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변계량의 상서문
경승부 윤(敬承府尹) 변계량(卞季良)이 상서(上書)하였다. 글은 이러하였다.
"전하께서 재앙을 만나 두려워하고 몸을 닦고 반성하고 경계하고 조심함이 날로 날로 깊으시니, 하늘을 공경하는 정성이 지극하고, 백성을 부지런히 돌보는 의리가 극진합니다. 신과 같은 자는 다른 재능이 없고, 오직 문묵(文墨)의 소기(小技)를 가지고 지나치게 지우(知遇)를 입어 몸이 양부(兩府)에 이르러 앉아서 후한 녹(祿)을 허비하나 비익(裨益)한 것이 없습니다. 이번에 나쁜 징조(徵兆)로 견책(譴責)을 보이자, 전하께서 진념(軫念)하시니, 일을 의논하고 말씀을 올려서 성람(省覽)에 대비하는 것이 마땅한 바이지만, 그러나, 말을 내어서 전하의 성신(省愼)과 미재(弭災)241) 를 권(勸)하고자 한다면 전하의 우근(憂勤)하심이 전례가 깊어질 것입니다.
전하께서 걱정하고 살피는 것은 대개 억조(億兆)의 인민(人民)이 옷이 없고 먹을 것이 없어서 혹시 얼거나 굶주리는 데 이를까 염려하는 것인데, 신이 염려하는 것은 또 전하께서 걱정과 두려움에 지나쳐서 잠을 잃고 음식을 잊어버려 혹시 위예(違豫)에 이를까 두렵습니다. 신이 지난해 여름에 삼가 6개 조문을 올릴 때 첫 머리에 조섭(調攝)을 삼가시라는 한 귀절을 가지고 정성스레 세 번이나 뜻을 말씀드린 것도 대개 이 때문이었습니다. 전하께서 그것을 또한 깊이 생각하였습니까? 신이 아첨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마음에 품은 것이 바로 이와 같았을 뿐입니다. 비록 말을 내어서 정치의 잘못과 생민(生民)의 폐단을 진달(陳達)한다 하더라도, 여러 신하들의 진언(進言)한 것이 진실로 낱낱이 거론하여 빠진 것이 없으니, 신이 또 어찌 감히 진부(陳腐)한 것을 주워 모아서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하겠습니까? 만약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이 아직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어찌 신과 같은 자가 능히 할 수 있는 바이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천재(天災)가 바야흐로 성하여 인심이 크게 두려워하는데, 다른 고담(高談)과 이론(異論)을 할 것이 없고, 또 목전(目前)의 비를 비는 한 가지 일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이제 비를 빌면서 하늘에 제사지내지 아니하는데, 신은 그것이 옳은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저 비오고 날 개고 춥고 덥고 바람부는 것은 모두 하늘의 하는 것인데, 그것이 제때에 하는 것과 항시 하는 것은 사람이 아래에서 느끼게 되면 하늘이 위에서 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기수(氣數)가 때맞춰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한재(旱災)는 기수(氣數)가 때맞춰 그렇게 하는 것인지, 인사(人事)가 부른 것인지, 기수와 인사가 서로 아울러서 그렇게 하는 것인지 신은 모두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감통(感通)하는 계기는 실로 하늘에 있는 것이요, 다른 데에서 구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선유(先儒)로서 노론(魯論)242) 을 전한 자가 이르기를, ‘무우(舞雩)는 하늘에 제사하여 비를 비는 곳이다.’고 하였으니, 옛사람이 비를 빌 적에는 반드시 하늘에 제사한 것이 분명한데, 이제 비를 빌면서 하늘에 제사하지 않음이 옳겠습니까? 혹은 말하기를, ‘누가 하늘에 비를 비는 것이 옳은지를 알지 못하는가? 그러나, 천자(天子)가 천지(天地)에 제사지내고 제후(諸侯)가 산천(山川)에 제사지내는 것이 제도이니, 비를 하늘에 비는 것은 참람(僭濫)하지 않은가?’고 하나, 신은 말하기를, ‘천자(天子)가 천지(天地)에 제사지내는 것은 상경(常經)이요, 하늘에 비를 비는 것은 비상(非常)의 변(變)에 대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을 좋게 말하는 경우에는 사람에게 징험이 있다.’고 하였으니, 신은 인사(人事)로써 이를 밝혀서 사람을 여기에 두도록 청합니다. 그 일을 소송하고자 할 때 형조(刑曹)에 가지 않으면 반드시 헌사(憲司)에 가게 되는데, 형조와 헌사에서 그 일을 올리는 것은 나라의 제도입니다. 