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금지법·과전체수법·교육진흥·매장법·왜노 혁파 등 사간원의 8가지 시무책
사간원(司諫院)에서 시무(時務) 여덟 가지 일을 조목조목 진달하니, 의정부(議政府)에 내려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 그 첫째에 말하기를,
"풍속(風俗)은 국가의 원기(元氣)요, 교화(敎化)는 국가의 급무(急務)이니, 교화가 닦아지면 풍속이 후해지고, 국가가 다스려집니다. 요(堯)·순(舜) 때에는 의관(衣冠)을 그려[畫] 입어도 백성이 범(犯)하지 않았고, 삼대(三代)049) 의 성시(盛時)에는 누구를 헐뜯고 누구를 칭찬하겠습니까? 곧은 도리로 행하였습니다. 한(漢)나라 문제(文帝)·경제(景帝)는 풍속(風俗)을 변역(變易)시켜 백성들이 순후(淳厚)하여졌고,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에는 바깥문[外戶]을 닫지 않고 나그네[行旅]가 양식(糧食)을 싸 가지고 다니지 않았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다스림의 오르고 내리는 것이 풍속의 후(厚)하고 박(薄)한 데에 관계됩니다. 우리 동방(東方)이 전조(前朝)의 성시(盛時)에는 백성이 순후하고 풍속이 아름다웠었는데, 쇠(衰)한 말년(末年)에 이르러서 풍속이 날로 박(薄)하여졌습니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천명(天命)에 응(應)하고 인심(人心)에 따라 처음으로 방가(邦家)를 이루셨고, 전하께서 비서(丕緖)를 계승하여 도탑게 경술(經術)을 숭상하고, 학교(學校)를 열어 넓히시어 전장(典章)·문물(文物)이 빛나게 크게 갖추어져서, 교화(敎化)가 행하여졌습니다. 그러나, 쌓인 습관이 제거되지 않고 인심이 박하여 풍속에 있어서 오히려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지난번에 들으니, 외방(外方)의 어느 사람이 말을 끌고 서울에 들어왔다가, 마침 해는 저물고 비를 맞아 몹시 추워서 어느 집에 이르렀더니,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밤새도록 추위에 울부짖다가 땅에 쓰러져 죽었다 합니다. 서울은 풍속의 중추(中樞)요, 사방에서 우러러보는 곳인데, 어째서 인심의 박하기가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신 등은 밝은 때를 위하여 유감으로 여기는 바입니다. 또 고자질[告訏]하는 풍속이 성행하여 사람을 해(害)하려고 무명장(無名狀)을 거[掛]는 자가 있고, 분풀이[逞忿]를 하고자 하여 신문고(申聞鼓)를 치는 자도 있으며, 수령(守令)을 참소(讒訴)하는 자가 또한 많아서 벌떼처럼 일어납니다. 대개 수령(守令)이란 구중(九重)에서 명령을 받고 백리(百里)나 되는 곳에 나가서 정사(政事)를 맡은 자입니다. 열 집이 되는 고을에도 오히려 군신(君臣)의 예(禮)가 있으니, 비록 허물이 있다 하더라도 그 백성된 자가 휘(諱)하여 숨기는 것이 가하고, 풍자(諷刺)하여 일깨우는 것이 가합니다. 하물며, 이 나라에 살면서 그 대부(大夫)를 그르게 여기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저 토호(土豪)·향원(鄕愿)050) 과 교활한 아전·간사한 백성들이 혹 태장(笞杖)을 맞거나, 혹 부역(賦役)에 시달리면, 도리어 사사 원수(怨讎)를 삼아 밤낮으로 부지런히 몰래 중상(中傷)합니다. 국가에서는 그 참소한 말을 가지고 수령(守令)에게는 법을 다하고, 간사한 백성이 수령을 고소한 죄는 논하지 않으니, 이리하여 아랫사람으로 윗사람을 해치는 풍속이 일어납니다.
