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2월 2일 기미 1번째기사 1417년 명 영락(永樂) 15년

강무장 문제로 임금이 진노하다

의정부 좌의정 박은(朴訔)·우의정 한상경(韓尙敬)이 강무할 곳을 올렸는데, 사인(舍人) 심도원(沈道源)을 시켜 아뢰기를,

"충청도 순성(蓴城)을 춘등 강무장(春等講武場)으로 하고, 강원도 횡성(橫城)을 추등 강무장(秋等講武場)으로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노하여 말하였다.

"횡성은 곧 전일에 정부(政府)와 대간(臺諫)에서 의논하여 결정한 곳인데, 그때에는 어찌 한 마디 말도 언급하지 않았느냐? 또한 지금은 강무한다는 명령도 없었는데 어찌하여 이런 말을 내느냐? 나더러 각림사(覺林寺)에 간다고 핑계하여 강무하지 말라는 말이냐? 내 어찌 강무하고자 했겠느냐? 그러나, 강무는 옛 제도[古制]인 것이다. 만일 강무하는 것을 그르다고 한다면, 이 앞서 강무하였을 때에 여러 재상과 대간이 어찌하여 저지하지 않았느냐? 이것이 곧 임금의 악(惡)을 조장하는 것이다. 원주(原州)각림사는 내가 나이 어렸을 적에 유학(遊學)한 곳이므로, 사우(寺宇)와 산천(山川)이 매양 꿈속에 들어오는 까닭에, 한 번 가 보고 싶었을 뿐으로 애초부터 부처를 위함은 아니었다. 만약에 눈이 녹기를 기다려서 간다면, 반드시 ‘이를 핑계 삼아 강무한다.’ 할 것이니, 모름지기 눈이 쌓였을 적에 가야겠다."

대언(代言) 서선(徐選), 승전 내관(承傳內官) 최한(崔閑)을 의금부(義禁府)에 내리니, 서선 등은 지난 가을에 정했던 강무장을 을미년의 일이라고 했으므로, 임금이,

"나를 속였다."

하여, 가두도록 명했다. 또 조말생(趙末生)에게 명하여,

"집으로 돌아가라"

하였다가, 이튿날 용서하라고 명하니, 서선(徐選)·최한(崔閑) 등도 각기 그 집으로 돌아갔다. 조말생을 불러 직책에 나오게 하니, 박은·한상경 등이 예궐(詣闕)하여 아뢰었다.

"어제 심도원(沈道源)이 신 등의 뜻을 잘못 아뢰었습니다. 신 등의 생각으로는, 평강(平康) 강무장은 산이 깊고 눈이 쌓여 반드시 3월 보름을 기다린 뒤에야 눈이 다 녹겠고, 또 한 도내(道內)를 일년에 두 번씩 가신다면 민력(民力)이 근고(勤苦)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농사에도 방해가 될 것이므로, 원컨대, 순성(蓴城)으로써 또 한곳을 만드신다면, 금수(禽獸)도 해를 거듭합을 따라 번식할 이치가 있을 것이요, 민생에 있어서도 고되고 헐함이 서로 균등하게 하는 뜻이 있게 되어, 전하께서 백성으로 하여금 폐단이 없게 하려는 염려에 거의 합당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기고, 조금 있다가 대언 등을 인견(引見)하고 말하였다.

"전일에 서선최한을 가둔 것은 정승(政丞)의 말을 꺼려서가 아니다. 지난 가을 강무할 곳을 의논하여 결정할 때, 서선은 그 일을 전장(專掌)하였고, 최한은 처음부터 끝까지 출납(出納)하였으나, 모두 기억하지 못한 까닭에 하옥하라고 명한 것이다. 대저 옥(獄)이란 하루라도 유숙(留宿)할 수 없는 곳이고, 근신(近臣)을 경솔히 하옥함이 불가한 것도 내가 어찌 모르겠느냐? 특히 뒷사람을 경계한 것뿐이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여름철에는 사냥[苗]으로 해가 되는 것을 제거하고, 나머지 3시(三時)에도 모두 뜻이 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무사(無事)하다고 사냥하지 아니함은 불경(不敬)한 것이다.’하였다. 이 말을 해석하는 자가 말하기를, ‘일[事]은 군례(軍禮)·빈례(賓禮)·상례(喪禮)·흉례(凶禮)에 출입하는 일이다.’라 하였으니, 무사하다고 해도 사냥함이 옛 제도인 것이다. 지금 대소 신민(大小臣民)들이 모두 강무하는 일을 하고자 하지 않는데, 나 혼자만 옛 법을 말하니 특히 하나의 버릇이 되고 말았다.