일이 급하고 사정이 지극할 경우에는 직접 와서 격고(擊鼓)하여서 천총(天聰)에 아뢰는 자도 있는데, 무엇이 이와 다르겠습니까? 대저 5일 동안 비가 안 오면 보리가 없어지고, 10일 동안 비가 안 오면 벼가 없어집니다. 그런데 이제 10여 일이 되어도 비가 내리지 않는데, 아직도 하늘[天]에 제사하기를 의심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비록 하늘에 비를 빈다고 하더라도 또한 기필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이제 빌지도 아니하고 우택(雨澤)이 내리기를 바라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또 나라의 제도가 예문(禮文)에 의거하여 교사(郊祀)243) 를 폐지한 지가 지금까지 몇 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동방(東方)에서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도리가 있었으니, 폐지할 수 없습니다. 신은 청컨대, 그 설(說)을 조목별로 말할 수 있으니, 전하께서 청감(淸鑑)244)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이 시조인데, 대개 하늘에서 내려왔고 천자가 분봉(分封)한 나라가 아닙니다. 단군이 내려온 것이 당요(唐堯)245) 의 무진년(戊辰年)에 있었으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3천여 년이 됩니다. 하늘에 제사하는 예가 어느 시대에 시작하였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그러나 또한 1천여 년이 되도록 이를 혹은 고친 적이 아직 없습니다.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憲大王)이 또한 이를 따라 더욱 공근(恭謹)하였으니, 신은 하늘에 제사하는 예를 폐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말하기를, ‘단군은 해외에 나라를 세워 박략(朴略)246) 하고 글이 적고 중국과 통하지 못하였으므로 일찍이 군신(君臣)의 예를 차리지 않았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에 이르러서 은(殷)나라의 태사(太師)를 신하로 삼지 아니하고 조선에 봉하였으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이로써 하늘에 제사하는 예를 행할 수 있었다. 그 뒤에 중국과 통하여 임금과 신하의 분수에 찬연(燦然)하게 질서가 있으니, 법도를 넘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신은 말하기를, ‘천자(天子)는 천지(天地)에 제사하고, 제후(諸侯)는 산천(山川)에 제사하는 것은 이것은 예(禮)의 대체(大體)가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제후로서 하늘에 제사한 경우도 또한 있었다. 노(魯)나라에서 교천(郊天)247) 한 것은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에게 큰 공훈(功勳)이 있다 하여 내린 것이고, 기(杞)·송(宋)이 교천(郊天)한 것은 그 선세(先世) 조종(祖宗)의 기운이 일찍이 하늘과 통하였기 때문이다. 기(杞)나라가 기(杞)나라 됨은 미미한 것이지만 선세 때문에 하늘에 제사지냈고, 노(魯)나라는 비록 제후(諸侯)의 나라라 하더라도 천자가 이를 허락하여서 하늘에 제사하였다. 이것은 예의 곡절(曲折)이 그러한 것이다.’고 합니다. 신이 일찍이 생각하건대, 고황제(高皇帝)248) 가 참란(僭亂)을 삭평(削平)하여 이하(夷夏)249) 를 혼일(混一)하고, 제도를 창시하며 법을 세울 때, 옛것을 혁파하고 새로운 것을 취하였습니다. 이에 현릉(玄陵)250) 이 귀부(歸付)한 정성을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밝은 조서(詔書)를 내려, 우리 조정(朝廷)의 일을 두루 말하기를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과 같이 자세하게 갖추 말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만 리 밖을 밝게 내다보는 것이 일월(日月)이 조림(照臨)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조정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일도 또한 반드시 알고 있었을 것은 의심이 없습니다.
