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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10월 4일 임진 2번째기사 1411년 명 영락(永樂) 9년

심정·박자청을 탄핵하는 소를 사간원에서 올리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소(疏) 3통(通)을 올렸다. 그 첫째는 이러하였다.

"세자(世子)는 나라의 근본이니 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전 명왕(明王)이 세자를 교양(敎養)하는 데 방정(方正)·단량(端良)한 선비를 택하여 사우(師友)를 삼고, 충신(忠信)·돈중(敦重)한 사람을 택하여서 관속(官屬)을 삼은 뒤에야, 견문이 넓어서 지혜가 더욱 밝아지고 심술(心術)이 바르게 되어 덕이 더욱 진보되는 것입니다. 한(漢)나라에서 박망원(博望苑)205) 을 두어 빈객(賓客)을 통하게 하였는데, 강충(江充)206) 이 이단(異端)으로 나와서 마침내 무고(巫蠱)의 화(禍)가 있었고, 진(陳)나라에서 저궁(儲宮)을 세웠는데, 강총(江摠)207) 이 부화(浮華)한 무리로서 나와서 마침내 유련(流連)의 음란을 가져왔으니, 다른 까닭이 아니라 현량(賢良)한 사람을 멀리 하여 배척하고 아첨하는 자를 친근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세자는 타고난 성품이 숙성하여 어질고 효도하여 호학(好學)하였는데, 상호군(上護軍) 심정(沈泟)이 일찍이 좌사위(左司衛)의 직임을 맡아 관속(官屬)의 장(長)이 되어 조석으로 항상 옆에서 아양 부리는 태도로 기이하고 교묘한 일들을 난잡하게 바치니, 신 등은 세자가 음벽(淫僻)한 행동에 동화(同化)될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심정을 파직하여 내쫓아서 간사한 소인들의 아첨하는 풍습을 막으소서."

처음에 심정이 매[鷹]와 기생을 바치어 세자를 즐겁게 하니, 빈객 이내(李來) 등이 헌사(憲司)에 알려 탄핵하고자 하였으나, 심정이 형 심인봉(沈仁鳳)·심종(沈淙)·심온(沈溫)이 모두 권요(權要)가 되었으므로 탄핵하지 못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임금이 소(疏)를 보고 간관(諫官)을 불러 말하기를,

"인군(人君)이 된 자는 간(諫)하는 것을 좇지 않을 수 없고, 간관(諫官)이 된 자는 말을 다하지 않을 수 없으니, 큰 일은 소(疏)를 갖추어 아뢰고 작은 일은 승정원(承政院)에 말하여 진달하게 하라. 지금 심정이 과연 경 등의 말과 같다면, 어찌 한 사람을 아끼겠는가?"

곧 그 직을 파면하였다. 둘째는 이러하였다.

"절약과 검소를 숭상하는 것은 백성을 풍족하게 하고 다스림을 극진히 하는 것입니다. 토목(土木)이 일에 있어서 종묘(宗廟)와 궁궐(宮闕)의 수리는 폐할 수 없지마는, 대지(臺池) 같은 것은 천천히 해도 되는 것으로 급히 할 것이 아닙니다. 지금 공조 판서 박자청(朴子靑)은 본래 재덕(才德)이 없이 성명(聖明)을 만나서 좋은 벼슬에 높이 처하였습니다. 무릇 국가의 영조(營造)하는 사무를 모조리 관령(管領)하여 오로지 조탁(雕琢)하고 영구(營構)하는 것을 힘써서 공역(工役)이 쉬지 않으니, 원컨대, 전하는 살피어 선공(繕工)을 겸판(兼判)하는 직임을 파면하고 임금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자로 대신시키고, 대지(臺池)와 같이 항상 거처하고 거듭하는 것이 아닌 곳은 수리하지 못하게 하여 검소하고 절약하는 것을 보이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박자청이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다만 부지런하고 곧기만 하다. 종묘·사직을 수리하는 일은 내가 모두 명하여 역사를 동독(董督)한 것이다. 어찌 한 몸의 계책을 위하여 이 일을 하였겠느냐? 모화루(慕華樓) 같은 것은 내가 놀고 구경하는 곳이 아니라, 조정 사신을 영접하는 곳이니, 하나는 국가의 체면을 보인 것이고, 하나는 사대(事大)의 성의를 보인 것이다. 본궁(本宮)의 못과 정자 같은 것은 다만 휴식하기 위한 곳이나, 준우(峻宇)·조장(彫墻)에 비할 바는 아니다. 내가 비록 박자청을 파직시키더라도 대신하는 자가 앉아서 보기만 하고 한 사람의 백성도 역사시키지 않겠는가? 경 등은 다시 말하지 말라."

