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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21권, 태종 11년 6월 29일 무오 1번째기사 1411년 명 영락(永樂) 9년

호조참의 이종선을 귀양보내다. 중국에서 보내온 이색의 비문을 둘러싼 논의의 전말

호조 참의(戶曹參議) 이종선(李種善)동래진(東萊鎭)으로 귀양보냈다. 처음에 임군례(任君禮)가 경사(京師)에 조회하였을 때에, 태복 소경(太僕少卿) 축맹헌(祝孟獻)에게서 국자 조교(國子助敎)인 양성(羊城)사람 진연(陳璉)이 제작한 본국(本國)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의 비명(碑銘)을 받아 가지고 와서 〈임금께〉 드리니, 임금이 이것을 보고 좌우(左右)에게 이르기를,

"진연(陳璉)이 어떻게 이색(李穡)의 행사(行事)를 알기에, 그 제작한 것이 이와 같음에 이르렀는가?"

하니, 좌우(左右)가 대답하기를,

"예전에 축맹헌(祝孟獻)이 사신(使臣)으로 왔을 때 이색의 시문(詩文)을 구해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역시 이색의 시문(詩文)을 보았지만, 진연이 시문만 보고서 어찌 제작함이 이와 같음에 이를 수 있겠는가?"

하니, 좌우가 아뢰기를,

"이색의 행장(行狀)을 권근(權近)이 지었는데, 오늘날 진연이 반드시 그 행장(行狀)을 보았을 것입니다."

하였다. 김여지(金汝知)가 아뢰기를,

"임오년105)축맹헌이 왔을 때, 대언(代言) 유기(柳沂)축맹헌과 사이가 좋았으니, 유기는 바로 이색의 아들 이종덕(李種德)의 사위입니다. 아마도 유기가 필시 그 행장(行狀)을 주어 제작해 주기를 청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그때 축맹헌이색의 초고(草藁)만 구한 것을 알 뿐이지, 이색의 행장(行狀)을 얻어간 것은 알지 못하였다. 지금 그 비명(碑銘) 가운데 실린 것이 실정에 지나친 것이 많고, 또 옛날 본국(本國) 사신(使臣)이 간혹 복명(卜命)으로 인하여 틈이 생기게 한 자도 있었거늘, 임군례(任君禮)가 어찌하여 축맹헌과 사통(私通)하여 글을 얻었는가?"

하고, 임군례를 불러 꾸짖기를,

"이 뒤로는 틈이 생길 일은 하지 말라."

하였다. 좌정승(左政丞) 성석린(成石璘)이 진언(進言)하기를,

"이색(李穡)의 자손(子孫)이 중국(中國)과 사통(私通)하여 비명(碑銘)을 지어 달라고 청했으니, 마땅히 죄를 내리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간원(諫院)에서 죄를 청하는 소(疏)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 등이 듣자오니, 대명(大明)의 태복 소경(太僕少卿) 축맹헌(祝孟獻)이 본국(本國)의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의 행장(行狀)을 얻어 가지고, 그 비명(碑銘)을 국자 조교(國子助敎) 진연(陳璉)에게 지어 달라고 청하여, 임군례(任君禮)에게 주어 보냈다고 합니다. 신 등은 가만히 생각건대, 인신(人臣)으로 마땅히 사교(私交)하지 못하게 함은 붕당(朋黨)의 근원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행장(行狀)과 비명(碑銘)이 비록 이색(李穡)의 집안 일이라고는 하나, 그 몸이 양조(兩朝)를 섬겨 행사(行事)의 자취가 국체(國體)에 관계됨이 많습니다. 그런데 전하(殿下)의 명령도 없이 행장(行狀)을 꾸며, 조관(朝官)을 몰래 통하여 비명(碑銘)을 구했으니, 그 까닭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 이종선(李種善)을 탄핵하니, 그의 대답이, ‘지난 임오년에 배주(白州)에 있을 때, 삼촌(三寸) 질녀(姪女)의 남편 유기(柳沂)가 아비의 초고 행장(草藁行狀)을 가지고 축맹헌에게 부탁하여 비명을 구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유기는 이미 죽[物故]었으나, 종선(種善) 같은 자는 처음부터 알지 못한 것도 아닌데, 이것을 바로 아뢰지 아니하였고, 지금 임군례가 왔을 때도 곧 아뢰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오직 그 아비만을 아름답게 꾸미고자 하여 국체(國體)를 돌보지 않고 사교(私交)의 죄를 범한 것이니, 그 조짐(兆朕)을 더 자라게 해서는 안됩니다. 또 임군례는 직책이 통사(通事)로 있으면서 조정(朝廷)에 들어가 들은 바를 숨김없이 천총(天聰)에 상달(上達)하고, 복명(復命)하는 날에 즉시 아뢰지 않고 열흘씩이나 오랫동안 머물러 두었다가, 이제서야 그 비명을 올렸으니, 이것 또한 무슨 마음입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유사(攸司)에 명하시어 그 까닭을 국문(鞫問)해, 후래(後來)를 경계하소서."

하니, 임금이 보고 말하기를,

"목은(牧隱)106) 은 천하의 대유(大儒)이니, 중국(中國)을 통해 그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것이 가하다. 그러나 양촌(陽村)107) 이 지은 행장(行狀)을 지금 자세히 보니, 국체(國體)를 돌보지 않고 오직 목은(牧隱)만을 찬미(讚美)하여, 그 문사(文辭)가 사사 은혜[私恩]로써 의(義)를 가린 곳이 없지 않다. 이것으로 본다면 목은(牧隱)의 제자[門生]와 우리 태조(太祖)의 신하가 각기 병립(竝立)하는 것이다. 그러나 행장(行狀)을 축맹헌(祝孟獻)에게 부탁한 사람인 유기(柳沂)는 지금 이미 죽었으니, 누구를 증거하여 물어 보겠는가? 그리고 이종선(李種善)은 그 아비를 찬미(讚美)코자 하였으니, 이것은 인자(人子)의 마음으로 당연한 일이다. 또 임군례(任君禮)는 몸은 먼저 왔으나, 치중(輜重)108) 이 이르지 아니한 까닭에 보고가 늦은 것이니, 어찌 죄가 있겠는가?"

