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 징수의 완화 및 호패법 강화 등에 관한 좌헌납 송희경 등의 편민 사의
좌헌납(左獻納) 송희경(宋希璟) 등이 편민 사의(便民事宜)를 올렸는데, 그 소(疏)의 대강은 이러하였다.
"삼대(三代)226) 와 한(漢)나라가 그 역년(歷年)이 많았던 것은 8백 년이고, 적은 것은 4백 년에 내려가지 않았으니, 이것은 모두 은택(恩澤)으로 인심(人心)을 결합시켜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잊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뒤로부터 내려오면서 많은 것은 60년, 적은 것은 겨우 20년이었으니, 이것은 모두 백성에게 원망을 샀기 때문에, 그 근본이 단단하지 못했던 까닭입니다. 또 우리 나라로 말한다면 무진년 회군(回軍)하던 때에는 인심(人心)이 지극히 어진 사람에게 돌아왔기 때문에, 태조(太祖)께서 포학한 것을 금지하고 해로운 것을 제거하여 처음으로 방가(邦家)를 세우셨으며, 무인년 정사(定社)하던 날에는 인심(人心)이 지극히 덕(德)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왔기 때문에, 전하께서 흉당(凶黨)을 주토(誅討)하여 대위(大位)를 바루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고금(古今) 천하(天下) 국가(國家)의 치란(治亂)·흥망(興亡)이 오직 군사[甲兵]의 성(盛)함과 저축(貯蓄)의 많은 것에 있는 것만 아니라, 인심(人心)의 향배(向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영명(英明)한 자품(資稟)으로 경사(經史)를 널리 보시어 고금(古今) 치란(治亂)·흥망(興亡)의 자취에 대해 깊이 살피시고 빠뜨림이 없으신데, 오늘날에 있어서만 인심(人心)을 살피지 못하는 것이 가하겠습니까?
몇 해 전부터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서로 겹쳐서 공사(公私)의 저축(貯蓄)이 모두 넉넉치 못하고, 하물며, 금년에는 수재로 인하여 백성들이 세전(歲前)에 먹을 것이 없는 자가 많습니다. 그런데, 국가에서 군량(軍糧)의 준비를 염려하여 하루아침에 갑자기 식량을 족하게 하려 하니, 각도(各道)의 감사(監司)가 국가에서 염려하는 것을 알고, 전지(田地)를 답험(踏驗)할 적에 실(實)을 취(取)하기를 조금 많게 하여, 백성들이 이미 실망하고 있는데, 또 경차관(敬差官)을 보내어 둔전(屯田)의 조(租)를 거두고 의창(義倉)의 환자[糶]를 징수하니, 경차관이 된 자가 오직 직책을 다하는 것만 생각하고 민생(民生)의 휴척(休戚)은 돌보지 아니하여, 징수하고 독촉하기를 심히 엄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곡식이 있는 자는 조석거리까지 모두 실어다 바치고, 곡식이 없는 자는 집안의 가산(家産)을 팔아서 바치는데, 심한 자는 농우(農牛)와 토전(土田)까지도 모두 팝니다. 신 등은 알지 못하거니와, 이들 백성들이 장차 입을 닫고 배를 주리며 부역(賦役)에 이바지할 것입니까? 아니면, 장차 처자(妻子)를 이끌고 곡식이 있는 곳으로 나가겠습니까? 말을 하자면 가위(可謂) 눈물이 흐를 지경입니다.