또 근자에 구언(求言)062) 했을 때, 재신(宰臣) 남실(南實)이 강무의 폐단을 극언(極言)하였는데, 그 말이 임금을 업신여겼을 뿐만 아니라, 온 나라에 사람이 없는 것으로 여겼기에 내가 그 이유를 묻고자 하다가, 구언(求言)하고서 도리어 그 말이 적중하지 못함을 책망할 수 없는 까닭에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전조(前朝)의 말년에 구언하였더니, 어떤 사람이 부처[佛]를 헐뜯어 말하므로 조정의 의논이 그를 국문(鞫問)하려 하였다. 시중(侍中) 정몽주(鄭夢周)가 말하기를, ‘구언하고서 그에게 죄 줄 수는 없습니다.’ 하여, 곧 죄를 면한 일이 있었기에, 사실은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그를 내버려두고 묻지 않은 것은 또한 이런 뜻에서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사시(四時)에 전렵함은 옛 법이다.’ 하였는데, 이제 봄·가을 두 때만으로 정한 것은 바로 그것을 반으로 꺾은 것이다. 혹자는 이를 가지고 ‘임금의 뜻을 봉영(逢迎)063) 하는 것이다.’고 말한다니, 이것은 무슨 마음에서인가?

근일에 조원(趙源)이란 자도 강무하고자 아니하여, 사사로이 서로 비훼(非毁)하는 서신이 있었고, 또 예조(禮曹)에서 일찍이 고제(古制)를 모아서 아뢰었을 때, ‘천자(天子)도 친히 궁시(弓矢)를 잡는다.’는 귀절을 삭제하였으니, 그 뜻을 따진다면 이 역시 강무를 싫어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 일을 직서(直書)하였다 하더라도 느닷없이 궁시(弓矢)를 차고 치빙(馳騁)064) 하는 것을 달게 여겼겠느냐? 그 의롭지 못함이 대강 이와 같다. 하지만 그 뜻만은 실지로 나를 사랑함인데 단지 그 대체(大體)를 알지 못했을 뿐이다. 사람들은 모두 나더러, ‘무가(武家)이어서 무사(武事)를 좋아한다.’고 하나, 태조(太祖)께서 나에게 학문(學問)을 권장하셨으니, 내가 궁시를 잡기 시작한 것은 어렸을 때가 아닌 장년(壯年) 시절이므로, 무사(武事)를 좋아한다고 할 수도 없고, 또한 무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다.

건문제(建文帝)065) 때에는 사장(詞章)만을 일삼았으므로, 육옹(陸顒) 등이 매양 성천자(聖天子)라고 일컬었지만, 결국은 패망에 이르렀으니 어찌 이를 거울삼지 않겠느냐? 옛사람이 이르기를, ‘문무(文武)를 아울러 씀이 장구(長久)의 계책이라’고 하였으니, 내 문무를 아울러 써서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을 뿐이다. 내가 순성(蓴城)을 강무할 곳으로 삼지 않는 것은 후세에 국정(國政)을 등한시하여 멀리 사냥 나가 유일(遊逸)을 일삼을까 두려워함에서이다. 백성들이 나무를 베고 밭갈이하는 것을 들어 주어, 미록(麋鹿)으로 하여금 번식하지 못하게 한다면 비록 유일하고자 하더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33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책 146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사상-불교(佛敎) / 사법-탄핵(彈劾) / 군사-병법(兵法)

  • [註 062]
    구언(求言) : 나라에 재변(災變)이 있을 때 임금이 근신하는 의미에서 시정(時政)의 잘못과 민폐(民弊)에 대한 바른 말을 구하던 제도.
  • [註 063]
    봉영(逢迎) : 남의 뜻을 맞추어 줌.
  • [註 064]
    치빙(馳騁) : 부산하게 돌아다님.
  • [註 065]
    건문제(建文帝) : 명나라 혜제(惠帝).

