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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30권, 태종 15년 12월 15일 무인 1번째기사 1415년 명 영락(永樂) 13년

민씨가 모자를 사지에 둔 죄를 묻는 왕지를 춘추관에 내리다

춘추관(春秋館)에 왕지(王旨)를 내리었다. 하루 전에 임금이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황희(黃喜)·이조 판서(吏曹判書) 박은(朴訔)·지신사(知申事) 유사눌(柳思訥)에게 명하여, 민씨(閔氏)가 음참(陰慘)하고 교활(狡猾)하여 원윤(元尹) 이비(李)가 처음 태어났을 때에 모자를 사지(死地)에 둔 죄를 갖추 써서 왕지(王旨)를 내리고자 하다가, 제술(製述)한 것이 뜻에 맞지 않아서 하지 않았다. 박은이 아뢰기를,

"인신(人臣)이 비록 음식을 대하여서라도 인군의 다수(多壽)하고 다남(多男)하기를 축원하는데, 왕자(王子)가 태어난 날에 어찌 이러한 것이 있겠습니까? 비록 왕지를 내리지 않더라도 신 등이 이미 들었으니, 감히 묵묵히 있고 청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전지하기를,

"내가 다시 상량(商量)하겠으니 경 등은 각각 집으로 돌아가라."

하였다. 이틀 후에 경승부 윤(敬承府尹) 변계량(卞季良)을 불러 왕지(王旨)를 지어 춘추관(春秋館)에 내리었다.

"임오년 여름 5월에 민씨(閔氏)의 가비(家婢)로서 본래부터 궁에 들어온 자가 임신하여 3개월이 된 뒤에 나가서 밖에 거(居)하고 있었는데, 민씨가 행랑방에 두고 그 계집종 삼덕(三德)과 함께 있게 하였다. 그 해 12월에 이르러 산삭(産朔)이 되어 이 달 13일 아침에 태동(胎動)하여 배가 아프기 시작하였다. 삼덕민씨에게 고하자, 민씨가 문바깥 다듬잇돌 옆에 내다 두게 하였으니, 죽게 하고자 한 것이다. 그 형으로 이름이 화상(和尙)이라는 자가 불쌍히 여기어, 담에 서까래[椽木] 두어 개를 걸치고 거적으로 덮어서 겨우 바람과 해를 가리웠다. 진시(辰時)에 아들을 낳았는데 지금의 원윤(元尹) 이비(李)이다. 그날 민씨가 그 계집종 소장(小庄)·금대(金臺) 등을 시켜 부축하여 끌고 아이를 안고 숭교리(崇敎里) 궁노(宮奴)인 벌개(伐介)의 집 앞 토담집에 옮겨 두고, 또 사람을 시켜 화상이 가져온 금침·요자리를 빼앗았다. 종 한상좌(韓上佐)란 자가 있어 그 추위를 무릅쓰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어 마의(馬衣)를 주어서 7일이 지나도 죽지 않았다. 민씨가 또 그 아비와 화상으로 하여금 데려다 소에 실어 교하(交河)의 집으로 보냈다. 바람과 추위의 핍박과 옮겨 다니는 괴로움으로 인하여 병을 얻고 또 유종이 났으니, 그 모자가 함께 산 것이 특별한 천행이었다. 내가 그 때에 알지 못하였다. 지금 내가 늙었는데 가만히 생각하면 참으로 측은하다. 핏덩어리[赤子]가 기어다니는 것을 사람이 모두 불쌍히 여기는데, 여러 민(閔)가가 음참(陰慘)하고 교활하여 여러 방법으로 꾀를 내어 반드시 사지(死地)에 두고자 하였으니, 대개 그 종지(宗支)를 제거하기를 꾀하는 생각이 마음에 쌓인 것이 오래 되었으므로, 그 핏덩어리에게 하는 짓이 또한 이와 같이 극악하였다. 그러나 천도가 밝고 어그러지지 않아서, 비록 핏덩어리가 미약함에도 보존하고 도와서 온전하고 편안하게 한 것이 지극하였다. 어찌 간사하고 음흉한 무리로 하여금 그 악한 짓을 이루게 하겠느냐? 이것이 실로 여러 민 가의 음흉한 일이다. 내가 만일 말하지 않는다면 사필(史筆)을 잡은 자가 어찌 능히 알겠는가? 참으로 마땅히 사책(史冊)에 상세히 써서 후세에 밝게 보이어 외척으로 하여금 경계할 바를 알게 하라."

왕지가 이미 내려지자, 지관사(知館事) 이숙번(李叔蕃)이 왕지를 적어 대간에 이문(移文)하고자 하였다. 영관사(領館事) 하윤(河崙)이 지체하므로 이숙번이 위태한 말로 하윤을 공동(恐動)하니 하윤이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3책 30권 41장 B면【국편영인본】 2책 94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국왕(國王) / 변란(變亂)

    ○戊寅/下王旨于春秋館。 前一日, 上命議政府參贊黃喜、吏曹判書朴訔、知申事柳思訥, 備書閔氏陰慘狡猾, 元尹 初生時, 令母子置於死地之罪, 欲下王旨, 以製述未稱意不果。 啓: "人臣雖當飮食, 祝君多壽多男。 王子生日, 安有如此者乎? 雖不下王旨, 臣等旣得聞之, 其敢默默不請?" 傳旨曰: "予更商量, 卿等宜各就第。" 越翼日, 召敬承府尹卞季良, 製王旨, 下春秋館曰:

    歲在壬午夏五月, 閔氏家婢素入宮者有娠, 旣三月, 出居于外。 閔氏置之行廊之房, 與其婢三德居。 至其年十二月臨産, 是月十三日朝, 以胎動腹始痛。 三德以告閔氏, 令出置門外砧杵之側, 欲其死也。 其兄名和尙者憐之, 就墻架數椽, 覆以苫, 僅蔽風日。 辰時生子, 今元尹 也。 其日閔氏使其婢小庄金臺等扶携抱兒, 移置崇敎里宮奴伐介家前土宇, 又使人奪和尙所輸衾枕褥席。 奴有韓上佐者惜其冒寒, 乃以馬衣授之, 經七日得不死。 閔氏又令其父及和尙携持載牛, 送之交河之家。 乃因風寒之逼、遷徙之苦得疾, 乳且腫, 其母子之俱生也特幸耳。 予於其時, 未之知也。 今予老矣, 靜言思之, 良用惻然。 赤子匍匐, 人所同隱, 諸陰慘狡猾, 多方爲計, 必欲置之死地, 蓋其謀剪宗支之念, 積於中者旣久, 故其施於赤子, 亦若是其極也。 雖然天道赫然不爽, 雖於赤子之微, 所以保佑而全安之者至矣。 豈使奸憸之輩, 得以遂其惡哉? 此實諸之陰事, 予苟不言, 秉筆者焉能知之? 誠宜詳書史冊, 昭示後世, 使外戚知所戒焉。

    旨旣下, 知館事李叔蕃欲錄旨, 移文臺諫, 領館事河崙遲之。 叔蕃以危言動, 不敢違。


    • 【태백산사고본】 13책 30권 41장 B면【국편영인본】 2책 94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국왕(國王) / 변란(變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