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태종실록 27권, 태종 14년 6월 16일 정사 1번째기사 1414년 명 영락(永樂) 12년

노비 소송 건수가 많이 밀리자 변정 도감의 업무를 재개토록 명하다

변정 도감(辨正都監)을 부활(復活)하여 결송(決訟)하였다. 임금이 편전(便殿)에서 의정부(議政府)의 여러 경(卿)들을 인견(引見)하고 말하였다.

"가뭄을 걱정하여 비오기를 비는 것은 말절(末節)이다. 내가 행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백성들이 재해(災害)를 입는 것을 돌이켜 생각하는데도, 도리어 내가 하늘을 두려워 하지 않고 백성에게 뜻이 없다고 하는 까닭으로 뜻을 굽혀서 이를 행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남재(南在)가 대답하였다.

"상림(桑林)167) 의 기도(祈禱)는 전(傳)의 기록에 있고, 신(神)에게 거행하지 않음이 없다는 글이 여러 시아(詩雅)에 보입니다. 재해(災害)를 만나서 기도하는 것은 이제부터의 일이 아닙니다."

임금이 웃으며 말하였다.

"영의정(領議政)은 일찍이 말하기를, ‘탕(湯)임금이 7년 동안 가뭄이 있었을 때 어찌 비를 빌지 않았겠습니까? 곧 천수(天數)일 뿐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이치(理致)가 있다. 그러나 인군(人君)에게 맡겨진 기수(氣數)는 그렇지 않다."

또 참찬(參贊) 유정현(柳廷顯)에게 이르기를,

"변정 도감(辨正都監)에 소장[所志]을 정장(呈狀)한 것이 얼마나 되는가?"

하니 대답하였다.

"1만 2천 7백 97장인데, 그 중에서 1백 장을 보니, 물리칠 수 있는 것이 거의 2,30장이었습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거의 3천 장에 이를 것이고, 수리(受理)할 것도 또한 1만장을 내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도감(都監)은 모두 15방(房)인데, 한달에 방(房)마다 각각 10장씩 판결하니, 이것으로써 계산하면, 또한 1년에 끝마칠 수가 없습니다."

임금이 웃으며 말하였다.

"이것을 어찌할 것인가? 내가 근래 한년(限年)에 구애되어 결망(缺望)함이 없지 않았던 까닭으로 특별히 이를 위하여 경장(更張)한 것이니, 어찌 그것이 1만여 장(張)에 이를 정도로 많으리라 생각하였겠는가? 태조(太祖)가 또한 일찍이 이를 염려하여, 다 당시 전득(傳得)한 자에게 한결같이 붙이고자 하였는데, 나는 이편이 얻고 저편이 잃으면 한편의 탄식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중분(中分)하라고 특별히 명하여 쌓인 폐단을 일소(一掃)하려고 하였다. 그 사이에 헌책(獻策)을 다시 바꾸어 자기에게 편리함을 구하는 경향이 드디어 널리 만연(蔓延)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 한결같이 전년(前年) 9월의 법령(法令)에 의하여 일체 중분(中分)하는 것도 또한 가하지 않겠는가?"

모두 말하였다.

"대단히 좋습니다."

유정현(柳廷顯)이 노비 문적(奴婢文籍)을 판결하는 대로 곧 불태우기를 청하니, 하윤(河崙)이 안색을 변하여 말하였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곧 도감 원리(都監員吏)들이 즐겨 마음을 다해 바르게 결절(決絶)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니, 사람들 가운데 억울함을 당한 자가 유사(攸司)에 고(告)하고자 하여도 또한 길이 없을 것입니다. 신(臣)은 판결을 끝내고 일을 파한 후에 그것을 불사르는 것이 편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유정현(柳廷顯)이 난색을 표하니, 하윤이 숙시(熟視)하면서 말없이 있었다. 임금이 하윤에게 이르기를,

"경(卿)이 말한 바와 같이 하면 또 1만여 인이 다시 오결(誤決)이라고 정장(呈狀)하려고 할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끝날 때가 있겠는가? 바로 도관(都官)에 환부(還付)하라."

하니, 하윤이 말하였다.

"그칠 수 없다면 끝내기를 청합니다. 한 가지 일을 결절(決絶)한 후에 양인(兩人)의 공초(供招)를 받고 불사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유정현이,

"강자(强者)가 빼앗기면 어찌 즐겨 공초(供招)를 바치겠습니까?"

하니, 하윤이 말하였다.

"마땅히 상지(上旨)와 같이 하여야 합니다."

의논이 드디어 결정되었다. 변정 도감(辨正都監)으로 하여금 다시 청송(聽訟)하게 하고, 대간(臺諫) 1원(員)이 참결(參決)하도록 명하였으며, 5방(房)에 각각 3원(員)을 더 두기로 하였다. 이어서 하지(下旨)하였다.

"이제 중외(中外)에 정한 날짜에 노비 쟁송(奴婢爭訟)의 사건을 접장(接狀)하여, 일찍이 내린 교조(敎條)로써 전례(前例)에 의거하여 중분(中分)하라. 매번 나오는 결절(決絶) 사연을 계문(啓聞)한 후에 양쪽의 문권(文券)을 곧 불태워 버리고, 기타 노비(奴婢)와 병부(幷付)한 문자(文字)와 화명(花名)을 기록한 문안(文案)은 각각 별도로 만들어 준 후에 아울러 불태워버리라."

