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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29권, 태종 15년 6월 17일 임오 1번째기사 1415년 명 영락(永樂) 13년

강무·저화·부병·조운 등에 대해 의논하다

육조와 승정원에 명하여 진언(陳言)한 가운데서 행할 만한 사목(事目)을 의논하게 하였다. 무릇 시산(時散)163) 대소 인원(大小人員)으로 진언(陳言)한 것이 총 1천 4백여 조항[道]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서 시무(時務)에 절실하지 못한 것은 버리고, 최한(崔閑)에게 명하여 육조의 판서와 여러 대언들에게 강무(講武)·저화(楮貨)와 육십(六十)의 제하(除下) 및 조전(漕轉) 등 4가지 일에 대해 물었다.

"진언(陳言)한 것 가운데 모두가 ‘멀리 가서 강무(講武)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경기(京畿)에는 강무할 만한 곳이 없으니 아주 없애고 하지 않을까 하는데 어떻겠는가?"

모두 대답하기를,

"강무는 군사(軍事)를 훈련하는 것이고, 또 예(禮)로써 행하는 것이라 폐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풍해도충청 양도에 공문을 보내[移文]어 해주곶이[海州串] 내와 순제(蓴堤) 등처에 백성들이 들어가 경작하도록 허용하고, 사사로이 사냥하는 것을 금지하지 말라. 그리고 사냥할 일정한 장소[常所]를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판서와 대언 등이 의논하기를,

"강원도 횡천(橫川)진보(珍寶)로써 한 장소를 삼고, 풍해평산(平山)영봉(迎鳳)을 한 장소로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영봉해주곶이 내에서 거리가 멀지 않다. 내 이제 늙었으니 다시는 원행(遠行)하여 해주곶이 내에 가지 않겠다. 후대의 임금으로 만약에 영봉에 가서 사냥하게 된다면 반드시 곶이 내에서 사냥하겠다고 말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고, 즉시 명하여 다시 다른 곳으로 정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안협(安峽)평강(平康)으로 한 장소를 삼아, 경기우도(京畿右道)를 아울러 사렵(私獵)을 금하고, 횡천(橫川)방림(芳林)을 한 장소로 삼아, 양근(楊根)·광주(廣州)·풍양(豊壤)·포천(抱川)·장단(長湍)·임강(臨江)도 아울러 사렵(私獵)을 금하였다. 임금이 또 전지(傳旨)하기를,

"진언(陳言)한 것 가운데 모두가 ‘저화(楮貨)를 사용하는 것이 미편(未便)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판서와 대언 등이 아뢰기를,

"오늘날 저화는 이미 흥용(興用)되고 있으니, 세(稅)로 부과하는 값만 없앤다면 어찌 행용(行用)에 미편함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저화를 쓰게 되면 세로 부과하는 값을 없앨 수 없다. 지난날에 세가(稅價)를 제거한 것은 영구히 제거한 것이 아니고 잠깐 정지한 것뿐이다."

하고, 인하여

"동전(銅錢)과 겸행(兼行)하면 어떻겠는가?"

하니, 판서와 대언 등이 아뢰기를,

"겸행할 수 없습니다. 만약 동전을 사용하면 마땅히 저화는 사용하지 말고 전문(錢文)을 흥용(興用)해야 합니다. 예전에 저화를 처음 사용할 때에 오승포(五升布)와 병행할 것을 허용하였으나, 백성들이 저화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 오승포의 사용을 중단시켜 백성들에게 〈오승포를〉 사용하지 못함을 보여준 뒤에야 저화가 흥용되었으니, 동전과 저화의 겸행은 역시 그와 같은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동전과 저화의 겸용은 내 능히 할 수 있다. 경들은 육경(六卿)으로서 어찌하여 이 같은 말을 먼저 하는가? 어리석은 백성에게 듣게 하기 위해서인가? 겸행하는 방법이 고전(古典)에 실려 있다."

하고, 이어서 《원사(元史)》《두씨통전(杜氏通典)》을 내어 보였다. 즉시 총제(摠制) 이현(李玄)을 불러 ‘중국[大明]에서 동전과 저화(楮貨)를 겸행하는 법’을 묻고, 이어서 육조 판서에게 말하게 하여 이를 따지게 하였다. 호조 판서 심온(沈溫)이 동전(銅錢)과 저화[錢幣]를 흥용시킬 계목(啓目)을 올렸는데, 그 대략은 이러하였다.

"1. 오래 묵은 미두(米豆)를 사용하여 저화의 싯가(時價)를 보이시되, 주철(鑄鐵) 매 한 근(斤)씩에 저화 3장 값의 쌀을 주어 무역을 허락하고, 외방(外方) 각 고을에 이 예(例)에 의하여 무역해서 납부하게 할 것.

1. 경외(京外)의 시산(時散) 각 품(品)에게 품질(品秩)에 따라 수를 정하여 수납(收納)하게 할 것.