하였다. 헌납(獻納) 정지당(鄭之唐)이 상언(上言)하기를,

"처음에 유기(柳沂)가 행장(行狀)을 부탁할 때, 이종선(李種善)이 비록 배주(白州)에 있다고는 하나,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임군례(任君禮)는 처음부터 모두 진술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원컨대, 이종선임군례를 즉시 유사(攸司)에 내려 그 까닭을 국문(鞫問)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비명(碑銘)에 태조(太祖)의 국초(國初)의 일을 자세히 말했으니, 인자(人子)가 진실로 어버이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기를 구(求)한다면, 내 어찌 차마 태조(太祖)의 잘못을 들을 수 있겠는가? 오늘은 마침 치재(致齋)하는 날이니, 내일 마땅히 공신(功臣)들을 불러 함께 의논해 결단(決斷)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도경(道經)109) 을 보고 매월 27일에 반드시 재계(齋戒)하였다. 이튿날 임금이 공신(功臣) 의령군(宜寧君) 남재(南在) 등을 불러 말하기를,

"지금 상국(上國)의 진연(陳璉)이 지은 이색(李穡)의 비명(碑銘)을 보고, 또 하윤(河崙)·권근(權近)이 지은 글을 보니, 모두 국초(國初)의 일을 말했다. 권근의 글에 이르기를, ‘이(彝)초(初)의 무리를 〈중국에〉 보낸 것으로 꾸몄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일로 그 당시 신민(臣民)들이 모두 놀랐던 일인데, 지금까지 그 까닭을 알지 못하는 일이다. 권근의 글이 이와 같다면, 이는 허(虛)로써 사실을 삼은 것이니, 사관(史官)이 쓴 글도 잘못된 것이다. 또 이르기를, ‘청주(淸州)에서 문초 받을 때, 공(公)의 정성(精誠)이 하늘을 감동시켜, 산이 무너지고 물이 넘친 변(變)이 있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대개 윤이이초의 일로서, 고황제(高皇帝)께서도 말씀한 바이고, 본국(本國)에서도 떠들썩하였던 일이니, 어찌 거짓이 있겠는가? 또 풍수(風水)의 재변(災變)은 어느 시대나 없는 것이 아닌데, 어찌하여 반드시 이색(李穡)의 일에 감동된 것이겠는가? 또 이르기를, ‘공(公)은 부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공(公)이 벽사(甓寺)에 있었던 일을 내 눈으로 직접 본 바인데, 권근이 어찌 그 진부(眞否)를 알겠는가? 또 이르기를, ‘공양군(恭讓君) 때를 당하여 용사(用事)하는 자들은 공(公)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 것을 꺼려하였다.’고 하였으니, 그때 우리 태조께서는 나라의 수상(首相)이 되었은즉, 모르긴 하지만 용사자(用事者)란 누구를 가리킨 것인지 모르겠다. 권근이 은문(恩門)을 찬미(讚美)하여 후세(後世)에 드러내고자 하여, 그 글이 실정에 지나친 칭찬이 있고, 또 중국 사람을 빌어서 비명(碑銘)을 지어, 허(虛)로써 사실을 삼으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권근의 글은 세상에 성행(盛行)한 지 오랬으니, 공신(功臣)들이 어찌 눈으로 보지 못하였겠는가? 공신(功臣) 된 자는 국가와 더불어 휴척(休戚)을 같이 해야 할 처지인데, 그 일이 태조에게 관계되었는데 어째서 나에게 고하지 아니하였는가? 또 이 글은 장차 후세(後世)에 전하려 함인데, 내가 알고 있는 바로서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사책(史冊)에 실려 있는 것도 반드시 이와 같은 유(類)일 것이다."

하니, 모두 말하기를,

"일찍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보았다면 어찌 감히 고(告)하지 않았겠습니까?"

하고, 모두 두려워하며 함께 진연(陳璉)이 지은 비명(碑銘)과 권근(權近)이 지은 행장(行狀)을 읽고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허사(虛事)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이 글이 간행(刊行)된 지 벌써 오래 되었는데, 후세(後世)에 전하지 못하게 할 방법을 장차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경 등은 물러가서 잘 생각해 보도록 하라. 또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일은 사책(史冊)이 반드시 잘못되었을 것이다. 태조(太祖)의 사기(史記)가 이처럼 잘못되었다면, 오늘날 사기(史記) 또한 어찌 사실이라고 알겠는가? 반드시 모두가 잘못되었을 것이다."

하니, 남재(南在) 등이 아뢰기를,

"그 행장(行狀)을 없애버려 후세(後世)에 전하지 못하게 하시면, 의문(疑問)이 없을 것입니다. 신 등은 생각건대, 행장(行狀)을 지은 자가 죄가 있다고 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은 마땅히 하윤(河崙)권근(權近)이 지은 시문(詩文) 가운데 이 편(篇)만을 제거하도록 하고, 그 나머지 시문(詩文)은 없애지 말라."