신 등은 생각건대, 한 고을에서 일어나면 한 도(道)에 퍼지고, 한 도(道)에서 일어나면 한 나라에 퍼지니, 이렇게 되면, 들어오면 효도(孝道)하고 나가면 공손히 하는 아름다운 선비와 윗사람을 친히 하고 어른을 위해 죽는 착한 풍속이 어디로부터 나오겠습니까? 또 수령(守令)으로 사(私)가 없고 지극히 공정한 자는 호활(豪猾)한 자에게 참소를 당하고, 유연(柔軟)하고 겁약(劫弱)한 자는 참소를 두려워하여 손을 거두고 있으니, 정령(政令)이 행해지지 않고 부역(賦役)이 고르지 못한 것이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원컨대, 사람의 간악(奸惡)한 것을 미워하여 강개(慷慨)하게 바른 대로 고하는 자와 수령의 탐하고 사나운 것을 미워하여 사(私)가 없어 진고(陳告)하는 자는 모두 좌죄(坐罪)하지 말고, 일이 종사(宗社)에 관계되는 것 이외에 원망을 가지고 평민(平民)을 고소하는 자와 사감(私感)을 끼고 수령을 참소하는 자는 아울러 ‘사(私)를 껴서 남을 해치고, 아랫사람이 되어 윗사람을 해치는 죄’로 좌죄하여, 경박(輕薄)한 풍습을 옮겨 충후(忠厚)한 풍속을 이루소서."
하였다. 정부(政府)가 의논하기를,
"수령(守令)의 범람(汎濫)한 일을 한결같이 부민(部民)이 현고(現告)하지 못하게 하면, 간악하고 사나운 무리에게 악을 징계할 문(門)이 없을 것이니, 다만 무고(誣告)한 자만 엄히 다스리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둘째에 말하기를,
"예·의·염·치(禮義廉恥)는 나라의 사유(四維)이니 하루도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국가에서 이미 과전(科田)을 주고 또 녹봉(祿俸)으로 우대하니,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후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급전(給田)의 한 가지 일에 있어서 미편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수전(受田)의 다소(多少)를 따지지 않고 진고(陳告)한 자에게 주니, 이 때문에 염치(廉恥)가 있어 구하지 않는 자는 1결(結)도 얻지 못하고, 부지런하게 이익을 구하는 자는 전지(田地)의 많기가 백 결(結)에 이르니, 고르지 못한 탄식이 여기에서 생깁니다. 심한 자는 생사(生死)를 엿보아 심지어 죽기 전에 진고하는 자가 있으니, 염치(廉恥)에 어떠하며 사풍(士風)에 어떠합니까? 원컨대, 이제부터 진고(陳告)를 허락하지 말고, 범죄한 사람과 후사(後嗣)가 없이 죽은 사람이 받았던 전지(田地)를, 서울 안에서는 한성부(漢城府), 외방에서는 관찰사(觀察使)가 호조(戶曹)에 보고하고, 호조에서는 조사(朝士)가 〈전지를〉 받고 아니 받은 것을 상고하고, 또 받은 전지의 많고 적은 것을 상고하여, 전지가 없는 자와 적은 자에게 우선적으로 절급(折給)하소서. 그러면, 고르지 못한 탄식이 없어지고 염치의 풍속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였다. 정부에서 의논하기를,
"한결같이 사헌부(司憲府)에서 수판(受判)한 것에 의하여 전에 받은 전지(田地)의 다소(多少)와 진고(陳告)한 전지의 수를 상고하여, 전에 받은 것이 적은 자에게 우선적으로 절급(折給)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셋째에 말하기를,
"세도(世道)의 오르고 내림은 인재(人材)의 성쇠(盛衰)에 매어 있고, 인재의 성쇠는 사도(師道)의 득실(得失)에 매여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국가에서 안으로는 성균(成均), 밖으로는 향학(鄕學)에 모두 교관(敎官)을 두어 인재를 양성하니, 가위(可謂) 성(盛)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성균은 일국의 학자(學者)가 모이는 곳이니, 사표(師表)의 선택을 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재신(宰臣) 권근(權近)과 이첨(李詹)이 서로 계승하여 겸대사성(大司成)이 되어 인재를 교양하여, 인재가 무리로 배출되었는데, 지금은 그 직책이 없습니다. 