그리고, 또, 도망한 절호(絶戶)에 대해서는 일족(一族)을 추심(推尋)하여 물리[償]기도 하고, 혹은 이웃에게 징수하니, 이것은 곤궁(困窮)한 백성의 입안의 먹이를 빼앗아서 국가의 군량의 자료를 준비하는 것이니, 말하자면 가위(可謂) 통곡할 일입니다. 자고(自古) 이래로 백성이 근심하고 원망하는데 국가가 편안한 일은 없었습니다. 수(隋)나라가 낙구창(洛口倉)에 저축을 하였는데 이밀(李密)이 이것을 의뢰하였고, 당(唐)나라가 대영고(大盈庫)에 축적(蓄積)하였는데 주자(朱泚)가 이를 썼으니, 대저 양식(糧食)은 준비하지 않을 수 없으나, 강제로 거두어서 민생(民生)을 곤(困)하게 할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만일 국가에 변(變)이 있어서 피곤한 백성들을 몰아 적(敵)에게 나가게 한다면, 어찌 윗사람에게 친하게 하고 어른을 위하여 죽겠습니까? 무왕(武王)의 맹진(孟津)의 맹서(盟誓)에 이르기를, ‘수(受)227) 는 억만(億萬)의 오랑캐[夷人]가 있으나 오직 억만(億萬) 마음이요, 나는 신(臣) 3천(三千)이 있으나 오직 한마음[一心]이라.’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어찌 무왕(武王)으로 법을 삼지 않으십니까? 신 등은 원컨대, 곡식이 없는 백성이 타간 조미(糶米)228) 는 일체 모두 독촉하는 것을 정지하여 풍년(豐年)을 기다리고, 도망한 백성에 대해서는 일족(一族)과 이웃[四隣]에게 〈대신〉 징수하는 것을 일체 모두 정지하여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어진 은혜를 베풀어 민생(民生)을 편케 하소서.
또 전함 품관(前銜品官)은 비록 관작(官爵)의 이름은 있으나 담석(儋石)229) 의 저축도 없는 자가 매우 많습니다. 이미 모두 품마(品馬)230) 에 지쳤는데, 또 품미(品米)231) 를 거두니 참으로 불쌍합니다. 신 등은 원컨대, 전지(田地)를 받은 것이 없는 전함 관원(前銜官員)은 연호(煙戶)의 예(例)에 따라서 거두고, 전지(田地)를 받은 자는 그 직질(職秩)을 논(論)하지 말고 받은 전지(田地)의 수(數)에 따라서 거두소서.
그리고, 무비(武備)에 이르러서는 오늘날의 급무(急務)이니, 이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나, 각도(各道) 감사(監司)나 절제사(節制使)가 모두 왕실(王室)에 충성을 다하는 자들이니, 가을부터 겨울이 지나기까지 군용(軍容)을 점고(點考)하기를 자세히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충직(忠直)하고 무사(武事)를 아는 자를 가려서 말 한 필을 주어 보내어 사마 갑병(司馬甲兵)의 허실(虛實)을 보고, 감사(監司)·절제사(節制使)의 능부(能否)를 살펴서 위에 아뢰게 하여 그 출척(黜陟)을 밝힌다면, 족히 장수가 힘쓰고 군사가 강하게 되어, 향(向)하는 곳마다 대적(對敵)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반드시 대신(大臣)을 보내어 종관(從官)을 거느리고 군현(郡縣)을 소란하게 하며, 백성들을 피로하게 한 연후에야, 무비(武備)가 정(精)하게 되겠습니까? 원컨대, 순찰(巡察)을 보내는 것을 정지하여 군현(郡縣)을 편안케 하소서.
또 신 등은 초야(草野)에서 생장(生長)하여 민간(民間)의 일을 안 지가 오랩니다. 백성이 항산(恒産)이 있고 항심(恒心)이 있는 자는 그 고을[官]에 호적(戶籍)을 붙여 부역(賦役)에 이바지하지만, 항산도 없고 항심도 없는 자는 금년엔 남쪽 고을의 호활(豪猾)한 자에게 숨고, 명년엔 북쪽 고을의 향원(鄕愿)에게 옮겨 가, 똑같은 국민이면서도 징세(徵稅)와 부역(賦役)을 모피(謀避)하니, 간사한 백성입니다. 국가에서 비록 대신(大臣)을 보내어 호수(戶首)를 매질하여 그 사람을 찾아내어 이름을 호적(戶籍)에 붙인다 하더라도, 그 백성은 이미 항심(恒心)이 없어, 오늘에 호적에 이름을 붙이고 명일에 유리(流離)하여 도망하니, 한갓 백성을 소란하게 하고 군액(軍額)을 번잡하게 할 뿐입니다. 신 등은 원컨대, 안팎에 영(令)을 내려 모두 호패(戶牌)를 주고, 호패가 없는 자는 조사하여 죄를 주면, 전일에 유리하여 도망한 자가 모두 호패를 받으려고 오늘에 자수(自首)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채택하여 시행하소서."