하였다. 사헌부에서 또 상소하기를,

"임군례(任君禮)가 상국(上國)에 조회하러 가서, 태복 소경(太僕少卿) 축맹헌(祝孟獻)이 국자 조교(國子助敎) 진연(陳璉)에게 청해 만든 본국(本國)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의 묘지(墓誌)를 사사로이 받아 왔으므로, 지금 그 수수(授受)할 때 서로 주고받은 말, 그리고 처음에 청한 본국인(本國人)의 성명(姓名)과 축맹헌이 지적한, 전해 주고 부탁한 곳을 물었더니, 모두 다 모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상국(上國) 사람이 만든 사장 문서(私藏文書)를, 처음에 청한 사람과 전해 주고 부탁한 곳을 묻지도 않고 갑자기 받아 오기만 할 이치도 없으려니와, 임군례가 비록 축맹헌에게 묻지 아니하였다 하더라도, 축맹헌이 일일이 지적해 말했을 것이니, 이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임군례가 들은 증인(證人)이 없기 때문에 숨길 수 있다고 여겨, 말을 꾸며대고 자복하지 않으니, 진실로 죄가 있습니다. 이종선(李種善)은 대답하기를, ‘묘지(墓誌)를 지어 달라고 축맹헌에게 부탁한 것은 삼촌(三寸) 질녀(姪女)의 남편 유기(柳沂)의 소위(所爲)이고, 나는 배주(白州)에 있었기 때문에 그 연고를 알지 못한다.’고 하나, 청촉(請囑)은 비록 유기가 하였다 하더라도, 자손(子孫)이 되어 후인(後人)에게 자랑스럽게 전할 일가(一家)의 대사(大事)를 어찌 그 자식과 상의도 하지 않고 문득 상국(上國) 사신(使臣)에게 부탁하였겠습니까? 이것은 인정(人情)에 가깝지 않은 일입니다. 더욱이 축맹헌이색(李穡)의 문집(文集)을 유기에게 구할 때, 이종선배주(白州)에서 서울에 들어 왔었으니, 몰래 유기와 더불어 함께 의논하고 〈묘지(墓誌)를〉 저술(著述)해 달라고 청했음이 분명합니다. 다행히 유기가 죽었기 때문에 대질(對質)할 길이 없다고 생각하여, 이를 숨기고 굴복하지 아니하니, 그 죄가 큽니다. 뿐만 아니라 사사로 왕관(王官)과 내통하였으니, 장래에 틈이 생길지 어찌 알겠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가히 한심(寒心)한 일입니다. 임군례이종선은 마땅히 고신(告身)을 거두고 그 까닭을 국문(鞫問)해, 율(律)에 따라 후래(後來)를 경계하소서."

하였으나, 소(疏)를 궁중(宮中)에 머물러 두었다. 의정부(議政府)·대간(臺諫)의 관원 한 명씩을 불러 말하기를,

"전일(前日)에 사헌부(司憲府)에서 이종선(李種善)의 죄를 청한 것은 그 뜻이 무엇 때문이었는가?"

하니, 대사헌(大司憲) 황희(黃喜)가 대답하기를,

"이종선은 나라의 대체(大體)를 돌보지 않고 사사로 왕관(王官)과 통하였으니, 신자(臣子)의 마음이 아닙니다. 청컨대, 고신(告身)을 거두고 사유[情由]를 국문(鞫問)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종선은 성품(性稟)이 본래 혼매(昏昧)한 자이다. 그러므로 사리(事理)를 살피지 못하고 함부로 어버이만 현양(顯揚)하려고 하였을 뿐이다. 경 등이 이종선을 죄주자고 청한 것은 대단한게 못된다. 경 등은 이색(李穡)의 행장(行狀)을 보았는가? 제작한 사람이 만약 살아 있다면, 내 마땅히 이것을 묻겠다. 그 행장(行狀)에 이르기를, ‘이색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았다.’고 하였으나, 태조께서 의(義)를 들어 회군(回軍)하던 날, 술을 보내어 맞이하였으니, 그러고도 두 임금을 섬기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일에 이르러서는 그때 온 나라 사람들이 마음을 썩이던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 일이 이색에게 연급(延及)되어 청주(淸州)에서 문초를 받게 되었는데, 그때 마침 물이 넘치는 재변이 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말하기를, ‘용사(用事)하는 자가 자기를 따르지 않으므로 내쫓았고, 문사(問事)하는 날에 산이 무너지고 물이 넘치는 재변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것이 정말 공(公)의 충성(忠誠)이 하늘을 감동시켜 그렇게 된 것이라면, 주공 원성(周公元聖)110) 이 풍뢰(風雷)의 변괴(變怪)를 감동시킨 것과 같다 할 수 있겠는가? 또 이색(李穡)이 불도(佛道)를 좋아한 일은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며, 벽사(甓寺)의 일은 더욱이 밝게 드러난 일이다. 그런데 말하기를, ‘중[僧]의 무리가 발원문(發願文)을 지어 달라 청하며 나에게 권고(勸告)하므로, 마지못해 응했을 뿐이다.’ 하였으니, 경 등은 과연 그렇다고 여기는가? 옛날에 윤소종(尹紹宗)이색(李穡)을 논하여 말하기를, ‘곡학 아세(曲學阿世)111) 하고 거짓을 꾸며 이름[名]만 낚는 자라.’ 하였으니, 그것이 과연 옳지 아니한가?"

하였다. 황희(黃喜)가 대답하기를,

"신자(臣子)로서 만일 죄가 있다면, 몸이 살았거나 죽었거나를 물론하고 모두 토죄(討罪)하여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권근(權近)에게 물을 만한 죄가 있다면, 어찌 몸이 죽었다하여 그대로 놓아둘 수 있겠습니까? 권근(權近)이종선(李種善)은 비록 한 가지 일인 것 같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구분하여 따로따로 취급해야 합니다. 지금 이종선의 죄가 드러났으니, 먼저 사유[情由]를 물어 본 뒤에야, 그 죄가 반드시 돌아갈 데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종선의 죄를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윤(河崙)이 지은 문정공(文靖公)의 비명(碑銘)을 들여오게 하여 읽어 보니, 권근(權近)이 지은 행장(行狀)과 그 대의(大意)가 서로 비슷하였다. 좌사간 대부(左司諫大夫) 이명덕(李明德)과 사헌 집의(司憲執義) 조치(曹致) 등이 교장(交章)하여 권근하윤의 죄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그대로 머물러 두었다. 그 상소(上疏)에 이르기를,

