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김효손 등이 환왕 비문을 고치도록 건의하다
사헌 집의(司憲執義) 김효손(金孝孫) 등이 환왕(桓王) 비문(碑文)을 고치도록 청하였다. 소(疏)는 이러하였다.
"신 등이 엎드려 환왕의 산릉 비본(山陵碑本)을 보니, 말하기를, ‘왕은 모두 삼취(三娶)를 하였다. 의비(懿妃)가 또 1녀(女)를 낳으니 삼사 좌사(三司左使) 조인벽(趙仁璧)에게 시집갔고, 이씨(李氏)가 아들을 낳으니 이원계(李元桂)라 하는데, 전조(前朝)에 벼슬하고 완산군(完山君)으로 봉(封)하였으며, 김씨(金氏) 정안택주(貞安宅主)가 아들을 낳으니 화(和)라 하는데, 의안백(義安伯)에 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읽다가 이에 이르러 실색(失色)하고 경혹(驚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씨·김씨라고 함은 곧 환왕의 첩(妾)입니다. 그 존비(尊卑)의 분수는 갓[冠]과 신[履]이 서로 떨어져 있음과 같아 동년(同年)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인데도 ‘모두 삼취(三娶)를 하였다.’하고, 또 이씨(二氏)164) 로써 의비(懿妃)를 이어 따로 이를 서술함은 명분을 어지럽히고 실지를 없앰이므로 믿음을 장래에 전하는 소이(所以)가 아닙니다. 또 북방(北方)은 왕의 자취가 터잡은 곳이고, 환왕이 돌아가신 것은 지정(至正) 경자년임을 기구(耆舊)165) 와 유민(遺民)166) 의 눈으로 본 자가 아직도 살아 있는데, 어찌 거짓된 글을 돌에 새겨 만세(萬世)에 밝게 보일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유의(留意)하소서."
임금이 이를 두루 보고, 궁중에 머물러 두고 내려 보내지 아니하였다. 헌사(憲司)에서 다시 상소하여 이를 청하니, 또 궁중에 머물러 두고 내려 보내지 아니하고 대사헌(大司憲) 윤향(尹向)을 불러 말하였다.
"경(卿)이 상서(上書)하여 삼취(三娶)란 글을 고치라고 청했으나, 저 사람들은 본래 부터 이치를 알지 못하니, 갑자기 그 글을 삭제케 하면 감연(欿然)167) 히 원망할 것이다. 내가 대의(大義)로써 결단할 것이니, 경은 다시 말하지 말라."
윤향이 대답하였다.
"환왕(桓王)의 자손으로 단지 즉위한 임금만 기록하면 저들이 반드시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임금이,
"단지 후세에 존비(尊卑)를 분변하지 못하여 왕실(王室)에서 훈동할 뿐이나, 이제 만일 이것을 삭제하면 그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하고, 이를 하윤(河崙)에게 물으니, 하윤이 대답하였다.
"정파(正派)로써 고쳐 기록하면 비록 명언(明言)168) 한다 하더라도 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25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1책 670면
- 【분류】역사-사학(史學) / 왕실-종친(宗親) / 정론-정론(政論)
- [註 164]이씨(二氏) : 이씨·김씨.
- [註 165]
기구(耆舊) : 늙은이와 옛 친구.- [註 166]
臣等伏覩桓王山陵碑本, 曰: "王凡三娶, 懿妃又生一女, 適三司左使趙仁璧。 李氏生男曰元桂, 仕前朝, 封完山君。 金氏 貞安宅主生男曰和, 封義安伯。" 臣等讀至於此, 不能不失色而驚惑也。 其曰李氏、金氏者, 乃桓王妾也。 其尊卑之分, 若冠履之相隔, 不可同年而語也。 曰凡三娶, 又以二氏繼懿妃而別敍之, 亂名沒實, 非所以傳信於將來。 且北方, 王迹所基, 桓王之薨, 在至正庚子, 耆舊遺民之目覩者, 猶有存焉, 豈可以誣僞之文, 勒之於石, 昭示萬世乎? 伏望殿下留意焉。
上覽之, 留中不下。 憲司後上疏請之, 又留中不下, 召大司憲尹向曰: "卿上書請改三娶之文, 然彼人等本不識理, 遽削其文, 則欿然生怨矣。 予斷以大義, 卿勿復言。" 向對曰: "桓王子孫, 只以卽位之主記之, 則彼必不怨矣。" 上曰: "只以後世未辨尊卑, 混於王室耳。 今若削之, 則其誰不知!" 訪諸河崙, 崙對曰: "以正派改紀, 則雖明言之, 無傷也。"
- 【태백산사고본】 11책 25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1책 670면
- 【분류】역사-사학(史學) / 왕실-종친(宗親) / 정론-정론(政論)
- [註 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