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문관 제학 변계량에게 돈화문 누각의 종명을 짓도록 명하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돈화문(敦化門) 누각의 종명(鐘銘)을 짓게 하였다. 그 글은 이러하였다.
"금상(今上) 13년 겨울 10월 일에 유사(攸司)에 명하여 종(鍾)을 주조하여 궁문(宮門)에 달게 하시니, 대개 고제(古制)를 따름이라, 공덕을 새기고 또 군신(群臣)의 조회하는 기회를 엄하게 하는 까닭이 됩니다. 위대하도다! 생각하건대, 태조 강헌 대왕(康獻大王)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이미 훈덕(勳德)이 높으심에 인심(人心)이 날로 돌아와 붙었으나 참소[讒]를 얽어대는 말이 비등하여 화란의 조짐을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마침 제릉(齊陵) 곁에서 여막을 사시다가 일이 급함을 듣고, 곧 오시어 기미(幾微)에 응해 제재하시고, 드디어 훈친(勳親)이 창의(倡義)하여 추대함으로써 대업(大業)을 세우셨습니다. 그 뒤 간신(奸臣)이 다시 난(亂)을 꾸미는 자 있었으나, 우리 전하께서 즉시 평정하여 사직(社稷)을 안전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시니, 덕이 이보다 더 성함이 없고, 나라를 열고 사직을 정하시니 공이 이보다 큼이 없으므로, 진실로 종(鍾)과 정(鼎)에 명(銘)을 새겨 만세에 보이심이 마땅합니다. 즉위하신 이래 하늘을 공경하고 대국을 섬기시어 다시 제명(帝命)을 받으심으로써 조상의 공훈을 빛나게 하시고, 성학(聖學)192) 이 계속하여 밝음에 지극하여서 다스림이 융성함에 이르렀습니다. 신종(愼終)193) 과 보본(報本)194) 하는 정성과 백성을 사랑하고 만물을 기르시는 어지심에 이르러서는 상경(常經)을 세우고 강기(綱紀)를 펴신 넓은 규모와 큰 책략이 모두 다 백왕(百王) 위에서 높이 나왔습니다. 이제 또 특명으로 종을 달게 하심으로써 새벽과 밤의 한계를 엄히 하시니, 자강불식(自彊不息)195) 하고 서정(庶政)에 부지런히 힘쓰심으로써 만세의 태평(太平)에 기초를 잡으신 까닭이 지극하고, 유택(流澤)이 길고 해를 지남이 오래이기에 마땅히 이 종(鍾)과 같이 한없이 내려갈 것은 틀림없습니다. 아! 성하도다! 또 그 꾀를 내고 힘을 바쳐 공훈의 맹세에 참가한 사람들도 모두 뒤에다 새겨 이를 불후(不朽)에 전함이 옳겠기에 신(臣) 변계량(卞季良)은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명을 짓습니다."
명(銘)은 이러하였다.
"빛나도다 성조(聖祖)시여! 동토(東土)에 강생하여, 하늘의 경명(景命)196) 을 받아 처음으로 큰 복을 여셨도다. 예전 고려 말년에 정사가 흩어지고 백성이 유리(流離)하매, 하늘이 우리님의 덕을 돌보아 인심(人心)이 돌아왔으나, 이때에 참소하는 사특한 무리가 그 뭇사람의 마음을 좀먹어 우리를 모략함이 너무 급하매, 화란이 아침저녁으로 임박하였도다. 효도롭다 성자(聖子)여! 묘막에서 오시어 신기(神機)를 결정하니, 진실로 어려움이 형통하여 해가 솟아 오르듯 넓게 통하며 크게 빛났도다. 이어서 얼아(孽芽)197) 가 돋아 틈을 타서 위태함에 다라랐으나, 하늘이 태조에게 후(厚)하여 그 후손을 창성하게 하시고 우리님에 이르러 저 여러 악당을 쓰러뜨리니, 여러 어진이가 꾀를 합하고 좌우에서 도우니, 인륜이 크게 펴지고 종사(宗社)가 길고 오래리라. 다시 높은 공을 세움은 실로 우리님이시나, 공이 높되 차지 않고, 덕이 성하되 차지 않으니 천감(天鑑)이 매우 밝아 보우(保佑)를 이에 아뢰었도다. 제명(帝命)이 거듭 이르니, 용위(龍位)를 받음이 이대로다! 금보(金寶)198) 는 빛나고 크기가 말[斗] 같도다. 천총(天寵)199) 이 잦으심은 전고에 으뜸이라. 내 서울로 돌아와서 조무(祖武)200) 를 잘 잇고, 조심조심 효성하여 끝까지 어김 없이 기강을 세우시니 모든 법도 밝아졌도다. 신야(晨夜)를 엄히 하여 이 종을 매달으니, 백사(百司)가 직에 힘써 감히 어김이 없고, 면면(綿綿)한 종묘·사직 천지같이 길고도 오래리라. 내 절하고 명을 지어 무강(無彊)201) 에 보이노라."
