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 우빈객 이내가 동궁을 본궁 가까이에 짓도록 건의하다
세자 우빈객(世子右賓客) 이내(李來)가 상서하였다. 대략은 이러하였다.
"신은 지극한 은혜를 입어 외람되게 훈맹(勳盟)에 참여하였고, 또 말학(末學)으로 욕되게 서연(書筵)에 참여한 지 이제는 8년이나 되매, 밤낮으로 조심하오나 아직 조금도 도움됨이 있지 못하였습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저부(儲副)298) 를 배양하는 방법이 어찌 한갓 경전(經傳)만 강명(講明)하는 것뿐이겠습니까? 문왕(文王)이 세자가 되어서는 하루에 세 번씩 뵙고, 시선(視膳)299) 하며 문안(問安)드렸는데, 친히 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대개 효도란 백행(百行)의 근원이므로 능히 자식된 직분을 다한 뒤에야 임금이 도리를 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세자가 천성이 예명(睿明)하고, 즙희(緝熙)의 학문도 날로 성취하여 그치지 아니하나, 궁저(宮邸)가 대궐에 가깝지 못하여 반드시 의위(儀衛)를 갖추고서야 행차하게 되는 까닭에 어쩌다가 하루에 세 번 뵈옵는 예[三朝之禮]를 빠뜨리는 때도 있으나, 어찌 아들 된 도리에 결함이 있지 아니하겠습니까? 또 호의를 갖추고 예궐(詣闕)한 뒤에는 혹은 날이 늦고 혹은 편치 못하여 항상 정강(停講)하시니, 이것도 작은 실수가 아닙니다. 신이 또 일찍이 중국에 봉사(奉使)하여 친히 문화전(文華殿)이 좌순문(左順門) 밖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황제가 봉천문(奉天門)으로 거둥하면, 태자는 걸어서 이르러 정사(政事)를 듣는 데 참여하고 상주(上奏)의 일이 끝나면 전(殿)으로 들어가 문안하고 돌아와 강연(講筵)에 나아갔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동궁(東宮)이 대궐에 가깝지 못한 것은 실로 미편(未便)합니다. 하물며 앞에는 여염(閭閻)이 막았고, 담장[垣墻]도 드러났으니, 또한 존귀한 이가 거처할 곳이 못됩니다.
신은 원컨대, 따로이 한 궁(宮)을 짓되 대궐에 가깝게 하여 매일 이른 아침이면 입전(入殿)하여 문안하게 하소서. 또 조계(朝啓)에도 참여하여 국정(國政)을 듣고, 서연(書筵)으로 환어(還御)하여 강(講)을 마치면, 가까이 좌우에 모시면서 감화(感化)를 지켜보면 자식 된 직분을 극진히 할 뿐만 아니라, 안일(安逸)에 흐르지 않을 것입니다. 또 때때로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점시(點視)하게 하여 예(禮)를 따르지 않음이 있으면, 서연관(書筵官)·경승부(敬承府)300) 와 집사 내수(執事內竪)에게 엄중히 죄책을 가하면, 공경하여 꺼리는 바가 있어서 반드시 비례(非禮)의 일이 그 사이에 행해질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은 진실로 전하께서 민력(民力)을 중용(重用)하여 토목 공사를 좋아하지 않으심을 알고 있으나, 그러나 서로 다 붙지않게 되면 이의 몇 가지 일에도 형세가 능히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아! 한 나라의 보배는 마땅히 한 나라를 위하여 아껴야 하므로 구구함을 견디지 못하여 감히 이로써 말씀 올립니다."
임금이 이를 보고 말하였다.
"만약 학문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비록 한 궁궐 안에 같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어찌 하겠느냐? 또 장년(壯年)의 나이이다. 만약에 늘 사람으로 하여금 정찰하게 한다면 어찌 서로가 해침이 없겠느냐?"
이내가 비록 경계를 하였으나, 조금도 변함없이 밤낮으로 군소(群少)와 같이 하지 못하는 것이 없이 하므로 이를 아뢴 것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24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1책 656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경연(經筵) / 역사-고사(故事) / 정론-정론(政論)
- [註 298]저부(儲副) : 세자.
- [註 299]
시선(視膳) : 공식(供食)에 조루(粗漏)함이 없도록 유의함.- [註 300]
경승부(敬承府) : 태종(太宗) 2년 5월에 세자전(世子殿)을 공궤(供饋)하기 위하여 특별히 설치한 관청. 태종 18년 6월에 양녕 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가 폐세자(廢世子)되자 순승부(順承府)로 바뀌었음.○世子右賓客李來上書。 略曰:
臣荷至恩, 濫與勳盟, 又以末學, 得忝書筵, 今已八年, 夙夜(祇)〔祗〕 懼, 未有毫補。 竊惟培養儲副之道, 豈徒在於講明經傳而已? 文王爲世子, 一日三朝, 視膳問安, 無不親之者, 蓋孝爲百行之源, 能盡子職, 然後可以盡君道也。 今我世子, 天性明睿, 緝熙之學, 日就未已, 然宮邸不近於闕, 必備儀衛乃行, 故或曠日廢三朝之禮, 豈不有虧於子道? 且備衛詣闕之後, 或因日晏, 或因未寧, 常常停講, 是亦非小失也。 臣又嘗奉使上國, 親見文華殿在左順門之外, 每朝帝御奉天門, 太子步至, 與聞政事, 奏事畢, 則入殿問安, 還御講筵。 以此而觀, 東宮之不近於闕, 實爲未便。 矧前壓閭閻, 垣墻淺露, 亦非尊貴所居之地也。 臣願別營一宮, 令近于闕, 每日早朝, 入殿問安, 又於朝啓, 與聞國政, 還御書筵講訖, 昵侍左右, 觀(贍)〔瞻〕 感化, 則非特能盡子職, 所其無逸矣。 又時使中官點視, 有不循禮者, 書筵官、敬承府及執事、內竪, 嚴加罪責, 則有所敬憚, 必無非禮之事, 得行於其間矣。 臣固知殿下重用民力, 不好土木, 然不密邇, 則於此數事, 勢有所不能者矣。 嗚呼! 一國之寶, 當爲一國惜之, 故不勝區區, 敢以是爲言。
上覽之曰: "若不好學, 則雖同一宮, 爲之奈何? 且年已壯矣, 若常使人偵察之, 則豈不相夷乎?" 來雖進警戒, 略不小變, 日夜潛與群小靡所不爲, 故陳之。
- 【태백산사고본】 10책 24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1책 656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경연(經筵) / 역사-고사(故事) / 정론-정론(政論)
- [註 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