신 등은 생각건대, 재주는 다른 시대에 빌리지 않는 것이니, 쓰는 데에 있어 어찌 사람이 없는 것을 근심하겠습니까? 검교 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 세자 빈객(世子賓客) 조용(趙庸)은 학술(學術)이 정(精)하고 재덕(才德)을 갖춘 것이, 한때의 학자(學者)가 모두 마음속으로 복종하는 바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조용으로 겸 대사성을 제수하여 서연(書筵)에 진강(進講)하는 여가에 성균관(成均館)에 사진(仕進)하여 학자들을 가르치게 하시면, 사표(師表)가 서고 교양(敎養)이 잘 될 것입니다. 또 군현(郡縣)의 학장(學長)에게 공억(供億)하는 늠록(廩祿)을 지금 모두 정파(停罷)하였으니, 전하께서 학문을 높이는 뜻에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학장(學長)의 늠록(廩祿)을 회복하여 성조(盛朝)의 권학(勸學)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였다. 정부(政府)에서 의논하기를,
"아뢴 바에 의하여 시행하시고, 다만 학장의 늠록은 그 고을에 사는 자를 제외하고 모두 지급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넷째에 이르기를,
"왜구(倭寇)가 우리 나라에 대하여 경인년 이래로 군현(郡縣)을 침략하고 생민(生民)을 살육하여, 환(患)이 된 것이 지극합니다. 우리 성조(盛朝)에서 무(武)로써 침략을 막고, 문(文)으로 다스림을 이루나, 왜인의 사람됨이 성품이 사납고, 이랬다 저랬다 하여 믿기가 어려운데, 지금 관직을 주어 궁정(宮庭)에서 숙위(宿衛)하게 하고, 이들을 사서 노비(奴婢)를 삼아 주군(州郡)에 널려 있게 하니, 심히 미편(未便)합니다. 또 경상도(慶尙道) 한 도(道)를 보더라도 그 수효가 거의 2천에 이르는데, 혹은 가장(家長)의 아내를 겁탈하고, 혹은 이웃 마을의 사람을 죽이니, 이것이 족히 이상지계(履霜之戒)가 될 만합니다. 자고(自古)로 바깥 오랑캐[外夷]의 사람이 처음에는 지극히 미약(微弱)한 것 같으나, 나중에는 반드시 제어하기 어렵게 되는 법입니다. 신 등은 두렵건대, 이들 무리가 하루아침에 벌떼처럼 일어나면 또한 강적이 될 것이라 염려됩니다. 만일 그 부형(父兄)이 우리 변방을 도둑질한다면 과연 우리를 위해 그 부형을 치겠습니까? 싸움터에 나가면 창[戈]을 거꾸로 할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또 그 자제(子弟)를 구하여 사[求賣]서 우리의 노비(奴婢)를 삼는다고 칭탁하여 우리 주군(州郡)에 두는데, 그 마음 또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날에 우리 백성을 많이 죽인 것으로 말한다면, 비록 다 죽이더라도 가합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왜인을 사서 노비를 삼는 것을 일체 모두 엄금하여 화(禍)의 싹을 막으소서."
하였다. 정부에서 의논하기를,
"아뢴 바에 의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다섯째에 이르기를,
"성중(城中)에서 죽은 사람을 혹은 가로(街路)에 버리고, 혹은 구항(溝巷)에 두니, 진실로 차마 볼 수 없는 일입니다. 한성부(漢城府)에서 오부(五部)로 하여금 수시로 곧 묻어서 왕도(王都)를 숙청(肅淸)케 하도록 《육전(六典)》에 실려 있는데, 이것은 성조(盛朝)의 좋은 법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갓 문구(文具)가 되었으니 마음 아픈 일입니다. 원컨대, 따로 한 관사(官司)를 세워 ‘매치원(埋置院)’이라 이름하여 오로지 그 일을 맡게 하고, 두루 성중(城中)을 돌아다니며 만일 죽어서 버린 자가 있으면, 상거(相距) 열 집[家]를 한도로 하여 버린 집을 조사하게 하고, 그 집을 찾아내면 주가(主家)에서 돈을 징수하여 매장(埋葬)의 비용에 충당하며, 찾아내지 못하면, 열 집의 사람을 내어 그 시체를 매장하고, 혹 집안이 가난하여 사람이 죽어도 매장하지 못하는 자는 진고(陳告)를 허락하여 묻어 주어서 풍속을 후하게 하고 왕도(王都)를 청결히 하소서."