"신 등이 가만히 보건대, 통사(通事) 선공 소감(繕工少監) 임군례(任君禮)가 가져온 국자 조교(國子助敎) 진연(陳璉)이 지은 본국(本國)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의 묘지(墓誌)는, 이색(李穡)의 행한 일과 세계(世系)를 기록한 것이 매우 주무(綢繆)112) 하였습니다. 이색의 행장(行狀)과 비명(碑銘)을 그 아들인 종선(種善)에게서 추심(推尋)113) 하여 그 발단(發端)과 사유(事由)를 참고해 보았더니, 그 행장(行狀)은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이 엮은 것이고, 그 비명(碑銘)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윤(河崙)이 지은 것이었습니다. 생각을 나타냄[命意]이라던가 문구의 배치[措辭]가 모두 진연(陳璉)이 지은 것과 표리(表裏)가 되어 있습니다.

신 등은 생각건대, 이색(李穡)현릉(玄陵)114) 의 지우(知遇)를 받아 명교(名敎)를 당시(當時)에 세웠고, 지위도 재보(宰輔)에 이르렀었는데, 현릉이 후사(後嗣)가 없음을 당하자, 왕씨(王氏)를 세워 종조(宗祧)115) 를 보전할 계책을 생각하지 않고,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에게 아부하여 신우(辛禑)를 세웠으니, 신우는 배우지 못하고 무도(無道)하여 죄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중국을 침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색은 그 사부(師傅)로서 한 마디도 바른 말을 하여 광구(匡救)하지 못하였고, 우리 태조(太祖)께서 의(義)를 들어 회군(回軍)하던 날에는, 여러 신하들이 우왕(禑王)을 폐하고 왕씨를 세울 것을 의논하였는데, 이색이 또 대장(大將) 조민수(曹敏修)에게 아부하여 우왕의 아들 창(昌)을 세워 좌시중(左侍中)을 얻어 하였으며, 스스로 중국(中國)에 사신(使臣)으로 가서 친히 조회(朝會)하기를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돌아오자 혼자서 우왕(禑王)여흥(驪興)에서 만나보고 다시 맞아들이려 모의하였으나, 마침내 그 계책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그 직책을 외척(外戚)에게 물려주고 생명을 보전(保全)하였습니다. 또 공양군(恭讓君)이 권서(權署)하던 날을 당해서는, 판문하(判門下)의 벼슬을 받아 백관(百官)의 위에 서고도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지목하여 의논하기를, ‘이 사람은 왕씨(王氏)의 신하냐? 신씨(辛氏)의 신하냐?’ 하였으니, 그 반복 무상(反覆無常)하고 속임수가 많은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바입니다.

이색(李穡)의 문인(門人) 하윤(河崙)권근(權近)이 지은 행장(行狀)과 비명(碑銘)에 말하기를, ‘기사년 겨울에 공양군(恭讓君)이 즉위(卽位)하니, 용사(用事)하는 자가 공(公)이 자기를 따르지 않음을 꺼려하여 장단현(長湍縣)으로 내쫓았다.’고 하였으니, 신 등은 생각건대, ‘용사(用事)하는 자가 공(公)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 것을 꺼려했다.’ 함은 누구를 가리켜 한 말이겠습니까? 또 말하기를, ‘경오년 5월에 윤이(尹彝)이초(李初)를 상국(上國)에 보냈다고 꾸며, 공(公) 등 수십 명을 청주(淸州)에 가두어 놓고, 장차 준엄(峻嚴)한 법(法)을 써서 하련(煆鍊)116) 시켜 죄를 만들려고 하였는데, 그때 마침 큰 비가 쏟아져 산이 무너지고 물이 넘쳐 흘러, 성문(城門)과 관사(館舍)가 물에 잠기고, 문사관(問事官)은 나무 위로 올라가 겨우 죽음을 면했으니, 청주(淸州)의 부로(父老)들이 말하기를, 「공(公)의 충성(忠誠)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라.」 하였다.’ 하였으니, 신 등은 생각건대, 윤이이초가 상국(上國)을 속인 것은 이미 명강(明降)117) 이 있으니, 어찌 꾸몄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국가의 대계(大計)를 위하여 어찌 국문(鞫問)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준엄(峻嚴)한 법(法)을 써서 하련(煆鍊)시켜 죄를 만들었다.’고 함은 또 누구를 가리켜서 한 말입니까? 청주(淸州)의 수재(水災)가 이색(李穡)이 과연 주공(周公)과 같은 덕(德)이 있어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까? 또 말하기를, ‘임신년 7월에 우리 태상왕(太上王)이 즉위(卽位)하자, 공(公)을 꺼리는 자가 「공(公)을 죄가 있다.」고 꾸며 극형(極刑)을 가하려고 하였다.’ 하였는데, 신 등은 생각하기를, 우리 태조(太祖)께서 처음부터 나라를 차지하려 생각한 것이 아니고, 왕실(王室)에 충성(忠誠)을 다 하였으나, 이색(李穡)이 그 무리와 더불어 태조를 제거하려고 꾀하매, 그 화(禍)가 헤아리지 못할 지경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충의(忠義)로운 신하들이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태조께〉 돌아온 것이라 여겨, 태조를 추대(推戴)하였으니, 칼날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집[家]을 화(化)하여 나라를 이룬 것입니다. 이것은 우부(愚夫)·우부(愚婦)도 다 아는 사실이니, 어찌하여 죄 없는 사람에게 극형을 가하려 하였겠습니까? 이색의 무리를 외방(外方)에 내쫓은 것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그렇게 시킨 것인데, 그가 이른바, ‘공(公)을 꺼리는 자가 「공(公)이 죄가 있다.」고 꾸며 극형을 가하려고 하였다.’ 함은 또 누구를 가리킨 것입니까?

