以今日君臣共治之時, 有如此朋比欺罔之風, 其可乎? 其悉鞫問之。 若臧獲之是非, 則勿幷問之, 予意已決矣。" 上, 之所謂近臣亦曰可者, 擢旣不勝, 乃申呈單子曰: "願以此奴婢屬公。" 上, 下其書承政院, 問屬公當否, 柳思訥聽叔蕃之請, 啓曰可, 故也。 乃下旨義禁府曰: "今刑曹、臺諫黃丹儒、朴松庇子孫等, 相訟奴婢分揀啓本, 與朴訔上書憑考, 去甲午年, 此奴婢分揀刑曹、臺諫官員, 冒弄啓聞事意, 備細推考以聞。 今刑曹、臺諫員等又言: ‘乙未年二月分下六曹所志內, 以兩邊不當屬公奴婢, 更不擧論事, 已有敎旨。’ 然黃丹儒子孫, 甲午年十二月限內, 擊鼓申呈, 其所志未啓下六曹, 是不可以已分下六曹所志竝論也。 其未分下辭緣, 不卽取旨, 輒還屬公。 且甲午年刑曹、臺諫官員等欺罔之罪, 擅自虛論啓聞事意, 幷推以聞。" 乃下甲午年刑曹參議尹臨、佐郞宋命山ㆍ朴融, 今參議吳湜、正郞宋箕ㆍ許恒、佐郞楊脩ㆍ金連枝、司憲執義李敢、持平洪陶ㆍ陳仲誠、司諫崔洵、正言安止ㆍ鄭之澹等于義禁府, 命兵曹判書尹向及趙末生, 至義禁府鞫問之。 末生啓曰: "臣之同母兄驪興府使惟中, 同狀於松庇子孫等, 故有相避, 不可聽此獄。" 上曰: "今此問事, 固不干於奴婢之決, 乃問前後三省欺罔之罪也。 且雖有相避, 汝承予命, 豈可容私? 其往聽之。" 又命義禁府, 拿知隨川郡事金熙、羅州敎授官李椒、知珍山郡事柳善、前獻納鄭坤以來。 熙、椒, 甲午年刑曹正郞; 善, 掌令; 坤, 獻納也。
- 【태백산사고본】 15책 33권 61장 B면【국편영인본】 2책 173면
- 【분류】사법-행형(行刑) / 사법-재판(裁判) / 신분-천인(賤人) / 인사-관리(管理)
- [註 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