임금이 보고 노(怒)하여 하윤(河崙)·성석린(成石璘)·조영무(趙英茂) 등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국가에서 식량(食糧)을 족(足)하게 할 방도를 강구한 것이 하루아침 하루저녁이 아닌데, 어찌 갑자기 식량을 족하게 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지금 정부(政府)에서 말하는 것은 백성들이 의창(義倉) 곡식을 꾸어간 것을 거두어 군자(軍資)를 비축하자는 것이지, 새 법을 만들어 거두자는 것이 아닌데, 어찌 입안의 먹이를 빼앗는다고 말하는가? 수(隋)나라·당(唐)나라의 창름(倉廩)은 모두 유일(遊逸)의 공봉(供奉)을 위한 것이고, 오늘날은 긴급한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니, 비교가 되지 않는데, 어째서 수·당을 끌어대어 말하는가? 지금 상국(上國)에 변(變)이 있고, 국가에 경계하는 마음이 있어 특별히 군량(軍糧)을 준비하는 것이지, 대지(臺池)나 조수(鳥獸)·환관(宦官)·궁첩(宮妾)을 위한 것이 아니다. 간관(諫官)이 일을 말하는 데는 비록 마땅히 박절(迫切)하게 해야 되지만, 어떻게 없는 일을 가지고 이와 같은 말을 할 수 있는가? 내가 옥(獄)에 가두려고 하는데 어떤가?"
하니, 정부(政府)에서 말하기를,
"간신(諫臣)의 말이 비록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옥(下獄)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지금 용서한다면 과감하게 말하는 선비가 나올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정부(政府)·대언(代言)에게 명하여 송희경(宋希璟) 등을 불러 힐문(詰問)하니, 송희경 등이 대답하기를,
"신 등의 뜻은 새 법을 만들어 백성에게 거두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백성이 비록 일찍이 꾸어갔다 하더라도, 지금 흉년이 들었으니, 만일 다 징수한다면 백성들이 장차 끼니를 잃을 것입니다. 국가를 가진 자가 어찌 한갓 저축(貯蓄)의 많은 것만 믿을 수 있습니까? 민심(民心)의 화(和)한 것이 실로 나라를 보전하는 방도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술[酒]을 주어 보내었다.
- 【태백산사고본】 7책 18권 50장 A면【국편영인본】 1책 521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정론-정론(政論) / 호구(戶口) / 행정(行政) / 역사-고사(故事) / 재정-전세(田稅) / 재정-역(役) / 군사-병참(兵站) / 군사-군정(軍政) / 구휼(救恤)
- [註 226]삼대(三代) : 하·은·주(夏殷周).