호조 판서 한상경(韓尙敬)에게 명하여 이를 쓰게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공신으로 맹세를 위반한 자는, 청컨대, 그 이름을 삭제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역대(歷代) 공신의 선악(善惡)은 모두 전하니 비록 삭제하지 않더라도 가하다."
하였다. 정부에서 맹약을 위반한 자의 명단을 모두 써서 다시 청하니, 임금이
"정도전(鄭道傳)·장지화(張志和)·심효생(沈孝生)·이근(李懃)·신극례(辛克禮) 같은 자는 마땅히 모두 기록하게 하라."
하였다. 정부에서 또,
"종정(鍾鼎)에다 이름을 새기는 것은 만세(萬世)에 밝게 보이심이니, 충성과 간사함이 서로 섞여서는 특히 불가한데, 그 중에서도 신극례는 녹권(錄券)을 거두지 않았으니, 혹시 아울러 기록함이 옳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24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1책 649면
- 【분류】어문학-문학(文學) / 왕실(王室)
- [註 192]성학(聖學) : 유학(儒學).
- [註 193]
신종(愼終) : 상사에 예를 극진히 함.- [註 194]
보본(報本) : 조상의 은혜에 보답함.- [註 195]
자강불식(自彊不息) : 스스로 힘써 쉬지 아니함.- [註 196]
경명(景命) : 대명.- [註 197]
얼아(孽芽) : 요망한 싹.- [註 198]
금보(金寶) : 금으로 만든 어보.- [註 199]
○命藝文館提學卞季良, 製敦化門樓鍾銘。 其文曰:
上之十三年冬十月日, 命攸司鑄鍾懸于宮門, 蓋遵古制, 以銘功德, 且以嚴群臣朝會之期也。 洪惟太祖康獻大王之在潛邸也, 勳德旣隆, 人心日附, 讒(搆)〔構〕 乃騰, 禍機不測。 我殿下方廬齊陵之側, 聞事急乃來, 應幾以制, 遂與勳親, 倡義推戴, 以建大業。 厥後奸臣再有(搆)〔構〕 亂者, 我殿下隨卽平定, 以安社稷。 臣竊惟孝親敬長, 德莫盛焉; 開國定社, 功莫大焉, 誠宜勒銘鼎鍾, 以示萬世矣。 卽位以來, 敬天事大, 再受帝命, 以光祖烈, 聖學極於緝熙, 治効臻於隆盛, 以至愼終報本之誠, 愛民育物之仁, 立經陳紀之宏規大略, 悉皆高出於百王之上矣。 今又特命懸鍾, 以嚴晨夜之限, 其所以自强不息, 克勤庶政, 以基萬世之太平者至矣, 而流澤之長, 歷年之永, 當與此鍾, 同垂罔極也無疑矣。 嗚呼盛哉! 且其騁謀効力, 與於勳盟者, 亦宜悉銘于後, 傳諸不杇〔不朽〕 也。 臣季良謹拜手稽首而爲銘。 銘曰:
皇矣聖祖, 降于東土。 受天景命, 肇開洪祚。 昔在麗季, 政散民離。 天眷我德, 人心有歸。 惟時讒慝, 蠱惑其群。 謀我孔棘, 禍迫晨昏。 孝哉聖子! 來自廬墳。 神機一決, 允也亨屯。 如日之升, 溥暢洪輝。 尋有孼芽, 抵隙圖危。 天厚太祖, 俾昌厥後。 假手我王, 踣彼群醜。 衆賢協謀, 乃左乃右。 彝倫攸敍, 宗社攸久。 再建隆功, 實惟我后。 功崇不居, 德盛不有。 天鑑孔昭, 式申保佑。 帝命荐臻, 時哉龍受。 金寶煌煌, 其大如斗。 天寵之繁, 曠古無右。 我還于都, 克繩祖武。 虔虔孝誠, 終始無違。 之綱之紀, 百度惟熙。 有嚴晨夜, 惟鍾之懸。 百司効職, 罔敢或愆。 綿綿宗社, 地久天長。 臣拜作銘, 用示(無彊)〔無疆〕 。
命戶曹判書韓尙敬書之。 議政府啓曰: "功臣之反盟者, 請削其名。" 上曰: "歷代功臣, 善惡皆傳, 雖不削可也。" 政府悉書反盟者之名, 復請, 上曰: "若鄭道傳、張志和、沈孝生、(李勳)〔李懃〕 、辛克禮, 宜幷錄之。" 政府又言: "勒名鍾鼎, 昭示萬世, 忠邪相混, 殊爲不可。 就中克禮, 不收錄券, 或可幷錄。" 從之。
- 【태백산사고본】 10책 24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1책 649면
- 【분류】어문학-문학(文學) / 왕실(王室)
- [註 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