1. 범죄인의 가재(家財) 내에서 국용(國用)에 소용되는 것 외에는 그 잡물(雜物)로써 무역하게 할 것.

1. 자원(自願)한 사람이 주철(鑄鐵) 3근을 관가(官家)에 납부하면 2근으로 동전을 만들어 환급(還給)할 것.

1. 경외의 범죄인에게 수속(收贖)하는 것을 이 뒤로는 저화와 주철을 반반씩 징수하여 수납할 것."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다만 품질에 따라 철을 징납하자는 것과 범죄인에 대한 수속(收贖)을 주철로 하자는 일만은 윤허하지 않았다.

1. 육십(六十)을 제하(除下)하는 일에 대하여 판서 박신(朴信) 등이,

"이 무리들은 직사(職事)에서 일하면서도 아직 늠록(廩祿)이 없으니, 4백 명으로 한정하여 녹(祿)을 주며 역사(役使)시키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고, 박신이 곧 계목(啓目)을 올렸다.

"각영(各領)의 대장(隊長)과 대부(隊副)로서 각 품(品)의 근수(根隨)와 토목(土木)의 역사에 종사하는 것을 일절 모두 면제[蠲免]하고, 장실(壯實)한 자 1천 명을 선택하여 정액(定額)164) 으로 삼아, 각기 방패(防牌)를 받아 윤번(輪番)으로 시위(侍衛)하게 하면, 부병(府兵)의 양법(良法)이니, 그 대장 2백 30명과 대부 5백 20명을 혁파하소서. 당초에 이번(二番)의 녹내(祿內)에서 각품의 숫자를 증가시켜 부윤(府尹)이 4명, 총제(摠制)가 9명, 첨총제(僉摠制)가 3명, 사직(司直)이 6명, 부사직(副司直)이 9명, 사정(司正)이 18명, 부사정(副司正)이 18명, 삼군(三軍) 근장(近仗)이 80명 등으로 하였으니, 이들 녹과(祿科)에 준하여 계산하면, 그 남은[餘剩] 쌀·보리·콩·포(布)가 4백여 명의 녹봉(祿俸)을 충당할 수 있습니다. 원컨대, 매 1영(領)마다 섭대장(攝隊長) 3명과 섭대부(攝隊副) 7명씩을 두어, 40영(領)에 도합 4백 명을 임명[差下]하여 녹봉을 반사(頒賜)하여 장번(長番)으로 입역(立役)하게 하소서.

부병(府兵) 중에 거관(去官)하는 자가 있으면, 섭대장과 대부 가운데서 장실(壯實)한 자를 택하여 입역(立役)에 충당하시고, 그 섭대장과 대부가 천전(遷轉)으로 인하여 결원이 생기면, 비첩(婢妾)의 자식과 칭간칭척(稱干稱尺) 중에서 장실한 자를 택하여 입역에 충당하며, 각사(各司)의 도목(都目) 때에 우두머리[頭]가 된 이전(吏典)·조례(皂隷)·나장(螺匠)·소유(所由) 등과 대장·대부로서 거관(去官)하는 사람들을 아울러 섭직(攝職)165) 으로 차하(差下)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녹봉을 증가하지 아니하여도 부병(府兵)이 충실해지고, 각처의 차비(差備)도 실(實)하게 되어, 보충군(補充軍)의 천전(遷轉)하는 길이 또한 궐(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각 품(品)의 비첩(婢妾) 자식과 칭간칭척(稱干稱尺)들을 모조리 추고(推考)하여 보충군으로 시행케 하고, 봉족(奉足)을 정해 주어 번(番)을 나누어 입역(立役)시키며, 도총제(都摠制) 이하의 각배(各陪)166) 와 부득이한 영선(營繕) 등의 일은 임시(臨時)에 명령을 받들어 요량하여 결정해 주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 조전(漕轉)의 일에 대해서는 사삿배[私船]에 세(稅)를 주고 전운(轉運)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올여름의 패선(敗船)할 때 사삿배가 패선한 율은 10에 하나이고, 군선(軍船)으로 패선한 것은 많았으니, 이것은 사삿배 사람들은 배에 익숙하여 수로(水路)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육조에서 의논하여 아뢰니, 곧 사삿배로 쌀을 운반하게 하고, 군선으로 호송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3책 29권 43장 B면【국편영인본】 2책 70면
  • 【분류】
    정론(政論) / 왕실-행행(行幸) / 군사-병법(兵法) / 군사-군정(軍政) / 군사-특수군(特殊軍) / 군사-군역(軍役) / 사법-법제(法制) / 금융-화폐(貨幣) / 재정-국용(國用) / 재정-역(役) / 인사-관리(管理) / 교통-수운(水運) / 신분-천인(賤人)

  • [註 163]
    시산(時散) : 시임(時任) 산관(散官).
  • [註 164]
    정액(定額) : 정원.
  • [註 165]
    섭직(攝職) : 섭대장·섭대부.
  • [註 166]
    각배(各陪) : 각 배종(陪從).

