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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33권, 태종 17년 6월 1일 을유 3번째기사 1417년 명 영락(永樂) 15년

장례 제도를 의논하면서 서운관 구장의 참서를 불태울 것을 명하다

장제(葬制)를 의논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옛날에는 천자(天子)는 7개월, 제후(諸侯)는 5개월, 대부(大夫)는 3개월, 사(士)는 유월(踰月)505) 이어야 장사지냈는데, 이제는 간혹 유년(踰年)506) 이 되어도 장사 지내지 않는 자가 있으니, 심히 고제(古制)에 어긋난다. 또 가장(假葬)507) 한다고 일컬으며, 들판[原野]에 두고서는 ‘아무 해[某年] 아무 달[某月] 아무 날[某日]은 어느 아들[某子]·어느 손자[某孫]의 생일(生日)을 범하므로 누구누구[某某]에게 표적이 된다.’고 하면서, 그 자손의 이해(利害)를 불러가며 헤아리니, 그 자손이 많은 사람은 혹 2년에서 3년에 이르도록 장사지내지 않는 자도 또한 많게 된다. 만약 사(士)는 유월(踰月), 대부(大夫)는 3개월에 장사지낸다면 상사(喪事)가 미비할 것이니 이것 또한 염려가 된다. 그러나 전조(前朝)508) 의 말기에 3일장(三日葬)을 행한 자도 있었으니, 어찌 그 자손의 이해를 가림[擇]이 있었다 하겠는가?"

예조 판서 변계량(卞季良)이,

"3일장(三日葬)은 고제(古制)가 아니니, 청컨대, 5월·3월·유월(踰月)의 제도를 따르게 하소서."

하고, 이조 판서 박신(朴信)이,

"음양가(陰陽家)에서 제가(諸家)의 장서(葬書)를 모았기 때문에 이론(異論)이 봉기(蜂起)하여 사람들을 속이고 유혹(誘惑)하였으니, 장서(葬書)를 모두 모아서 서운관(書雲觀)으로 하여금 그 대요(大要)를 추리게 하고, 기타의 괴이한 서적은 모조리 없애고 쓰지 말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미혹을 막으소서."

하였다. 임금이,

"법제(法制)의 창립은 모름지기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개정하지 않게 하여야 하는데, 갑자기 법제를 세우게 되면 이것이 무너짐도 반드시 빠를 것이다. 경 등은 예전의 장사지내던 법에 의하여 제도를 정함으로써 영구히 전할 것을 도모하라."

하니, 조말생(趙末生)이 예조(禮曹)의 장계(狀啓)에 의거하여 아뢰었다.

"대부의 장례는 3개월, 사(士)의 장례는 유월(踰月)의 제도로써 하소서."

임금이,

"이것은 진실로 미법(美法)이다."

하고,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의의(擬議)하여 정하게 하니, 좌의정 박은(朴訔)이,

"장례에 관한 서적으로 괴이한 것은 불태워 버림으로써 사람들의 미혹됨을 막으소서."

하였다. 변계량이 말하기를,

"서운관에 있는 괴서(怪書)는 모조리 불살라 버릴 수 있으나, 사사로이 간직한 괴서 같은 것을 어찌 다 불살라 버릴 수 있겠습니까? 법을 세우게 되면 사람들이 스스로 복종할 것입니다."

하니, 박은이,

"사람의 사삿 연고란 다단(多端)합니다. 서운관과 함께 통행(通行)할 장일(葬日)을 의논하게 하되, 만약 결정된 것이 그 달 안에 연고가 있으면, 연장(延葬)하는 법도 아울러 논하게 한 뒤에 괴서(怪書)를 모두 불살라 버리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물러가서 다시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고, 또 말하였다.