신 등은 가만히 생각건대, 하윤(河崙)권근(權近)은 모두 이색(李穡)의 무리이라 국초(國初)의 죄인들인데, 전하의 특별하신 은혜를 입어 목숨을 보전했을 뿐 아니라, 공신(功臣)의 열(列)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진실로 마땅히 왕실(王室)에 충성(忠誠)을 다해 재조(再造)의 은혜에 보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생각은 하지 않고 한갓 문인(門人)과 인아(姻婭)의 연고로 인해, 동시(同時)에 쫓겨났던 울분(鬱憤)을 글[書]에다 빌어 거짓을 꾸미고 무문곡필(舞文曲筆)118) 하여, 마침내 사(邪)·정(正)의 자리를 바꾸어 놓아 만세(萬世)에 의심이 되게 하였으니, 모르긴 하거니와 전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몸이 살았거나 죽었거나, 때의 예와 이제가 없이 모두 죄를 다스려야 할 것이오니, 이것은 《춘추(春秋)》의 세상을 경영[經世]하는 대전(大典)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본받아 조종(祖宗) 만세(萬歲)의 계책을 위하여 하윤(河崙)의 죄를 국문(鞫問)하도록 허락하시어 율(律)에 따라 시행하게 하시고, 권근의 죄는 그 관(棺)을 베고 그 집을 헐어 못을 파며,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여 후래(後來)를 경계하시고, 따라서 행장(行狀)과 비명(碑銘)은 뜨거운 불에 태워 버려 그 거짓을 제거하시고, 이색(李穡)의 아들 종선(種善)임군례(任君禮)의 죄는 지난번 상소(上疏)에서 모두 말씀드렸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유윤(兪允)하여 시행케 하소서."

하였다. 마침내 이졸(吏卒)을 보내어 하윤의 집을 수직(守直)119) 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하윤권근은 모두 이색의 문인(門人)들이라 일찍이 그 도당(徒黨)을 위했던 까닭에 보복(報復)으로 이것을 말했을 뿐이다."

하고, 곧 명하여 이졸(吏卒)로 수직(守直)하는 것을 파(罷)하게 하였다. 김여지(金汝知)를 명하여 하윤에게 가서 말하게 하기를,

"내가 진연(陳璉)이 지은 글을 보고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였다. 또 권근이 지은 것을 보니 태조(太祖)의 일을 자세히 말했으나, 말이 매우 바르지 못하였다. 또 듣자니 경이 지은 비명(碑銘)도 모두 이와 같다고 하나, 경의 글은 권근의 글을 모방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만일 이것을 비석(碑石)에다 밝힌다면, 이는 분명히 남에게 보이는 것이 되니, 어찌 부왕(父王)께 누(累)가 되지 않겠는가?"

하니, 하윤이 아뢰기를,

"신이 가리켜 말한 용사자(用事者)란 대개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태조께서 나라를 얻으신 것은 본래부터 뜻을 두었던 것이 아니었는데, 그때 용사(用事)하던 조준 같은 무리들이 태조의 뜻을 받들지 않고 마음대로 주륙(誅戮)을 행하였으니, 이것은 신이 그 사실을 잘 아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말한 것뿐이지, 어찌 감히 주상께 누(累)가 됨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김여지가 그대로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태조께서 나라를 얻었기 때문에 말을 이같이 하였을 뿐이지, 만약 나라를 얻지 못하였다면 의당 조준 등과 같이 비교하였을 것이다."

하고, 명하기를,

"이종선(李種善)은 고신(告身)을 거두어 먼 곳으로 귀양보내고, 임군례(任君禮)는 논하지 말라."

하였다. 대간이 청하여 말하기를,

"이종선의 죄는 가볍지 않으니, 가벼운 법에 따르지 마시고, 임군례도 또한 죄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이종선은 장(杖) 1백 대를 가하여 수속(收贖)하고, 임군례는 그 직(職)을 파면하라."