○壬午/命六曹、承政院, 議陳言內可行事目, 凡時散大小人員陳言, 摠一百四十餘道, 去其不切於時務者。 乃命崔閑問六曹判書、諸代言等以講武、楮貨、除下六十、漕轉等四事曰: "陳言內皆以爲, 不可遠行講武, 然京畿無可講武之所, 欲絶而不爲如何?" 皆對曰: "講武, 訓鍊軍事, 且禮行不可廢也。" 上曰: "移文豐海忠淸兩道, 其海州串蓴堤等處, 許民入耕, 毋禁私獵, 擬議田獵常所以聞。" 判書、代言等議: "以江原道 橫川珍寶爲一所, 以豐海道 平山迎鳳爲一所。" 上曰: "迎鳳去串內不遠, 予則老矣, 不復遠行於串內。 後代人君若畋於(延鳳)〔迎鳳〕 , 則必有以畋於串內爲言者。" 卽命更定他所, 乃以安峽平康爲一所, 京畿右道竝令禁私獵; 橫川芳林爲一所, 而楊根廣州豐壤抱川長湍臨江, 亦竝禁私獵。 上又傳旨曰: "陳言內皆以爲, 用楮貨未便, 何以爲之?" 判書、代言等啓曰: "今者楮貨已興用, 而除着稅價, 則何有於行之未便?" 上曰: "用楮貨則着稅價, 不可無也。 前日除稅價, 非永除也, 乃姑停之耳。" 因曰: "與銅錢兼行如何?" 判書、代言等啓曰: "不可以兼行, 用銅錢則當不用楮貨, 而興用錢文。 昔楮貨始用之時, 許令與五升布竝行, 而民不用楮貨, 故中絶其布, 示民不用, 然後興用楮貨。 錢與楮貨之兼行, 亦類此也。" 上曰: "錢楮之兼用, 吾能爲之。 卿等姑以六卿, 而何先發此言, 以聽愚民乎? 兼行之術, 載在古典。" 因出《元史》《杜氏通典》示之, 卽召摠制李玄, 問大明兼行錢楮之法, 仍使言於六曹判書以質之。 於是, 戶曹判書沈溫上錢幣興用啓目。 略曰:

一, 用久陳米豆, 視楮貨之時價, 於鑄鐵每一斤, 給楮貨三張之價之米, 許令貿易。 其外方各官, 亦依此例, 貿易以納。 一, 京外時散各品, 隨品定數收納。 一, 犯罪人家財內, 國用限當外, 以雜物貿易。 一, 自願人鑄鐵三斤納官, 則以二斤所造錢還給。 一, 京外犯罪人收贖, 今後楮貨鑄鐵相半徵納。

上從之, 唯隨品納鐵及贖罪鑄鐵之事, 不允。 一, 除下六十之事, 判書朴信等曰: "此輩事於職事, 而未有廩祿, 莫若限以四百, 而給祿以役之。" 仍進啓目曰:

各領隊長、隊副其各品根隨及土木之役, 一皆蠲免, 選壯實者一千, 以爲定額, 各受防牌, 輪番侍衛, 府兵之良法也。 其革隊長二百三十、隊副五百二十, 初二番祿內, 各品加數, 府尹四、摠制九、僉摠制三、司直六、副司直九、司正十八、副司正十八、三軍近仗八十等, 祿科準計, 餘剩米麥豆布, 可充四百餘人祿俸。 願每一領攝隊長三、攝隊副七, 四十領合四百人差下, 祿俸頒賜, 長番立役。 有府兵去官者, 於攝隊長、隊副中, 擇壯實者充立, 其攝隊長、隊副遷轉之闕, 於婢妾子及稱干稱尺中, 擇壯實者充立。 各司都目, 爲頭吏典、皂隷、螺匠、所由等, 隊長、隊副去官人, 竝於攝職差下。 如此則祿俸不加, 而府兵實; 各處差備有實, 而補充軍遷轉之路, 亦不闕矣。 各品婢妾子及稱干稱尺人, 竝令推考, 補充軍施行, 奉足定給, 分番立役。 都摠制以下各陪及不得已營繕等事, 臨時承命, 酌量定給。

從之。

一, 漕轉之事, 莫若私船給稅而轉運也。 何則? 今夏敗船之時, 私船之敗居一, 而軍船之敗居多, 以私船人便習舟楫而知其水路也。

六曹擬議以聞, 乃許以私船運米, 而以軍船護送。


  • 【태백산사고본】 13책 29권 43장 B면【국편영인본】 2책 70면
  • 【분류】
    정론(政論) / 왕실-행행(行幸) / 군사-병법(兵法) / 군사-군정(軍政) / 군사-특수군(特殊軍) / 군사-군역(軍役) / 사법-법제(法制) / 금융-화폐(貨幣) / 재정-국용(國用) / 재정-역(役) / 인사-관리(管理) / 교통-수운(水運) / 신분-천인(賤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