그 뒤로 곧 의식은 본속(本俗)251) 을 따르고 법은 구장(舊章)252) 을 지키도록 허락하였으니, 그 뜻은 대개 해외(海外)의 나라이므로 처음에 하늘에서 명(命)을 받았음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 하늘에 제사하는 예법은 심히 오래 되어 변경할 수가 없습니다. 국가의 법은 제사(祭祀)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제사의 예법은 교천(郊天)253) 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법은 옛 전장(典章)을 지키는 것이니, 이것이 그 먼저 힘써야 할 일입니다. 이것에서 말미암아 말한다면, 우리 조정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것은 선세(先世)에서 찾게 되니, 1천여 년을 지나도록 기운이 하늘과 통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고황제(高皇帝)가 또 이미 이를 허락하였고, 우리 태조(太祖)께서 또 일찍이 이에 따라서 더욱 공근(恭謹)하였으니, 신이 이른바 우리 동방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이치가 있어 폐지할 수 없다는 것이 이것 때문입니다.
혹은 말하기를, ‘인용한 이 말은 유사하다. 그러나, 노(魯)나라의 교사(郊祀)는 예가 아님을 공자(孔子)가 말하였고, 성왕(成王)의 내린 것을 정자(程子)254) 가 그르다고 하였으니, 이제 바로 끌어다가 예로 삼음은 불가하지 않은가?’고 합니다. 신은 말하기를, ‘성현(聖賢)의 논한 것을 알지 못하지 아니하나, 성왕(成王) 때는 주공(周公)이 죽은 뒤이므로 대경(大經)과 대법(大法)이 모두 소공(召公)에게서 나왔고, 노(魯)나라에 교체(郊禘)255) 를 내린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니, 반드시 소공에게 물어서 행하였을 것이 의심할 바가 없다. 대저 어찌 의리가 아닌데 소공이 이를 하였겠는가? 이것도 또한 하나의 도리일 것이다.’고 합니다. 혹은 말하기를, ‘소공(召公)256) 이 강왕(康王)을 도울 때 왕(王)이 면복(冕服)을 벗고 상복(喪服)을 되입었는데, 소씨(蘇氏)257) 는 그 실례됨을 비웃어서 이르기를, 「주공(周公)이 있었으면 반드시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였는데, 채씨(蔡氏)258) 가 이를 취한 것이 전(傳)에 보인다. 이로써 논하다면 소공(召公)이 성왕(成王)을 도운 것은 우리가 또 그것이 모두 도리에 합당한지를 알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신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강왕(康王)이 복(服)을 벗은 것은 반드시 한때의 적의(適宜)함을 저울질하여 그만둘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윤(伊尹) 같은 이도 사왕(嗣王)을 받들고 삼가 그 조상을 알현(謁見)하였던 때는 또한 초상(初喪) 중에 있었다. 그러나 또한 상복(喪服)으로 묘실(廟室)에 들어가지 아니한 것이 분명한 것인데, 소공(召公)은 4대(四代)의 원로 대신으로서 사리를 짐작하여 이를 행하였을 것이니, 천견(淺見)하고 과문(寡聞)한 자가 가볍게 의논할 수 없다. 이러한 뜻을 주자(朱子)도 일찍이 말하였다. 그러나, 변(變)에 통하고 권도(權道)에 숙달하여 그 때에 적당하게 조치하기를 맞게 하는 것은 세상을 경륜하는 상도(常道)는 아니다. 그러므로, 채씨(蔡氏)가 소씨(蘇氏)의 설을 취하여 우선 그 바른 것이 남게 되었을 뿐이다.