하여, 마침내 이종선동래진(東萊鎭)에 귀양보냈다. 3공신(功臣)과 좌정승(左政丞) 성석린(成石璘) 등이 상소하기를,

"가만히 죽은 신하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이 지었다는 죽은 신하 한산 백(韓山伯) 이색(李穡)의 행장(行狀)을 보니, 전조(前朝)의 공양군(恭讓君) 때의 일을 논함에 있어 말하기를, ‘용사(用事)하는 자들이 공(公)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 것을 꺼려하여 장단(長湍)으로 내쫓았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윤이(尹彝)이초(李初)를 상국(上國)에 보냈다고 거짓을 꾸며, 공(公) 등 수십 명을 청주(淸州)에 잡아 가두었는데, 당시의 왕[時王]이 평소에 공(公)이 다른 마음이 없었음을 알고 여러 차례 소환하였으나, ‘용사(用事)하는 자의 꺼림을 받아 문득 배척을 당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태조(太祖)가 즉위(卽位)함에 용사자(用事者)가 극형(極刑)을 가하려 하였으나, 태조께서 옛 친구[舊故]라 하여 특별히 용서하였다.’ 하였으니, 신 등은 생각건대, 공양군(恭讓君) 때에 우리 태조께서 시중(侍中)이 되시었고, 이색(李穡)은 스스로 장단(長湍)으로 물러가 있었는데, ‘용사(用事)하는 자가 공(公)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다고 꺼려하여 장단(長湍)으로 내쫓았다.’고 썼으며, 또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일은 신(臣) 조반(趙胖) 등이 상국(上國)에 사신(使臣)으로 가서 윤이이초 등과 더불어 정변(廷辨)120) 할 때, 윤이이초가 바친 글 속에 씌어 있는 성명(姓名)을 베껴 가지고 돌아왔는데, 이것을 ‘윤이이초를 보낸 것으로 꾸몄다.’고 썼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태조께서 강명 신무(剛明神武)하신 자품(資稟)으로 천운(天運)에 응하여 나라를 열으시니, 위복(威福)·정령(政令)이 모두 주상(主上)께서 나왔는데, ‘용사(用事)하는 자가 극형(極刑)을 가하려 하였다.’ 하였으니, 대저 일은 사실대로 기록하는 것이 천하(天下)의 대공(大公)입니다. 권근(權近)은 몸이 재상(宰相)이 되어 마침내 자기의 사사로운 일로 시비(是非)를 망령되게 논하여 좌주(座主)121) 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려 하였으니, 이는 군부(君父)의 대의(大義)를 잃고 《춘추(春秋)》의 대법(大法)을 어지럽힌 것이오니, 매우 붓[筆]을 잡은 문신(文臣)의 뜻이 아닙니다. 몸이 살았거나 죽었거나 관계없이 그 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오니, 비옵건대, 벼슬을 추삭(追削)하고 이를 폐하여 서인(庶人)을 만드소서. 그리고,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윤(河崙)이 지은 비문(碑文)은 비록 행장(行狀)과는 상략(詳略)의 차이가 있다고 하나, 대의(大義)로 말하면 이와 같습니다. 하윤이 오래도록 이 나라 대신(大臣)이 되어 대의(大義)를 살피지 않고 망령되게 군신(君臣) 간의 일을 의논하였으니, 그 죄가 권근보다 더 합니다. 청컨대, 유사(攸司)에 내려 그 죄를 밝게 바루시어, 후래(後來)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9책 21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1책 588면
  • 【분류】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역사-편사(編史) / 역사-고사(故事) / 인물(人物)

  • [註 105]
    임오년 : 1402 태종 2년.
  • [註 106]
    목은(牧隱) : 이색(李穡)의 호(號).
  • [註 107]
    양촌(陽村) : 권근(權近)의 호(號).
  • [註 108]
    치중(輜重) : 말이나 수레에 실은 짐.
  • [註 109]
    도경(道經) : 도가(道家)의 경전(經典).
  • [註 110]
    주공 원성(周公元聖) : 주공(周公)을 말함.
  • [註 111]
    곡학 아세(曲學阿世) : 정도에 벗어난 학문으로 세상 사람에게 아첨하는 것.
  • [註 112]
    주무(綢繆) : 사실이 없는 것을 이리 저리 꾸며대어 얽음.
  • [註 113]
    추심(推尋) : 찾아내서 가져옴.
  • [註 114]
    현릉(玄陵) :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 [註 115]
    종조(宗祧) : 종묘(宗廟).
  • [註 116]
    하련(煆鍊) : 식기 전에 쇠를 불리듯이 몹시 다그쳐 댐.
  • [註 117]
    명강(明降) : 명백한 강지(降旨). 곧 중국 황제가 내린 칙지(勅旨)를 말함.
  • [註 118]
    무문곡필(舞文曲筆) : 붓을 함부로 놀리어 왜곡(歪曲)된 문사(文辭)를 씀.
  • [註 119]
    수직(守直) : 죄인이 도망하지 못하도록 그 집을 지키는 일.
  • [註 120]
    정변(廷辨) : 조정에서 대질(對質)하여 변론(辯論)하는 일.
  • [註 121]
    좌주(座主) : 과거에 급제한 자의 시관(試官)을 일컫는 말.

○戊午/流戶曹參議李種善東萊鎭。 初, 任君禮朝京師時, 於太僕少卿祝孟獻處, 受國子助敎羊城陳璉所製本國文靖公 李穡碑銘以來, 獻之。 上覽之, 謂左右曰: "陳璉焉知之行事, 而所製至如此乎?" 左右對曰: "昔孟獻之奉使來也, 求詩文以歸。" 上曰: "予亦見之詩文矣。 徒見詩文, 亦安能製作至如此乎?" 左右曰: "之行狀, 權近製之。 今必見行狀。" 金汝知啓曰: "歲壬午孟獻之來也, 代言柳沂孟獻善。 種德之女壻, 必授行狀請製。" 上曰: "予知其時孟獻之草藁而已, 未知得之行狀。 今其銘中所載, 過情者多矣。 且昔者本國使臣, 或因卜命, 以致生釁者。 君禮何私通孟獻以得書乎?" 召君禮責之曰: "此後毋作生釁之事。" 左政丞成石璘進言曰: "李穡子孫私通中國, 請撰碑銘, 宜罪之。" 不從。 至是, 諫院請罪, 疏略曰:

臣等聞大明太僕少卿祝孟獻, 得本國文靖公 李穡行狀, 請製碑銘於國子助敎陳璉, 授任君禮以送。 臣等竊謂, 人臣義無私交, 所以杜朋黨之源也。 行狀碑銘, 雖是之家事, 身事兩朝, 行事之迹, 有關於國體者多矣。 未有殿下之命, 而文飾行狀, 潛通朝官, 以求銘焉, 是不可不問其故。 劾其子種善, 其答曰: "去歲壬午任白州時, 三寸姪女夫柳沂, 將父草藁行狀, 屬于祝孟獻以求銘。" 則已爲物故, 若種善, 初非不知, 不卽以聞, 今當君禮之來, 又不輒聞, 是徒欲溢美其親, 而不顧國體, 以干私交之罪, 其漸不可長也。 且君禮, 職在通事, 入朝所聞, 無有隱伏, 以達天聰, 復命之日, 不卽以聞, 淹留旬日, 乃進碑銘, 亦何心哉? 伏望殿下, 特命攸司, 鞫問其由, 以警後來。

