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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26권, 태종 13년 8월 6일 임자 4번째기사 1413년 명 영락(永樂) 11년

동북면 천호 등이 민호를 사사로이 사역하는 것을 없애다

동북면(東北面) 천호(千戶) 등이 관하(管下) 민호(民戶)를 사사로이 사역(使役)시키는 것을 파(罷)하여 없앴다. 정부에서 아뢰었다.

"동북면에 와서 사는 향화인(向化人) 가운데 천호(千戶) 김고시첩목아(金高時帖木兒)의 관하인 이구대(李求大)최야오내(崔也吾乃)의 관하인 김양용(金良龍) 등 7인이 고하기를, ‘옛날 원조(元朝)에 있을 때 각각 모물(毛物)279) ·응자(鷹子)를 제소(帝所)에 공납하였습니다. 이제는 의(義)를 사모하여 와서 거주하는데, 천호(千戶) 등이 사역시키기를 노예같이 하니 그 고역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바라건대, 다른 군인의 예에 의하여 사역시켜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생각건대, 이 사람들은 귀화(歸化)한 지 여러 해이니, 그 청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땅히 윗항의 천호(千戶)와 기타 천호의 자손 가운데 2품 이상에게는 봉족(奉足) 10명을 주고, 4품 이상에게는 5명을 주고, 6품 이상에게는 4명을 주고, 백성(百性) 정군(正軍)이면 2명을 주는 것으로써 항식(恒式)을 삼으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여직(女直) 유종(遺種)의 조선(祖先)이 ‘이언 천호(伊彦千戶)’·‘이언 백호(伊彦百戶)’280) 라고 칭하고 원조(元朝)에 투항하여 붙어서 그 소부(所部)를 ‘관하 백성(管下百性)’이라고 칭하였다. 우리 조선(朝鮮)이 개국한 이후로 의(義)를 사모하여 향화(向化)한 지 햇수가 이미 오래 되었으나 옛 그대로 역사(役使)시켰는데, 많이 점유한 자는 1백 수십 인이었고, 또 동북면의 토호(土豪)가 백성들을 사적으로 점유하여 노예같이 여기고 부자(父子)가 서로 전(傳)하니 그 폐단이 매우 컸었다. 비록 왕실(王室)에 있는 자도 또한 양민(良民)을 ‘가별초(家別抄)281) ’라고 불렀는데, 임금이 그 불가함을 깊이 알고 신묘년에 가별초를 다 없애어 관군(官軍)으로 삼으니, 종실(宗室)이 모두 보고 감격하여 이를 혁거(革去)하였다. 오로지 도총제(都摠制) 이화영(李和英)만은 이지란(李之蘭)의 아들인데 오히려 혁거(革去)하지 않으니, 이때에 이르러 불러서 일렀다.

"동북면의 양민(良民)이 이미 공역(公役)도 하고, 또 사역(私役)도 하니 곤고(困苦)하기가 심하다. 비록 세전(世傳)이라고 하더라도 의리상 실로 미편하다. 그러므로 환왕(桓王)282) 이전부터 점유한 별초(別抄)를 내가 이미 혁거하였다. 나도 또한 자손을 위한 계책이 없겠는가마는 다만 법으로 불가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나라에서 항상 이를 혁거하고자 하였으나, 나는 경을 어렵게 여겼다. 그러나, 경은 반드시 왕실을 마음에 두니, 어찌 이것을 가지고 괘념하겠는가? 또 이제 중국에서 변(變)이 있으니, 마땅히 그 백성들을 관군에 속하게 하여야 한다. 내가 속마음과 겉마음이 다르지 않으니 경을 어찌 의심하겠는가! 그러나, 경은 노모(老母)가 동북면에 있으니, 백성이 없을 수도 없다. 백성 가운데 사역할 만한 자는 모조리 그 이름을 아뢰면 내가 장차 하지(下旨)하여 경에게 속(屬)하게 하겠다."

이화영이 말하였다.