셋째는 이러하였다.

"궁궐은 정령(政令)을 펴고 첨시(瞻視)를 높이자는 것입니다. 경복궁(景福宮)태조(太祖)가 개국하던 초기에 창건한 것인데, 그 규모와 제도가 후세의 법이 될 만합니다. 전하가 여러 해를 거처하지 않으시니, 신 등은 후세에 반드시 본받아서 허기(虛器)를 만들까 두려우니, 그 태조의 창건하신 뜻을 어찌하겠습니까? 원컨대, 시좌소(時坐所)208) 를 삼아서 매양 아조(衙朝) 때 근정전(勤政殿)에 좌기하여 사대부를 두루 인견(引見)하여 신민(臣民)의 바라는 것을 위로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어찌 경복궁(景福宮)을 허기(虛器)로 만들어서 쓰지 않는 것이냐? 내가 태조의 개창(開創)하신 뜻을 알고, 또 지리(地理)의 설(說)이 괴탄(怪誕)한 것을 알지만, 술자(術者)가 말하기를, ‘경복궁은 음양(陰陽)의 형세에 합하지 않는다.’하니, 내가 듣고 의심이 없을 수 없으며, 또 무인년 규문(閨門)의 일은 내가 경들과 말하기에는 부끄러운 일이다. 어찌 차마 이곳에 거처할 수 있겠는가? 조정의 사신이 오는 것과 성절(聖節)의 조하(朝賀)하는 일 같은 것은 반드시 이 궁에서 하기 때문에 때로 수즙(修葺)하여 기울고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또 말하였다.

"세자는 마땅히 학문을 삼가야 하고 일이 없이 게을리 놀아서는 안 되며, 무사(武事)도 또한 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강무(講武)하는 때에 세자로 하여금 따라 행하게 한 것이니, 경 등은 말하지 말라."

사간(司諫) 정전(鄭悛)이 대답하였다.

"임금이 나가면 세자(世子)가 감국(監國)하는 것이 예전 제도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경 등의 말이 옳다. 그러나, 강무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종묘(宗廟)를 위하여 변두(籩豆)209) 를 채우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도중(徒衆)을 사열(査閱)하여 무의(武儀)를 익히는 것이다. 손으로 금수(禽獸)를 쏘고 말을 달려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세자로 하여금 사냥하는 법을 보게 하려는 것이다."

임금이 정언(正言) 김고(金顧)를 편전(便殿)으로 끌어들이어 대면하여 명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듣지 못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9책 22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1책 604면
  •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왕실-종사(宗社) /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친(宗親) / 역사-고사(故事) / 건설-건축(建築)

  • [註 205]
    박망원(博望苑) :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위 태자(衛太子)를 위해서 세운 원(苑). 지금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 북쪽에 그 유지(遺址)가 있음.
  • [註 206]
    강충(江充) :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의 사람. 자는 차청(次倩). 본명은 제(齊). 무제에게 중용(重用)되었으나, 태자(太子)와 사이가 나빠서 태자를 무고하다가 태자에게 죽었음.
  • [註 207]
    강총(江摠) : 진(陳)나라 말엽의 사람. 태자 중사인(太子中舍人)이 되어 날마다 후주(後主)와 유연(遊宴)하고 시작(詩作)을 행하였음. 뒤에 수(隋)나라 때 상개부(上開府)에 벼슬하였음.
  • [註 208]
    시좌소(時坐所) : 시어소(時御所).
  • [註 209]
    변두(籩豆) : 제물을 담는 그릇.