하였다. 정부(政府)에서 의논하기를,
"《육전(六典)》에 의하여 시행하고, 그 중에서 마음을 써서 고찰하지 않는 것은 헌사(憲司)가 규리(糾理)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여섯째에 이르기를,
"사람이 의뢰하여 사는 것은 의식(衣食)뿐입니다. 우리 동방(東方)이 처음에는 뽕나무[桑]와 삼[麻]만 알고 목면(木綿)이 무슨 물건인지 알지 못하였는데, 간의 대부(諫議大夫) 문익점(文益漸)이 중원(中原)에 사신갔다가 그 씨를 얻어 가지고 돌아와서 우리 백성에게 혜택을 주어, 위로 경사(卿士)에서 아래로 서인(庶人)에게 이르기까지 상의(上衣)·하상(下裳)을 모두 이것으로 만드니, 백성에게 공(功)이 있음이 가위(可謂) 크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이미 포상(褒賞)의 법(法)을 거행하여 작질(爵秩)을 추숭(追崇)하였으니, 가위(可謂) 온당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예전을 상고하면 무릇 한 도(道)에 공(功)이 있는 자도 모두 사당(祠堂)을 세워서 제사하는데, 하물며 한 나라에 공(功)이 있는 자이겠습니까? 원컨대, 관향(貫鄕)에 사당을 짓고 제전(祭田)을 주어서 제사지내어, 성조(盛朝)의 덕(德)을 높이고 공(功)에 보답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였다. 정부(政府)에서 의논하기를,
"이미 일찍이 포상(褒賞)하였으니, 사당(祠堂)을 짓고 제전(祭田)를 주는 것은 아직 정지하소서."
하였다.
일곱째에 이르기를,
"경(經)에 말하기를, ‘살아서는 예(禮)로 섬기고 죽어서는 예(禮)로 장사(葬事)한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상(喪)에는 슬픔을 다하는 것이 귀(貴)하고, 예(禮)는 영검(寧儉)051) 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생각건대, 태조(太祖)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경(經)을 세우고 기(紀)를 베풀어 상장(喪葬)에 대한 예(禮)가 《육전(六典)》에 실려 있는데, 오직 장사지내고 무덤을 쓰는[葬墳] 제도만 정한 것이 없습니다. 세간(世間)에 장사지내는 자가 그 관곽(棺槨)·의금(衣衾)·석실(石室)·석문(石門)·석인(石人)·석상(石床)을, 부유(富裕)한 자는 참람(僭濫)하기가 공후(公侯)에 비기고, 가난한 자는 재력(財力)을 탕진하니, 이것이 어찌 조고(祖考)의 뜻이겠습니까? 자식 된 자의 마음으로 본다면 오히려 가하다 할 수 있으나, 명분(名分)의 참람됨에 이르러서는 어찌하겠습니까? 신 등은 원컨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사대부(士大夫)의 장분(葬墳)의 제도를 정하게 하여 사치(奢侈)를 금하소서."
하였다. 정부(政府)에서 의논하기를,
"아뢴 바에 의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여덟째에 이르기를,
"나라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 생명을 삼습니다. 지금 국가에서 양향(糧餉)의 비축(備蓄)을 염려하여 백성들의 왕년(往年) 환자[糶]를 독촉하여 받으므로, 세전(歲前)에 양식이 떨어진 자가 자못 많습니다. 그런데, 감사(監司)는 국가의 명령을 기다린 연후에 창고(倉庫)를 열어서 진휼(賑恤)하고 꾸어주니, 신 등은 두렵건대, 굶주린 백성이 미처 구제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백성이 양식이 떨어진 자가 있으면, 감사(監司)가 곧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창고를 열어서 진휼하고 꾸어주게 하고, 그 연후에 국가 보고하게 하여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하소서."
하였다. 정부(政府)에서 의논하기를,
"전례(前例)에 의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다른 조목(條目)은 의논한 대로 따를 수 있으나, 오직 진제(賑濟)에 대한 한 가지 일만은, 의창(義倉)이 본래 백성을 위하여 설치한 것이니, 경내(境內)에 주린 백성이 있으면 먼저 창고를 열어서 진휼(賑恤)하고 곧 감사(監司)에게 보고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정부(政府)에서 다시 아뢰기를,
"우리 동방(東方)은 땅이 작아서 도성(都城)으로부터 변방(邊方)에 이르기까지 그 길이 멀지 않으니, 만일 주린 백성이 있으면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도 늦지 않습니다. 만일 임의로 발(發)하라는 명령이 있으면, 어리석은 아전[愚吏]이 살피지 않고 함부로 소비하여, 조도(調度)가 절도가 없어 창름(倉廩)이 빌까 두렵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8책 19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1책 540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농업-전제(田制) / 농업-면작(綿作) / 외교-왜(倭) / 구휼(救恤) / 풍속-예속(禮俗)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법-치안(治安)
- [註 049]삼대(三代) : 하·은·주(夏殷周).