"신이 사역하는 바는 거의 50인인데, 신은 이에 의뢰하지 않아도 오히려 살 수가 있습니다. 다만 노모(老母)가 그곳에 계셔서 아버지가 죽기 전에도 오히려 서울에 살지 않았는데, 하물며 지금 80이 되어 어찌 감히 서울에 오겠습니까? 성상께서 신의 노모를 염려하여 법령을 무릅쓰고 백성을 주시니, 신이 비록 완악(頑惡)하고 우매(愚昧)하나 감히 감격함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검교 한성 윤 주인(朱仁)·강구(姜具)도 또한 동북면에 양민(良民)을 많이 점유한 자인데, 중국에 변이 있으면 형세가 야인과 서로 내통할까 염려하여, 이에 소환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26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1책 681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역사-고사(故事)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재정-역(役)

  • [註 279]
    모물(毛物) : 모피(毛皮).
  • [註 280]
    여직(女直) 유종(遺種)의 조선(祖先)이 ‘이언 천호(伊彦千戶)’·‘이언 백호(伊彦百戶)’ : 여진어(女眞語)로 irgen은 백성을 의미하는데, 이를 이언(伊彦)또는 일언(逸彦)이라 표기하였음. 《태조실록(太祖實錄)》 제1권을 보면 ‘여진은 백성을 일언(逸彦)이라고 한다.’고 하였음. 따라서 ‘이언 천호’·‘이언 백호’는 여진 민호(民戶)의 천호·백호라는 뜻임.
  • [註 281]
    가별초(家別抄) : 향화(向化)한 여진의 대소 추장이 조선의 군민(軍民)으로 편입하는 것을 막고 그대로 자기 휘하에 두고서 사역시키던 ‘관하 백성(管下百姓)’. 1411년 신묘년에 모두 조선의 민호(民戶)로 편입하여, 여진의 토호(土豪) 세력을 억압하였음. 일명 가별치(加別赤).
  • [註 282]
    환왕(桓王) : 환조(桓祖).

○罷革東北面千戶等私役管下民戶。 政府啓: "東北面來接向化人千戶金高時帖木兒管下李求大崔也吾乃管下金良龍等七人告曰: ‘昔在朝, 各以毛物鷹子, 貢于帝所, 今者慕義來居, 千戶等役之如奴隷, 不堪其苦。 願依他軍例役之。’ 臣等以爲此人等, 歸化有年, 不可不從其願, 宜將上項千戶及其他千戶子孫內二品以上, 給奉足十名, 四品以上五名, 六品以上四名, 百姓正軍則給二名以爲式。" 從之。 (女直)〔女眞〕 遺種, 祖先稱爲伊彦千戶百戶, 投附朝, 稱其所部爲管下百姓。 自我開國以後, 慕義向化, 年紀已久, 因循役使, 多占者以百數。 又東北面土豪, 私占百姓如奴隷, 父子相傳, 爲弊甚鉅, 雖在王室, 亦以良民, 號爲家別抄。 上深知其不可, 於辛卯年, 盡去家別抄爲官軍, 宗室皆觀感而革之, 唯都摠制李和英, 之蘭之子也, 尙不革去。 至是, 召謂之曰: "東北面良民, 旣爲公役, 又爲私役, 困苦甚矣。 雖曰世傳, 義實未安, 故自桓王以前所占別抄, 予旣革之。 予亦豈無子孫計哉? 但法有不可耳。 國家常欲革之, 予以卿爲難之。 然卿必以王室爲心, 豈以此爲念哉? 且今上國有變, 宜以其民屬於官軍。 予無內外心, 卿豈有疑? 然卿有老母在於東北, 不可無民, 民之可役者, 悉以名聞, 予將下旨, 以屬于卿。" 和英曰: "臣之所役, 將五十人矣。 臣不賴此, 尙可得生, 但有老母在耳。 父之未死, 尙不居京。 況今耄矣, 安敢來京? 上慮臣老母, 冒法給民, 臣雖頑愚, 敢不知感!" 檢校漢城尹朱仁姜具, 亦東北面多占良民者也。 慮上國有變, 則勢與野人相通, 乃召之。


  • 【태백산사고본】 11책 26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1책 681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역사-고사(故事)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재정-역(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