"내가 서운관 구장(舊藏)의 참서(讖書)509) 를 모조리 불살라 버리라고 했었는데 아직도 있다는 말인가? 내가 비록 불민(不敏)하지만 두루 제왕(帝王)의 행적을 보았더니, 참위(讖緯)의 설(說)을 논자(論者)들은 모두 취하지 아니하였다. 술수(術數)로 말하면 수(數)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지만, 참위 같은 것은 허탄(許誕)한 데에서 나온 것이라, 심히 믿기에 족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와 같은 총명을 가지고도 오히려 도참(圖讖)에 미혹되었으므로 논자들은 이를 비평하였는데, 이것은 광무제가 도(道)에 불순(不純)한 때문이었다. 우리 조정에 이르러, 참서(讖書)에 말한 바, 목자(木子)510) ·주초(走肖)511) 의 설(說)은 개국 초(開國初)에 있었다. 정도전(鄭道傳)은 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호사자(好事者)512) 가 만든 것이다.’하였지만, 마침내 이 책을 따르게 되니, 조정의 대신들도 이를 믿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정안군(靖安君)으로 있을 때에는 이것을 믿지 않았는데, 천도(遷都)하는 날에,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이 심히 이 책을 믿어 도읍을 모악(母岳)513) 으로 정하고자 하였지만, 나만이 믿지 아니하고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정하였다. 만약 참서를 불살라 버리지 않고 후세에 전한다면 사리(事理)를 밝게 보지 못하는 자들이 반드시 깊이 믿을 것이니, 빨리 불살라 버리게 함이 이씨(李氏) 사직(社稷)에 있어서 반드시 손실(損失)됨이 없을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33권 57장 A면【국편영인본】 2책 171면
  • 【분류】
    풍속-예속(禮俗)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註 505]
    유월(踰月) : 달을 넘김.
  • [註 506]
    유년(踰年) : 해를 넘김.
  • [註 507]
    가장(假葬) : 복장(複葬)의 하나. 정식 장례(葬禮)를 치르기 전에 우선 임시로 매장을 하여 두던 것을 말함.
  • [註 508]
    전조(前朝) : 고려조.
  • [註 509]
    참서(讖書) : 참언(讖言)을 적은 책.
  • [註 510]
    목자(木子) : 이씨(李氏).
  • [註 511]
    주초(走肖) : 조씨(趙氏).
  • [註 512]
    호사자(好事者) : 일을 벌이기를 좋아하는 사람.
  • [註 513]
    모악(母岳) : 무악(毋岳).

○議葬制。 上曰: "古者天子七月, 諸侯五月, 大夫三月, 士踰月而葬, 今或有踰年未葬者, 甚乖古制。 且稱爲假葬, 置諸原野, 以爲某年某月某日, 犯某子某孫生日, 於某某爲的呼, 計其子孫利害。 如其子孫衆多者, 或二年以至三年不葬者, 亦多有之。 若士踰月, 大夫三月, 則喪事未備, 是亦可慮, 然前朝之季, 有行三日葬者, 安有擇其子孫利害乎?" 禮曹判書卞季良曰: "三日葬, 非古制, 請從五月、三月、踰月之制。" (吏書判書)〔吏曹判書〕 朴信曰: "陰陽家集諸家葬書, 異論蜂起, 使人誑惑。 悉集葬書, 令書雲觀撮其大要, 其他怪異之書, 悉除不用, 以杜人惑。" 上曰: "創法立制, 須使後世不改, 遽立法制, 則毁之必速。 卿等依古葬法定制, 以圖永傳。" 趙末生據禮曹狀, 啓大夫之葬三月、士踰月之制, 上曰: "是誠美法, 令大臣擬議定之。" 左議政朴訔曰: "燒毁葬書之怪者, 以杜人惑。" 季良曰: "其在書雲觀怪書則可得盡燒, 若私藏怪書, 何能盡燒? 立法則人自服從。" 曰: "人之私故多端, 令書雲觀共議通行葬日, 若定月內有故, 則延葬之法幷論, 然後悉燒怪書。" 上曰: "退而更議以聞。" 上又曰: "予以書雲觀舊藏讖書, 悉令燒去, 無乃尙存乎? 予雖不敏, 歷觀帝王之迹, 讖緯之說, 論者皆不取焉。 術數則因數而起, 若讖緯則出於虛誕, 甚不足信。 然以 光武之明, 猶惑圖讖, 論者譏之, 是光武之不純乎道也。 至我朝, 讖書所言木子走肖之說, 在開國初, 鄭道傳曰: ‘此必好事者之所作也。’ 然竟從是書, 朝之大臣莫不信之。 予以靖安君時, 尙不之信, 遷都之日, 晋山府院君 河崙深信此書, 欲定都毋岳, 予獨不信, 乃定漢都。 若不燒讖書, 以傳後世, 則見理不明者, 必深信矣, 亟令燒去。 於李氏社稷, 必無所虧。"


  • 【태백산사고본】 15책 33권 57장 A면【국편영인본】 2책 171면
  • 【분류】
    풍속-예속(禮俗)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