유정현이 친히 왕지(王旨)를 품(稟)하였다.

"1. 오결(誤決)한 관원(官員)은 도감(都監)에서 추고(推考)하지 말고, 모원(某員)이 모관(某官)으로 되었을 때 오결하였다는 것을 헌부(憲府)에 이문(移文)할 것.

1. 중분(中分)할 때 행할 만한 일의 조건을 게시(揭示)하여 알리고, 원고와 피고가 모두 경중(京中)에 있는 경우는 금월(今月) 17일에 결절(決絶)을 시작할 것.

1. 계사년 9월 초1일 이후 각사(各司)에서 중분(中分)한 사건으로 문자(文字)를 위조한 정상(情狀)이 명백하여 이미 관문(官文)이 이루어진 경우는 한년(限年)에 정장(呈狀)하지 못한 것과 한쪽에 중분(中分)한 명문(明文)이 없는 것은 바른 대로 따라서 결절(決絶)할 것.

1. 도감(都監)에서 이미 결절(決絶)한 사건으로서 중분(中分)이 한당(限當)168) 한 것은 아울러 중분할 것.

1. 한년(限年) 및 계사년 9월 초1일 이전에 서로 송사(訟事)를 정장(呈狀)하지 못한 것과 결절(決絶)한 후에 오결(誤決)을 장장(呈狀)하지 못한 것은 논하지 말 것."


  • 【태백산사고본】 12책 27권 44장 A면【국편영인본】 2책 22면
  • 【분류】
    신분-천인(賤人)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재판(裁判) / 왕실-국왕(國王) / 과학-천기(天氣)

  • [註 167]
    상림(桑林) : 은(殷)나라 탕(湯)임금이 7년 동안 가물었을 때 비를 빈 곳.
  • [註 168]
    한당(限當) : 중분(中分)하기로 결정하여 그 기한이 당도한 것.

○丁巳/復辨正都監決訟。 上御便殿, 引議政府諸卿曰: "憂旱禱雨, 是末節也。 予欲不行, 顧念, 斯民之被災者, 反謂予不畏天而無志於民, 故屈意爲之耳。" 左議政南在對曰: "桑林之禱, 載在傳記; 靡神不擧, 見諸《詩雅》, 遇災而禱, 非自今也。" 上笑曰: "領議政嘗言: ‘有七年之旱, 豈不禱雨? 直天數耳。’ 此言有理。 然人君委之氣數, 不可也。" 又謂參贊柳廷顯曰: "於辨正, 呈所志者幾許?" 對曰: "一萬二千七百九十七張。 就中見百張, 可退者率二三十。 以是類推, 則幾至三千, 受理者亦不下一萬。 都監共十五房, 月決房各十張。 以此計, 亦非一歲之所能畢也。" 上笑曰: "爲之奈何? 予近以拘於限年, 不無缺望者, 故特爲之更張, 豈料其多至萬餘? 太祖亦嘗慮此, 盡欲一付時得者。 予則以爲, 此得彼失, 不無向隅之嘆, 特命中分, 以掃積弊。 其間更迭獻計, 求便於己, 遂至蔓延耳。 今欲一依前年九月之令, 一切中分, 不亦可乎?" 僉曰: "甚善。" 廷顯請奴婢文籍隨決隨焚, 河崙作色曰: "若此則都監員吏不肯用心正決, 而人之受屈者, 欲告攸司, 亦無由矣。 臣以爲, 畢決罷事, 然後焚之, 是爲便。" 廷顯難之, 熟視默然。 上謂曰: "如卿所言, 又欲萬餘人再呈誤決乎? 若爾則安有畢時? 直還付都官。" 曰: "無已則請畢決一事之後, 取兩人供招而焚之若何?" 廷顯曰: "强者見奪, 豈肯納招乎?" 曰: "宜如上旨。" 議遂定, 令辨正都監復聽訟, 命臺諫一員參決, 加置五房各三員。 乃下旨曰: "今中外定日, 接狀奴婢爭訟事, 以曾降敎條, 依前例中分。 每出等決絶辭緣啓聞後, 兩邊(文卷)〔文券〕 輒燒之; 他奴婢幷付文字花名立案, 各別成給後幷燒之。" 柳廷顯親稟王旨:

一, 誤決官員, 勿令都監推考, 以某員爲某官時誤決, 移文憲府。

一, 中分時可行事件, 牓示知會。 元隻俱在京中者, 始於今月十七日決絶。

一, 癸巳九月初一日以後, 各司中分事, 僞造文字, 情狀明白, 已成官文者、限年未呈者、一邊無明文中分者, 從正決絶。

一, 都監已決絶事, 中分限當者, 竝中分。

一, 限年及癸巳九月初一日以前未呈相訟事及決後誤決未呈者, 勿論。


  • 【태백산사고본】 12책 27권 44장 A면【국편영인본】 2책 22면
  • 【분류】
    신분-천인(賤人)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재판(裁判) / 왕실-국왕(國王) / 과학-천기(天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