이것으로써 논한다면, 그가 성왕(成王)을 도와서 노(魯)나라에 교체(郊禘)를 내릴 때에 대개 또한 당세의 적의(適宜)함을 저울질하였을 것이다. 만약에 한갓 허물을 소공(召公)이 성왕(成王)을 도와 노(魯)나라에 교체(郊禘)를 내려 주고 강왕(康王)을 도와 상복을 벗게 한 데로 돌리고, 그 때의 조처가 적의한 데 따랐던 사실을 살피지 아니한다면, 이것은 소공(召公)이 천하의 군신(君臣)의 큰 분수를 어둡게 하고, 예악의 질서를 어지럽게 하고, 인도(人道)의 종시(終始)의 큰 변을 소홀히 하고, 길흉(吉凶)의 절차를 어지럽게 함이니, 어찌 그가 소공(召公)이 될 수 있겠는가? 공자(孔子)도 오히려 즐겨 취하여,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시경(詩經)》 3백 편(三百篇)의 수장(首章)에다 놓을 수 있었겠는가? 주자(朱子)도 오히려 즐겨 이를 높이고 도통(道統)의 전(傳)함을 얻었다고 일컫고 《중용(中庸)》의 서문(序文)에다 나타내었겠는가? 그것이 불가한 것이 또한 명백하다. 말한 것은 예법(禮法)의 상도(常道)가 아닌 것을 일컬음이요, 정자(程子)의 말은 공자의 뜻을 기술하였을 뿐이요, 공자가 항상 일컫기를, 「무왕(武王)의 악(樂)은 진선(盡善)259) 하지 못하다.」고 하였고, 맹자(孟子)는 일컫기를, 「우(禹)임금의 공법(貢法)은 가장 불선(不善)하다.」고 하였다. 무왕의 악(樂)이 진선(盡善)하지 못한 것이 되고, 노(魯)나라의 교체(交禘)가 예의(禮義)가 아닌 것이 됨은 대개 가까운 것을 인용하여 예로 삼은 것이니, 어찌 불가(不可)함이 있겠는가?’고 합니다. 이제 비를 빌고자 하여 마땅히 중신(重臣)을 보내어 남교(南郊)에서 하늘에 제사한다면 이것은 그 가운데 큰 것이요, 종사(宗社)와 산천(山川)은 그 다음입니다. 신이 또 살펴보건대, 대아(大雅)260) 의 운한편(雲漢篇)에 있기를, ‘모든 신(神)에게 제사드리지 아니함이 없다.’하였고, 주서(周書)261) 의 낙고(洛誥)에 있기를, ‘모두 질서를 따라 문란하지 않게 한다.’고 하였으니, 비록 예문(禮文)에 실려 있지 않다 하더라도 무릇 세속(世俗)에서 전하는 기우(祈雨)의 일을 모두 거행하소서. 5도(道)와 양계(兩界)도 모두 그러하지 아니함이 없게 하고, 비가 내리기를 기필한 뒤에 그만두는 것이 가(可)하겠습니다.
또 구언(求言)하는 교지를 내렸으니, 관품(官品)에 제한을 두거나 현직과 산직(散職)을 논하지 말고 모두 실봉(實封)하여 아뢰게 하고, 또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와 여러 주(州)의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한량(閑良)262) 과 고로(故老)와 대소 양반(大小兩班)에 이르기까지 진실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모조리 진달(陳達)하고 숨김이 없게 하여 천총(天聰)에 전달(轉達)하게 하면, 하정(下情)이 상달(上達)되어 막히거나 가리우는 환(患)이 없어질 것입니다. 공경히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그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그 기분을 바꾸어, 날마다 정전(正殿)에 앉아 경연(經筵)을 열고 도(道)를 논하는 신하를 접하고, 고금(古今)을 상확(商確)263) 하고, 치도(治道)를 강명(講明)264) 하여서 나라의 근본을 세우고, 무위(武威)를 떨치게 하여 취각(吹角)의 영(令)을 거듭 밝혀서 군법을 엄하게 하고 인심을 엄숙하게 함으로써 불우(不虞)에 대비하는 것이 가(可)합니다. 만약 한갓 수성 공구(修省恐懼)하고 감선(減膳)하고 자책(自責)할 뿐이라면 일에 무익(無益)하고 기(氣)에 손실이 있을 것이므로, 신은 그윽이 전하를 위하여 실로 권권(拳拳)265) 합니다."
