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조이하의 능을 이장함과 관련, 복제 등을 의논하다
개장(改葬)의 복(服)을 의논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었다.
"삼가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상고하니, 송(宋)나라 건덕(乾德) 원년에 선조(宣祖)의 안릉(安陵)을 개장(改葬)할 때, 시체의 널을 가까이 하는 자는 시마(緦麻)를 입었고, 서울[京城]에서는 조회를 폐하고 음악을 금하였습니다. 그리고, 위(魏)나라 효명제(孝明帝)가 문소 황태후(文昭皇太后)를 개장(改葬)할 때는 최광(崔光)이 상언(上言)하여, 지존(至尊)과 태자(太子)와 여러 신하가 모두 시마(緦麻)을 입었다가 장사가 끝난 뒤에 제복(除服)하기를 청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부모의 장사를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또 한문공(韓文公)의 개장복의(改葬服議)를 상고하니, 경(經)에 말하기를, ‘개장(改葬)하는 데 시마(緦麻)를 입는다고 한 것은 자식이 부모(父母)에 대한 것을 말한 것이고, 기타는 복이 없다.’ 하였습니다. 생각건대, 덕릉(德陵)·안릉(安陵)을 옮겨 안장(安葬)할 때에, 전하께서 한문공(韓文公)의 개장복의(改葬服議)의 예(例)에 따르는 것이 예(禮)에 당연하고, 시구(屍柩)를 가까이 하는 자가 길복(吉服)을 입는 것은 예(禮)에 미편하니, 소의(素衣)·사모(紗帽)·각대(角帶)로 시구(屍柩)를 받들면 거의 정례(情禮)에 합할 것 같습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윤(河崙)이 아뢰었다.
"《문헌통고(文獻通考)》의 개장(改葬)하는 법은, 자식이 부모를 위하고, 신하가 임금을 위하고, 아내가 남편을 위하여 시마(緦麻)를 입는 것입니다. 지금 덕릉·안릉 두 능이 세대(世代)는 비록 멀지만 종묘(宗廟)에 있는 조상이며, 개장(改葬)은 대사(大事)이나 시마(緦麻)는 복중(服中)에 지극히 가벼운 것이니, 전하께서 종묘에 있는 신주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고자 하시면서, 어찌 지극히 경한 복(服)을 입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예문(禮文)에 없는 것이나, 후한 데에 잘못이 있으면 유감은 없는 법입니다. 빌건대, 명일(明日)부터 시마(緦麻)를 입어 7일이 경과하면 제복(除服)하시되, 장삿날에 이르러 도로 입으시고, 장사 지낸 뒤에 제복하시면 가할 것입니다."
지신사(知申事) 안등(安騰)이 말하였다.
"이미 정조(停朝)하라는 장(狀)을 내리셨고, 또 한문공(韓文公)이 개장(改葬)하는 법을 논하기를, ‘자식이 부모를 위하여 시마(緦麻)를 입고 기타는 복(服)이 없다.’ 하였는데, 덕릉·안릉 두 능은 먼 조상입니다. 만일 신하가 임금을 위해서라고 말한다면, 태조(太祖)께서 창업하고 목조(穆祖)는 현조(玄祖)134) 이니, 임금이라고 이름할 수 없습니다. 만일 주상께서 시마복을 입으시면 온 조정이 모두 입어야 하니, 정에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하윤이 말하였다.
"목조(穆祖)를 이미 왕으로 추존(追尊)하고, 또 종묘(宗廟)의 일실(一室)에 봉사(奉祀)하여, 축문(祝文)에 사증손 신모(嗣曾孫臣某)라고 일컬으니, 임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임금이 듣고 말하였다.
"경의 말이 대단히 좋으나, 내가 시마복을 입으면 신하가 모두 그리하여야 되니, 너무 중(重)한 것 같다. 명일에 능을 파묘할 때부터 정조(停朝)하고, 3일 동안 재계(齋戒)하면, 거의 예(禮)가 간단하고 정리에 맞을 것이다."
하윤이 물러가니, 임금이 대언(代言)에게 일렀다.
"영의정(領議政) 하윤(河崙)이 와서 〈내게〉 헌언(獻言)한 것이 어찌 뜻이 없을 리 있겠느냐? 조정(朝廷)에서 말해도 되지 않으므로, 마침내 와서 아뢰어 반드시 들어 주길 바랐던 것일 것이다."