○己未/議政府左議政朴訔、右議政韓尙敬上講武之所, 使舍人沈道源啓曰: "請以忠淸道 蓴城爲春等講武場; 以江原道 橫城爲秋等講武場。" 上怒曰: "橫城乃前日政府、臺諫之所議定, 其時何無一言及之? 且今無講武之命, 何以發此言也? 無乃以予托覺林之行, 爲講武歟? 予豈欲講武哉? 然講武, 古制也。 如以講武爲非, 則前此講武之時, 諸相與臺諫何不沮之乎? 此乃長君之惡也。 原州 覺林寺乃少時遊學之地, 寺宇山川, 每入於夢, 故欲一往觀耳, 初非爲佛也。 若待雪消而行, 則必謂托此以講武, 須當積雪之時往焉。" 下代言徐選、承傳內官崔閑于義禁府。 等以前秋所定講武場, 爲乙未年事, 上以爲欺予, 命囚之, 又命趙末生歸于家。 翼日, 命放徐選崔閑等, 各歸其家; 召末生就職。 朴訔尙敬等詣闕啓曰: "昨道源失啓臣等之意。 臣等以爲, 平康講武場, 山深雪積, 必待三月望後消盡。 且於一道內一年再行, 則非惟民力勤苦, 且必妨農。 願以蓴城又爲一所, 則禽獸有積年繁息之理, 民生有苦歇相均之意, 庶合殿下使民無弊之念。" 上然其言。 旣而, 引見代言等曰: " 前日囚徐選崔閑者, 非憚政丞之言也。 前秋講武處議定之時, 專掌其事, 則終始出納, 而皆不能記, 故命下獄。 夫獄之不可一日留宿, 近臣之不可輕下獄, 予豈不知? 特以戒後。 古人曰: ‘夏月爲苗除害, 餘三時亦皆有義。’ 又云: ‘無事而不田, 不敬也。" 釋之者曰: ‘事謂出入軍賓喪凶之事。’ 無事則田, 古制也。 今大小臣民皆不欲講武之事, 予獨言古法, 特爲一癖。 且日者求言之時, 宰臣南實極言講武之弊, 其辭非唯不有其君, 擧國無其人。 予欲問其由, 不可求言而反責其不中者, 故置之。 前朝之季, 嘗求言而有一人毁佛, 朝議欲鞫之, 侍中鄭夢周曰: ‘不可求言而罪之。’ 乃免焉。 事實雖殊, 其置而不問, 亦此意也。 人有言曰: ‘四時之田, 古法也。’ 今定爲春秋兩時, 是乃折中也。 或者以是謂逢迎君上之意, 是何心哉? 近有趙源者, 亦不欲講武, 乃有私相非毁之書。 又禮曹嘗撮古制以聞, 削其天子親執弓矢之句, 原其意, 是亦厭其講武也。 雖直書其事, 其肯遽佩弓矢以馳騁耶? 其不義類如此。 然其志實愛我, 特不知其大體耳。 人皆以我爲武家好武事, 然太祖勸我以學問, 予之執弓矢, 非自幼乃在壯年, 不可謂好武, 亦不可謂不好。 建文唯事詞章, 陸顒等每稱聖天子, 卒至於敗, 獨不鑑此乎? 古人云: ‘文武竝用, 長久之策。’ 予欲竝用文武而不偏耳。 予之不以蓴城爲講武者, 恐其後世慢棄國政, 遠事遊逸也。 聽民斬木耕耨, 使麋鹿無以繁息, 則雖欲遊逸, 不可得也。"


  • 【태백산사고본】 15책 33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책 146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사상-불교(佛敎) / 사법-탄핵(彈劾) / 군사-병법(兵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