임금이 자못 옳게 여기고, 곧 《책부원귀(冊府元龜)》를 조계청(朝啓廳)에 내어다가, 거기에 실린 ‘천자(天子)는 천지(天地)에 제사하고, 제후(諸侯)는 산천(山川)에 제사한다.’는 말을 보여 주니, 육조 판서와 대언(代言) 등이 아뢰기를,
"이것은 예의 상전(常典)입니다. 한재(旱災)를 만나서 하늘에 비는 것도 또한 옳습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제천문(祭天文)을 짓게 하고, 자책(自責)하는 뜻을 가지고 매우 자세하게 유시(諭示)하였다. 변계량이 지어서 바친 글이 뜻에 맞으니, 구마(廐馬) 1필을 내려 주었다. 변계량이 부처에 혹(惑)하고 신(神)에 아첨하며, 하늘에 배례(拜禮)하고 별에 배례하여 하지 못하는 일이 없고, 심지어 동국(東國)에서 하늘에 제사하자는 설(說)을 힘써 주장하니, 분수를 범하고 예를 잃음을 알지 못함이 아닌데, 한갓 억지의 글로써 올바른 이치를 빼앗으려 한 것뿐이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31권 44장 A면【국편영인본】 2책 119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왕실-사급(賜給)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과학-천기(天氣)
- [註 241]미재(弭災) : 재앙을 가라앉힘.
- [註 242]
노론(魯論) : 《논어》의 일종.- [註 243]
교사(郊祀) : 임금이 교외(郊外:서울에서 1백리 밖)에서 하늘과 땅에 지내던 제사. 동지(冬至) 때에는 남쪽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지내고[南郊祀], 하지(夏至) 때에는 북쪽 교외에서 땅에 제사지냈는데[北郊祀], 원구(圓丘)를 쌓기 때문에 원구제(圓丘祭)라고도 함. 교천(郊天).- [註 244]
청감(淸鑑) : 임금이 보는 것.- [註 245]
당요(唐堯) : 도당씨(陶唐氏) 요(堯)임금.- [註 246]
박략(朴略) : 질박하고 간략함.- [註 247]
교천(郊天) : 하늘에 제사하는 것.- [註 248]
고황제(高皇帝) : 명(明)나라 주원장(朱元璋).- [註 249]
이하(夷夏) : 중국과 주변의 나라.- [註 250]
현릉(玄陵) : 공민왕(恭愍王).- [註 251]
본속(本俗) : 고유의 풍습.- [註 252]
구장(舊章) : 옛날 법도.- [註 253]
교천(郊天) : 교사(郊祀).- [註 254]
정자(程子) :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註 255]
교체(郊禘) : 임금이 제사지내던 일로써, 교(郊)는 하늘과 땅에 제사지내는 것이고, 체(禘)는 선조(先祖)를 천신(天神)에 배향(配享)하여 제사지내던 것.- [註 256]
소공(召公) :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아들, 무왕의 명신(名臣).- [註 257]
소씨(蘇氏) : 소식(蘇軾).- [註 258]
채씨(蔡氏) : 채침(蔡沈).- [註 259]