대언이 대답하였다.
"정부의 뜻은 한문공(韓文公)의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이고, 기타는 복이 없다.’는 예(例)에 의한 것이고, 영의정(領議政)의 말은 다만 억탁(億度)인 것입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의정은, 신하가 임금을 위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너희들이 어찌 억탁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하고, 마침내 안등(安騰)·김여지(金汝知)를 하윤(河崙)의 집에 보내어 이르기를,
"목조(穆祖)는 현조(玄祖)이다. 부모(父母)의 상에는 참최복(斬衰服)을 입고, 개장(改葬)에는 시마복(緦麻復)을 입는 법이나, 현조(玄祖)는 복이 이미 다하였으니, 또 시마복(緦麻服)을 입는 것은 가하지 않다. 또 명일부터 장삿날까지 온 조정이 시마복을 입으면, 그 사이에 만약 조정(朝廷) 사신(使臣)에게 부득이한 연향(宴享)을 베풀고, 풍악을 울리는 폐할 수 없는 예(禮)가 있던지, 또 7일을 지나 제복(除服)하고 장삿날에 이르러 도로 입으면, 이름과 실상이 서로 어긋나서 명예를 구하는 것 같으니, 또한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니, 하윤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20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1책 562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역사-고사(故事) / 출판-서책(書冊)
- [註 134]현조(玄祖) : 5대조(五代祖).
○己未/議改葬之服。 禮曹啓:
謹按《文獻通考》, 宋 乾德元年, 改葬宣祖 安陵, 親屍柩者服緦麻, 京城廢朝, 禁音樂; 魏 孝明帝改葬文昭皇太后, 崔光上言請至尊太子群臣, 幷服緦麻, 旣葬而除。 此皆遷父母之葬也。 又按韓文公改葬服議: "《經》曰: ‘改葬, 緦。’ 此謂子之於父母, 其他則無服。" 竊謂德陵、安陵遷安時, 殿下依韓文公改葬服議例, 於禮當然, 親屍柩者吉服, 於禮未便。 以素衣、紗帽、角帶, 奉屍柩, 庶合情禮。
上從之。 領議政府事河崙啓曰: "《文獻通考》改葬之法, 子爲父母、臣爲君、妻爲夫, 服緦麻。 今德、安二陵, 世代雖遠, 乃在廟之祖也。 改葬, 大事, 而緦麻, 服之至輕者也。 殿下爲在廟之主, 欲行大事, 而其不可服至輕之服乎? 雖禮文所無, 失於厚則無憾矣。 乞自明日服緦, 經七日乃除, 至葬日還服, 旣葬而除, 則可矣。" 知申事安騰曰: "已下停朝之狀。 且韓文公論改葬之法曰: ‘子爲父母服緦, 其他則無服。’ 德、安二陵, 乃遠祖也。 如曰臣爲君, 則太祖創業, 而穆祖乃玄祖也, 不可名爲君; 若主上服緦, 則擧朝皆服矣, 無乃過情乎?" 崙曰: "穆祖旣追王, 且奉祀於宗廟一室, 祝文稱嗣曾孫臣某, 則非君而何?" 上聞之曰: "卿言甚善, 然予服緦, 則臣下皆然, 似乎太重。 自明日啓陵停朝, 三日齋戒, 庶禮簡而稱情也。" 崙乃退。 上謂代言曰: "領議政爲來獻言, 豈無意歟? 言於朝廷而未得, 遂以來啓, 期其必聽也。" 代言對曰: "政府之意, 依韓文公子爲父母, 其他則無服之例。 領議政之言, 特億度耳。" 上曰: "領議政以爲臣爲君也。 汝等何得以爲億度乎?" 遂遣安騰、金汝知于崙第, 諭之曰: "穆祖乃玄祖也。 父母之喪, 服斬衰, 而改葬卽緦。 玄祖服已盡而又緦, 未可也。 且自明日至于葬日, 擧朝服緦, 則其間如有朝廷使臣, 不得已宴享動樂不可廢之禮, 又經七日而除, 至葬日還服, 則名實相違, 似求名譽, 亦不可爲也。" 崙不敢復言。
- 【태백산사고본】 8책 20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1책 562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역사-고사(故事) / 출판-서책(書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