- [註 050]
향원(鄕愿) : 그 고을 사람에게 덕(德)이 있는 사람이라 칭송을 받으나, 실제의 행실은 그렇지 못한 사람.- [註 051]
영검(寧儉) : 절검(節儉).○司諫院條陳時務八事, 下議政府擬議以聞:
其一曰, 風俗, 國家之元氣; 敎化, 國家之急務。 敎化修, 則風俗厚而國家治矣。 堯、舜之時, 畫衣冠而民不犯; 三代之盛, 誰毁誰譽, 直道而行。 漢之文、景, 移風易俗, 黎民淳厚; 唐之太宗, 外戶不閉, 行旅不齎糧。 以此觀之, 致治之升降, 關乎風俗之厚薄。 惟我東方, 前朝盛時, 民淳俗美, 至于衰季, 風俗日薄。 恭惟我太祖, 應天順人, 肇造邦家, 殿下纉承丕緖, 敦尙經術, 開廣學校, 典章文物, (燠)〔煥〕 然大備, 敎化行矣。 然積習未除, 人心澆薄, 其於風俗, 猶有嫌焉。 向聞外有一人牽馬入京, 適値日暮, 冒雨寒甚, 行至一家, 閉門不納, 終夜呼寒, 伏地而死。 京城, 風俗之樞機, 四方之瞻仰, 何人心之薄, 至此極乎? 臣等爲明時而憾焉。 又告訐之風盛行, 欲害人而掛無名狀者有之, 欲逞忿而擊申聞鼓者亦有之, 至於讒訴守令者, 亦多蜂起。 蓋守令受命九重, 出宰百里, 十室之邑, 尙有君臣之禮, 雖有愆違, 爲其民者諱而隱之可也, 諷而警之可也。 況居是邦, 不非其大夫乎? 彼土豪鄕愿、猾吏奸民, 或被笞杖, 或迫賦役, 反爲私讎, 日夜孜孜, 陰中傷之。 國家以其讒言, 盡法於守令, 不論奸民訴守令之罪, 爲下賊上之風興焉。 臣等謂興一州, 則遍於一道, 興一道, 則遍於一國。 如此則入孝出悌之美士, 親上死長之善俗, 何自而出乎? 且守令無私至公者, 則見讒於豪猾, 其柔軟劫弱者則畏讒而斂手。 政令之不行, 賦役之不均, 良以此也。 臣等願, 疾人之奸惡而慷慨直告者, 惡守令貪暴而無私陳告者, 皆不坐; 其事關宗社外, 以怨而訴平民者, 挾私而讒守令者, 竝坐挾私害人, 爲下賊上之罪, 移澆薄之風, 成忠厚之俗。
政府議得: "守令汎濫事, 若一於以部民而使不得現告, 則奸暴之徒, 懲惡無門。 只將誣告者, 痛理如何?"
其二曰, 禮義廉恥, 國之四維, 不可一日而無者也。 今我國家, 旣給科田, 又優祿俸, 待士之道, 可謂厚矣, 然給田一事, 似有未便。 (令)〔今〕 也, 不計受田多少, 以其陳告者給之。 是以, 廉恥無求者, 不得一結; 孜孜爲利者, 多至百結。 不均之嘆, 於是而生焉。 甚者, 窺覘生死, 至有陳告於未死之前者, 於廉恥何, 於士風何? 願自今, 不許陳告, 以其犯罪人及無後死人所受之田, 京中漢城府、外方觀察使, 報于戶曹, 戶曹考其朝士受與不受, 又考受田之多少, 以無者少者爲先折給, 則不均之嘆息, 而廉恥之風興矣。
議得: "一依司憲府受判, 以其前受田地多少, 陳告田地之數相考, 前受少者, 爲先折給何如?"
其三曰, 世道升降, 係乎人材之盛衰, 人材之盛衰, 係乎師道之得失。 今我國家, 內而成均, 外而鄕學, 皆置敎官, 以養人材, 可謂盛矣。 然成均, 一國學者所聚之地, 師表之選, 不可不重。 故卒宰臣權近、李詹, 相繼爲兼大司成, 敎養人材, 人材輩出, 今則其職闕焉。 臣等竊謂才不借於異代, 用何患於無人! 檢校判漢城府事、世子賓客趙庸, 學術之精, 才德之備, 一時學者素所心服。 伏惟殿下, 以趙庸除兼大司成, 使之書筵進講之餘, 仕於成均, 以訓學者, 則師表立而敎養得矣。 又郡縣學長供億之廩, 今皆停罷, 於殿下崇學之意, 有所嫌矣。 伏惟殿下, 復學長之廩, 以示盛朝勸學之意。
議得: "依所申施行, 但學長之廩, 除居其郡者外, 皆給之何如?"