진선(盡善) : 극진히 좋음.- [註 260]
대아(大雅) : 《시경(詩經)》의 편명.- [註 261]
주서(周書) : 《서경(書經)》의 편명.- [註 262]
한량(閑良) : 호반(虎班) 출신으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 또는 벼슬을 하지 못한 사람.- [註 263]
○敬承府尹卞季良上書。 書曰:
殿下遇災而懼, 修省戒謹, 日深一日, 敬天之誠至矣, 勤民之義盡矣。 如臣者無他才能, 唯以文墨小技, 過蒙知遇, 致身兩府, 坐費厚祿, 無所裨益。 今玆咎徵示譴, 殿下軫念, 所宜論事獻言, 以備省覽。 然欲出言, 以勸殿下之省愼弭災, 則殿下之憂勤, 曠古而無有矣。 殿下所憂省, 蓋慮億兆之人無衣無食, 而或至於凍餒也; 臣之所慮者, 又恐殿下過於憂懼, 失寐忘飱, 而或至於違豫也。 臣於往歲之夏, 謹上六條, 首之以愼調攝一節, 而拳拳三致意焉者, 蓋以此也。 殿下其亦深考之耶? 臣非諛也, 臣之所存, 正如此耳。 雖欲出言, 以陳政治之失、生民之弊, 則群臣之進言者, 固已枚擧而無遺矣。 臣又豈敢掇拾陳腐, 以煩天聽也哉? 若見人之所未見; 言人之所未言, 又豈如臣者之所能及哉? 然今天災方殷, 人心大恐, 無他高談異論, 且就目前禱雨一事言之。
今禱雨而不於天, 臣未見其可也。 夫雨暘寒燠風, 皆天之所爲也。 其時與恒, 則人感於下, 而天應於上者也, 然又有氣數之適然者矣。 今之旱災, 氣數之適然歟? 人事之所召歟? 氣數人事相參而然歟? 臣皆不得而知也。 然其感通之機則實在乎天, 而不可以他求爲也。 先儒傳《魯論》者謂, 舞雩, 祭天禱雨之處云爾, 則古人之禱雨, 祭天也明矣。 今禱雨而不於天可乎?
或曰: "誰不知禱雨於天之爲可乎, 然天子祭天地, 諸侯祭山川制也, 禱雨於天, 非僭也歟?" 臣曰: "天子祭天地者常也, 禱雨於天, 處非常之變也。" 古人有言曰: "善言天者, 徵於人。" 臣請以人事明之。 有人於此, 欲訟其事, 不之刑曹, 則必之憲司, 刑、憲上其事, 國制也。 事急情至, 則直來擊鼓, 以聞天聰者有之矣, 何以異於是? 夫五日不雨, 則無麥; 十日不雨, 則無禾, 厥今浹旬不雨, 而尙且疑於祭天可乎? 雖禱雨於天, 亦未可必, 況今未嘗禱焉, 而望雨澤之降, 難矣哉! 且國制, 據禮文廢郊祀, 數年于玆矣。 然吾東方有祭天之理, 而不可廢, 臣請得而條其說, 願殿下淸鑑焉。 吾東方, 檀君始祖也。 蓋自天而降焉, 非天子分封之也。 檀君之降, 在唐堯之戊辰歲, 迄今三千餘禩矣。 祀天之禮, 不知始於何代, 然亦千有餘年, 未之或改也。 惟我太祖康獻大王亦因之而益致謹焉, 臣以爲, 祀天之禮, 不可廢也。
或曰: "檀君國於海外, 朴略少文, 不與中國通焉, 未嘗爲君臣之禮矣。 至周武王, 不臣殷太師, 而封于朝鮮, 意可見矣。 此其祀天之禮, 得以行之也。 厥後通於中國, 君臣之分粲然有倫, 不可得而踰也。" 臣曰: "天子祭天地, 諸侯祭山川, 此則禮之大體然也。 然以諸侯而祭天者, 亦有之矣。 魯之郊天, 成王以周公有大勳勞而賜之也; 杞、宋之郊天, 以其先世祖宗之氣, 嘗與天通也。 杞之爲杞, 微乎微者, 以先世而祭天矣; 魯雖侯國, 以天子許之而祭天矣。 此則禮之曲折然也。 臣嘗思之, 高皇帝削平僭亂, 混一夷夏, 創制立法, 革古鼎新, 乃嘉玄陵歸附之誠, 特降明詔, 歷言我朝之事, 如示諸掌, 纖悉備具, 眞所謂明見萬里之外, 若日月之照臨也。 我朝祭天之事, 亦必知之無疑矣。 厥後乃許儀從本俗, 法守舊章, 其意蓋謂海外之邦, 始也受命於天, 其祭天之禮甚久, 而不可變也。 國家之法, 莫大於祭祀, 祭祀之禮, 莫大於郊天, 法守舊章, 此其先務也。 由是言之, 我朝祭天之禮, 求之先世, 則歷千餘年而氣與天通也久矣。 高皇帝又已許之矣, 我太祖又嘗因之而益致謹矣。 臣所謂吾東方有祭天之理而不可廢者, 以此也。