○司諫院上疏三通。 其一曰:

世子, 國之根本, 不可不重也。 故古之明王, 敎養世子, 爲之擇方正端良之士, 以爲師友; 忠信敦重之人, 以爲官屬, 然後聞見博而智益明, 心術正而德益進矣。 置博望, 使通賓客, 而江充以異端進, 卒有巫蠱之禍; 立儲宮, 而江摠以浮華進, 竟致流連之淫, 無他, 踈斥賢良, 親近諂諛故也。 我世子天資夙成, 仁孝好學, 上護軍沈泟, 曾爲左司衛之任, 而居官屬之長, 朝夕常在左右, 乃以嫵媚之態, 雜進奇巧之事, 臣等恐世子化於淫僻之行也。 願將沈泟罷職退黜, 以杜憸小之徒諛佞之風。

初, 進鷹妓, 以娛世子, 賓客李來等, 諷憲司欲劾之, 仁鳳, 皆爲權要, 故不能擧劾。 至是, 上覽疏, 召諫官曰: "爲人君者, 不可以不從諫; 爲諫官者, 不可以不盡言。 大事具疏以聞, 小事言於承政院以達。 今果如卿等所言, 則何惜一人!" 卽罷其職。

其二曰:

崇節儉, 所以裕民而致治也。 至於土木之事、宗廟宮闕之修, 不可廢也, 若臺池則可弛, 而不可亟也。 今工曹判書朴子靑, 本無才德, 遭遇聖明, 卓處膴官, 凡國家營造之務, 悉皆領之, 專務雕琢營(搆)〔構〕 , 工役不休。 願殿下察之, 罷其繕工兼判之任, 以有愛君愛民之心者代之; 其臺池非常御幸處, 勿令繕修, 以示儉約。

上曰: "子靑不學, 但勤直。 若宗廟社稷修治之事, 予皆命之董役, 豈爲一身之計而爲是擧也! 若慕華樓則非予游觀之地, 乃迎接朝廷使臣之所, 一以示國家之體, 一以示事大之誠。 若本宮之池亭, 則但爲休息之所, 然非峻宇彫墻之比也。 予雖罷子靑之職, 其代之者, 坐視而不役一民乎? 卿等勿復言。"

其三曰:

宮闕, 所以布政令尊瞻視也。 景福宮, 太祖開國之初所創建, 其規模制度, 可爲後世法也。 殿下曠年不御, 臣等恐後世必効以爲虛器, 於太祖創立之意何? 願爲時坐所, 每於衙朝, 御勤政殿, 延引士大夫, 以慰臣民之望。

上曰: "予豈以景福宮爲虛器而不用? 予固知太祖開創之勤, 且知地理之說之怪誕, 然有術者曰: ‘景福宮, 不合於陰陽之形勢。’ 予聞之, 不能無疑。 且戊寅閨門之事, 予與卿等言之, 可爲羞愧。 安能忍居此地! 若朝廷使命之來及聖節朝賀之事, 則必於此宮, 故以時修葺, 毋令傾圮耳。" 又曰: "世子當愼學問, 不可無事慢游, 然武事亦不可廢也。 今講武之時, 使世子從行, 卿等勿言。" 司諫鄭悛對曰: "君出則世子監國, 古之制也。" 上曰: "卿等之言是也。 然講武, 一以爲宗廟而充籩豆, 一以簡徒衆而習武儀也。 非手擊禽獸而好馳騖也。 予欲使世子, 觀其蒐狩之法耳。" 上引入正言金顧于便殿面命, 人不得聞。


  • 【태백산사고본】 9책 22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1책 604면
  •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왕실-종사(宗社) /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친(宗親) / 역사-고사(故事) / 건설-건축(建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