其四曰, 倭寇之於我國, 自庚寅以來, 侵掠郡縣, 殺戮生民, 爲患極矣。 惟我盛朝, 武以禦侮, 文以致治, 然倭之爲人, 性狠反覆難信, 今乃授之官職, 宿衛宮庭, 買爲奴婢, 布列州郡, 甚爲未便。 且以慶尙一道觀之, 其數幾至二千, 或劫家長之妻, 或殺隣里之人, 此足爲履霜之戒也。 自古外夷之人, 初若至微, 而終必難制, 臣等恐此輩一朝蜂起, 則亦强敵也。 若其父兄寇我邊鄙, 果爲我攻其父兄乎? 赴戰倒戈, 未可知也。 又托以求賣其子弟, 爲我奴婢, 置我州郡, 其心亦未可知也。 以前日多殺我民言之, 雖盡殺之可也。 願自今買得倭人, 以爲奴婢, 一皆痛禁, 以杜禍萌。
議得: "依所申施行何如?"
其五曰, 城中之死人, 或棄之街路, 或置之溝巷, 誠不可忍見也。 漢城府令五部隨卽埋置, 肅淸王都, 《六典》所載盛朝之良法, 今徒爲文具, 可謂痛心。 願別立一官, 名之曰埋置院, 專掌其事, 周行城中, 如有死而棄者, 限相距十家, 推其所從, 得之則徵主家錢, 以供埋置之資; 不得則出十家人, 以埋其屍; 或家貧人死, 不能葬者, 許令陳告而埋之, 以厚風俗, 以淸王都。
議得: "依《六典》施行, 其中不用心考察, 則憲司糾理何如?"
其六曰, 人之所賴以生者, 衣食而已。 吾東方始知桑麻, 而不知木綿之爲何物也。 諫議大夫文益漸奉使中原, 得種而還, 以惠吾民。 上自卿士, 下至庶人, 上衣下裳, 皆以此爲之, 其有功於民, 可謂大矣。 故國家已擧褒賞之典, 追崇爵秩, 可謂稱矣。 然稽之於古, 凡有功於一道者, 皆設祠堂而祀之。 況有功於一國者乎? 願構祠堂於貫鄕, 給祭田而祀之, 以示盛朝崇德報功之意。
議得: "已曾褒賞, 其構祠堂給祭田, 姑且停之。"
其七, 《經》曰: "生事之以禮, 死葬之以禮。" 故喪貴致哀, 禮存寧儉。 恭惟太祖卽位之初, 立經陳紀, 喪葬之禮, 具載《六典》, 惟葬墳之制, 未有定焉。 世之爲葬者, 其棺槨衣衾石室石門石人石床, 富者僭擬公侯, 貧者殫盡財力, 此豈祖考之意乎? 以人子之心觀之, 則猶可也, 於名分之僭, 何如? 臣等願令攸司, 定士大夫葬墳之制, 以禁奢侈。
議得: "依所申施行何如?"
其八曰, 國以民爲本, 民以食爲命。 今國家慮糧餉之備, 督納民庶往年之糶, 歲前絶食者, 頗多有之。 監司待國家之命, 然後發倉賑貸, 臣等恐飢饉之民, 不能及救也。 願自今民有絶食者, 監司卽令守令發倉賑貸, 然後報國家, 以固邦本。
議得: "依前例施行何如?" 上曰: "他條, 可從議得, 惟賑濟一事, 則義倉本爲民而設也。 境有飢民, 先發倉而賑之, 隨報監司可也。" 政府更啓曰: "吾東方壤地褊小, 自都至邊, 道途不遠, 儻有飢民, 待朝廷之命, 未爲晩也。 若有擅發之令, 則恐愚吏不察濫費, 調度無節, 而倉廩虛矣。" 從之。
- 【태백산사고본】 8책 19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1책 540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농업-전제(田制) / 농업-면작(綿作) / 외교-왜(倭) / 구휼(救恤) / 풍속-예속(禮俗)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법-치안(治安)
- [註 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