或曰: "所引此類似矣, 然魯郊非禮, 孔子言之; 成王之賜, 程子非之, 今乃援而爲例, 無乃不可乎?" 臣曰: "非不知聖賢之論, 但成王之時, 周公沒後, 大經大法, 皆出召公, 賜魯郊禘, 非細事也。 必咨召公而行之無疑矣。 夫豈不義, 而召公爲之? 是或一道也。" 或曰: "召公之相康王也, 王釋冕反喪服, 蘇氏譏其失禮謂, 周公在, 必不爲此, 蔡氏取之, 見於傳矣。 以此論之, 召公之相成王, 吾又未知其皆合於道也。" 臣曰: "不然。 康王之釋服, 必有權一時之宜, 而不得已焉者。 如伊尹奉嗣王, 祗見厥祖, 亦在初喪, 然亦不以喪服入于廟者的矣。 召公以四世元老, 斟酌事理而行之, 有非淺見寡聞者, 所可得而輕議也。 斯義也, 朱子嘗言之, 然通變達權, 以適于時措之宜者, 非經世之常道也。 故蔡氏取蘇說, 姑存其正者爾。 以此論之, 其相成王賜魯郊禘, 蓋亦權當世之宜也。 若徒歸咎召公以相成王, 而賜魯郊禘; 相康王而釋喪服, 不察其時措從宜之實焉, 則是召公昧天下君臣之大分, 而紊禮樂之序矣; 忽人道終始之大變, 而亂吉凶之節矣, 又烏在其爲召公也哉? 孔子尙肯取之, 以《周南》、《召南》冠於三百篇之首乎? 朱子尙肯尊之謂, 得道統之傳, 而見於《中庸》之序乎? 其不可也, 亦明矣。 孔子所言謂, 非禮之常也, 程子之言則述孔子之意而已。 孔子常謂, 武王之樂爲未盡善矣, 而孟子謂, 禹之貢法爲最不善。 武王之樂爲未盡善, 魯之郊禘爲非禮義, 蓋近之援以爲例, 何不可之有哉? 今欲禱雨, 宜遣重臣, 祭天於南郊, 此其大者, 而宗社、山川其次也。" 臣又按, 《大雅》 《雲漢篇》有曰: "靡神不擧。" 《周書》 《洛誥》有曰: "咸秩無文。"則雖非禮文所載, 凡世俗所傳祈雨之事, 皆擧而行之。 五道、兩界莫不皆然, 期於下雨而後已焉可也。 且下求言之敎, 勿限官品、勿論時散, 皆得實封以聞。 又令諸道監司、諸州守令, 以至閑良、故老、大小兩班, 苟欲言者, 悉陳無隱, 轉達天聰, 則下情上達, 而無壅蔽之患矣。 恭惟殿下, 平其心、易其氣, 日坐正殿, 開經筵而接論道之臣, 商確古今, 講明治道, 以植邦本; 奮武威, 而申吹角之令, 以嚴軍法, 以肅人心, 以備不虞可也。 若徒修省恐懼, 減膳自責, 則於事無益, 於氣有損, 臣竊爲殿下, 實拳拳焉。
上頗然之, 乃出《冊府元龜》于朝啓廳, 示以所載天子祭天地、諸侯祭山川之語。 六曹判書及代言等啓曰: "此卽禮之常也。 遇旱而祈天, 其亦可哉!" 於是, 命季良製祭天文, 諭以自責之意甚悉。 季良製進稱旨, 賜廐馬一匹。 季良惑佛諂神, 拜天禮星, 無所不爲, 至於力主東國祀天之說, 非不知犯分失禮, 徒欲以强詞, 奪正理耳。
- 【태백산사고본】 14책 31권 44장 A면【국편영인본】 2책 119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왕실-사급(賜給)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과학-천기(天氣)
- [註 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