上覽之曰: "牧隱則天下大儒, 通中國而褒美之可也。 然陽村所製行狀, 今詳觀覽, 不顧國體, 而專美牧隱, 文辭不無私恩之掩義。 以此觀之, 牧隱門生與我太祖之臣, 各自竝立矣。 然以行狀囑于孟獻柳沂, 今已死矣, 憑誰以問? 種善則欲美其親, 是人子之心也, 君禮則身先來, 而輜重不至, 故稽遲, 何罪之有!" 獻納鄭之唐上言曰: "初囑行狀時, 種善雖在白州, 豈不知耶? 君禮初不悉陳, 其心未可知也。 願將種善君禮, 卽下攸司, 鞫問其由。" 上曰: "是銘詳言太祖國初之事, 人苟求顯親之美, 則予豈忍聞太祖之失乎? 今日適致齋, 明日當召功臣, 共議以斷。" 上覽《道經》, 每月二十七日必齋。 翼日, 上召功臣宜寧君 南在等曰: "今觀上國陳璉所撰李穡之銘, 又觀河崙權近所著之辭, 皆言國初之事。 之書曰: ‘誣以遣之輩。’ 是尹彛李初之事, 其時臣民所共駭者也, 至今未知其故。 書若爾, 則是以虛爲實, 史官所書, 反爲誤也。 又曰: ‘淸州問事之時, 公誠感天, 有山崩水溢之變。’ 蓋之事, 高皇帝所言, 而本國所共喧騰者也, 豈有誣之者哉? 且風水之災, 無代無之, 豈必之所感也? 又曰: ‘公不好佛。’ 公在甓寺之事, 予所眼見也。 焉知其眞否? 又曰: ‘當恭讓君時, 用事者忌公不附己。’ 時我太祖爲國首相, 未審用事者指誰歟? 欲美恩門, 以顯後世, 書有過情之譽, 又借中國人憑作碑銘, 以虛爲實, 予則以爲不然。 書盛行于世久矣。 功臣等豈不目見乎? 爲功臣者, 與國同休戚者也。 其事關於太祖, 何不告我乎? 且此書將以傳于後世也。 我之所知, 旣大謬矣, 史冊所載, 亦必類此矣。" 僉曰: "不曾見之耳。 若得見之, 則敢不告乎?" 皆惶懼。 共讀陳璉所製銘與所製行狀曰: "是皆虛事。" 上曰: "今此書刊行已久, 其不傳之術, 將若之何? 卿等宜退而慮焉。 且之事, 史必誤矣。 太祖之史, 如此其誤, 當今之史, 焉知其果實乎? 必皆誤也。" 等曰: "毁其行狀, 不傳後世, 則無疑矣。 臣等以謂作行狀者有罪耳。" 上曰: "卿等宜去此篇, 其餘詩文, 不可廢也。" 司憲府亦上疏曰:

君禮朝上國, 私受太僕少卿祝孟獻, 請製於國子助敎陳璉, 本國文靖公 李穡墓誌以來。 今者問其授受之際所說言語及初請本國人之姓名與孟獻所指傳付處, 皆以不知答之, 然上國之人所製私藏文書, 不問初請人與傳囑處, 而遽受出來, 固無是理。 君禮雖不問, 孟獻一一指說, 人之情也。 君禮意無證聽而可隱, 飾辭不伏, 誠有罪焉。 種善答曰: "請述墓誌於孟獻者, 三寸姪女夫柳沂之所爲也。 予任白州, 未知其故。" 然請囑雖柳沂所爲, 爲子孫相傳, 誇示後人, 一家大事, 不與其子共議, 遽囑上國之使, 不近人情。 況孟獻請求李穡文集於柳沂之時, 種善白州來入于京, 則暗與, 共議請述之迹, 昭然矣。 幸亡而對論無由, 隱諱不服, 大有罪也。 不寧惟是, 私通王官, 將來生釁非無, 慮至於此, 可爲寒心。 君禮種善, 宜收告身, 鞫問其由, 依律斷罪, 以警後來。

疏留中。 召議政府臺諫各一員曰: "前日憲府請種善之罪, 其志欲何爲也?" 大司憲黃喜對曰: "種善不顧國之大體, 私通王官, 非臣子之心也。 請收告身, 鞫問情由。" 上曰: "種善, 性本昏昧者也。 不察事理, 濫欲顯親耳。 卿等請罪種善, 末也。 卿等見之行狀乎? 所製者若存, 予當問之矣。 其行狀以謂: ‘不事二君。’ 然太祖擧義回軍之日, 送酒以迎, 其可謂不事二君者乎? 至若尹彛李初之事, 其時擧國之人, 腐心者也。 延及於, 而問事於淸州之時, 適有水溢之災, 乃謂: ‘用事者不附己而貶逐之, 至於問事日, 有山崩水溢之災, 實公忠誠所感。’ 然則可比周公元聖感風雷之變乎? 又好佛之事, 國人所共知, 甓寺之事, 尤其明著也, 乃謂: ‘僧徒請願文勸子, 不得已而應之。’ 卿等以爲然否? 昔尹紹宗曰: ‘曲學阿世, 飾詐釣名者。’ 不其然乎?" 曰: "臣子若有罪, 則身無存沒, 皆得討而不赦之也。 於權近有可問之罪, 則豈可以身死而置之乎? 種善, 雖若一事, 實則區以別矣。 今種善之罪著矣, 先問情由, 然後罪必有所歸矣。" 上曰: "種善之罪, 更議以聞。" 司憲府責納領議政府事河崙所撰文靖公碑銘而見之, 與權近所製行狀, 大意相似。 左司諫大夫李明德、司憲執義曹致等, 交章請權近河崙之罪, 上留之。 其疏曰:

臣等竊見通事繕工少監任君禮齎來國子助敎陳璉所製本國文靖公 李穡墓誌, 其記之行事世係, 甚爲綢繆。 推之行狀碑銘於其子種善, 參考端由, 其行狀則文忠公 權近所編, 其碑銘則領議政府事河崙所撰也。 命意措辭, 與陳璉所製, 相爲表裏。 臣等以爲, 李穡遇知玄陵, 立名敎於當時, 而位至宰輔。 當玄陵之無後, 不謀立王氏, 以全宗祧, 乃阿權臣李仁任, 以立辛禑乃不學無道, 殺戮無辜, 至興師旅以猾夏。 以師傅, 曾無一言以匡救, 及我太祖擧義還師之日, 群臣議廢而立王氏, 又阿大將曹敏修, 立, 得爲左侍中, 自使上國, 請親朝而不得。 其還也, 獨見驪興, 謀迎以還, 未遂其計, 遜職外戚以保全。 又當恭讓君權署之日, 受判門下, 而立於百官之上, 略無怍色, 時人目而議之曰: "是王氏之臣耶? 辛氏之臣耶?" 其反覆多詐, 國人所共知也。 之門人河崙權近所製行狀碑銘曰: "己巳冬, 恭讓君立, 用事者忌公不附己, 劾貶長湍縣。" 臣等以爲, 所謂用事者忌公不附己, 指誰而言歟? 又曰: "庚午五月, 誣以遣于上國, 繫公等數十人于淸州, 將用峻法, 煆鍊成罪之時, 忽大雨, 山崩水湧, 城門館舍沒, 而問事官攀樹僅免。 之父老以爲, 公忠誠所感。" 臣等以爲尹彛李初之詐于上國, 已有明降, 可謂之誣乎? 爲國家之計, 可不鞫問乎? 其用峻法, 煆鍊成罪, 又指誰而言歟? 之水災, 果有周公之德而致之乎? 又曰: "壬申七月, 我太上王卽位, 忌公者誣公以罪, 欲加極刑。" 臣等以爲, 我太祖初非有意於國, 盡忠王室, 與其黨, 謀去太祖, 禍在不測。 當時忠義之臣, 以天命人心之所歸, 推戴太祖, 不血一刃, 而化家爲國, 是愚夫愚婦所得而知也。 豈以無罪, 加之極刑乎? 黨之放逐于外, 非人所爲, 天之使然也。 其所謂忌公者誣公以罪, 欲加極刑, 又指誰歟? 臣等竊惟, 河崙權近, 皆之黨, 國初之罪人。 蒙殿下不次之恩, 非特保全, 得與功臣之列, 誠宜盡忠王室, 以報再造之恩, 顧不是念, 徒以門人姻婭之故, 同時斥逐之憤, 寓之於書, 飾虛舞文, 遂使邪正易處, 以爲萬世之疑, 未知殿下以爲何如? 身無存沒, 時無古今, 皆得以討, 是《春秋》經世之大典也。 伏惟殿下, 體《春秋》之大義, 爲祖宗萬世之計, 將河崙之罪, 許令鞫問, 依律施行; 將權近之罪, 斬棺瀦宅, 籍沒家産, 以懲後來, 仍將行狀碑銘, 付之烈焰, 以去其僞。 之子種善任君禮之罪, 前疏已盡, 伏望兪允施行。

遂遣吏卒, 守直第。 上曰: ", 皆之門人也。 嘗爲其黨, 故以報復言之耳。" 卽命罷吏卒守直者。 命金汝知往謂曰: "予觀陳璉之書, 心已未平, 又覽權近所製, 詳言太祖之事, 言甚不直。 又聞卿所製碑銘, 類皆如此, 然卿之書, 倣書而撰也。 若明于石, 是明示人也, 豈不有累於父王乎?" 曰: "臣之指言用事者, 蓋指趙浚鄭道傳而言之也。 太祖得國, 本非有意矣。 其時用事若輩, 不承太祖之意, 而擅行誅戮。 臣深知其事, 故敢言之耳。 安敢有累於上也?" 汝知以啓, 上曰: "太祖得國, 故言之若此耳。 若非得國, 當與等比之矣。" 命收種善告身, 流遠方; 君禮則勿論。 臺諫請曰: "種善之罪非輕, 毋從輕典。 君禮亦有罪。" 命加種善杖一百收贖, 罷君禮職。 遂流種善東萊鎭。 三功臣左政丞成石璘等上疏曰:

竊見故臣吉昌君 權近所撰故臣韓山伯 李穡行狀, 其論前朝恭讓君時事, 言: "用事者忌公不附己, 劾貶長湍。" 又言: "誣以遣于上國, 逮繫公等數十人于淸州。 時王素知公無他, 累次召還, 爲用事者所忌, 輒見斥逐。" 又言: "太祖卽位, 用事者欲加極刑, 太祖以舊故, 特原之。" 臣等以爲恭讓君時, 我太祖爲侍中, 李穡自退長湍, 書以"用事者忌公不附己, 劾貶長湍。" 且事, 臣趙胖等奉使上國, 與廷辨, 傳寫所獻書內姓名回還, 書曰: "誣以遣。" 惟我太祖, 以剛明神武, 應運開國, 威福政令, 一出於上, 書以"用事者欲加極刑。" 大抵記事以實, 天下之大公也。 夫身爲宰相, 乃以己私, 妄論是非, 欲(楊)〔揚〕 座主之美, 忘君父之大義, 亂《春秋》之大法, 甚非秉筆文臣之意也。 身無存沒, 罪在不赦, 乞追削爵位, 廢爲庶人。 領議政府事河崙所撰碑文, 雖與行狀有詳略之殊, 大義則同。 久爲當國大臣, 不察大義, 妄議君臣間事, 罪浮于。 請下攸司, 明正其罪, 以爲後來之戒。

不從。


  • 【태백산사고본】 9책 21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1책 588면
  • 【분류】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역사-편사(編史) / 역사-고사(故事)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