- [註 227]
수(受) : 주(紂)의 이름.- [註 228]
조미(糶米) : 환자(還子).- [註 229]
담석(儋石) : 담(儋)은 2석(石), 석(石)은 1석(石)으로 양(量)의 단위.- [註 230]
품마(品馬) : 관원이 품등(品等)에 따라 내는 말.- [註 231]
품미(品米) : 관원이 품등에 따라 내는 쌀.○左獻納宋希璟等, 上便民事宜。 疏略曰:
三代及漢, 歷年多者八百, 小者不減四百, 皆以恩結人心, 人不能忘故也。 自是以降, 多者六十年, 少者纔二十年, 皆結怨於民, 本根不固故也。 且以國家言之, 戊辰回軍之時, 人心歸于至仁, 故太祖禁暴除害, 肇造邦家; 戊寅定社之日, 人心歸于至德, 故殿下誅討凶黨, 以正大位。 由是觀之, 古今天下, 國家治亂興亡, 不惟在於甲兵之盛, 蓄積之多, 係乎人心向背而已。 殿下以英明之資, 博覽經史, 其於古今治亂興亡之迹, 深燭無遺, 獨於今日, 不察人心可乎? 頃年以來, 水旱相仍, 公私蓄積, 俱爲不(瞻)〔贍〕 。 況今年因水災, 百姓之歲前無食者多矣。 國家慮糧餉之備, 欲於一朝, 遽以足食, 各道監司, 知國家之慮, 而驗田之際, 取實差多, 民望已觖, 又遣敬差, 收屯田之租, 徵義倉之糶, 其爲敬差官者, 惟以盡職爲念, 而不顧民生之休戚, 徵督甚嚴。 其有穀者, 盡朝夕之食而輸之, 其無穀者, 鬻一家之産而納之, 甚者, 農牛土田, 亦皆賣之。 臣等未知斯民, 將閉口枵腹而供賦役乎? 將携妻挈子, 就有粟乎? 言之可謂流涕矣。 又於逃亡絶戶, 或推一族而償之, 或當四隣以徵之, 是奪窮民口中之食, 以備國家糧餉之資, 言之可謂痛哭矣。 自古以來, 百姓愁怨, 而國家安寧者, 未之有也。 隋貯洛口倉而李密資之, 唐積大盈庫而朱泚用之。 夫糧餉不可不備, 然不可强斂, 以困民生也明矣。 若國家有變, 則驅疲困之民而赴敵, 其能親其上死其長乎? 武王 孟津之誓曰: "受有億萬夷人, 惟億萬心, 予有臣三千, 惟一心。" 殿下豈不以武王爲法乎? 臣等願無穀之民所糶之米, 一皆停督, 待其豐年; 逃亡之民, 一族四隣, 一皆停徵, 待其復還, 以施仁恩, 以安民生。 又前銜品官, 雖有官爵之名, 而無擔石之資者頗多, 已皆困於品馬, 又收品米, 誠可矜恤。 臣等願無受田前銜官, 隨烟戶之例收之; 受田者, 勿論職秩, 隨受田之數而收之。 至若武備, 今日之急務, 不可不慮。 各道監司節制使, 皆盡忠王室者, 自秋過冬, 點考軍容詳矣。 殿下擇其忠直知武事者, 給一馬而遣之, 觀士馬甲兵之虛實, 察監司節制之能否, 轉聞于上, 以明黜陟, 則足以致士勵兵强, 而所向無敵矣。 何必遣大臣率從官, 煩擾郡縣, 疲勞百姓而後, 武備得以精乎? 臣等願停巡察之遣, 以安郡縣。 且臣等生長草野, 知民間之事久矣。 民之有恒産而有恒心者, 籍付其官, 以供賦役; 無恒産而無恒心者, 今年匿於南州之豪猾, 明年移於北郡之鄕愿。 鈞是國民, 而謀避征役, 乃奸民也。 國家雖遣大臣, 鞭撻戶首, 推得其人, 付名于籍, 然其民已無恒心, 今日付籍, 明日流亡, 徒以擾民, 煩軍額耳。 臣等願下令中外, 皆給戶牌, 無牌者, 推而罪之, 則前日之流亡者, 皆欲受牌而自首於今日矣。 伏惟殿下採擇施行。
上覽之怒, 以示河崙、成石璘、趙英茂等曰: "國家講求足食之道, 非一朝〔一〕 夕, 何得云遽以足食乎? 今政府所言民之貸義倉穀者, 收之以備軍資耳, 非設新法以斂之也。 何以言奪口中之食乎? 隋、唐倉廩, 皆爲遊逸之奉, 非今日備急之比, 何以引隋、唐而言乎? 上國有變, 國有戒心, 特以備糧餉耳, 非以爲臺池鳥獸宦官宮妾之奉也。 諫官言事, 雖當迫切, 豈可以所無之事, 爲若是之言乎? 予欲下之於獄, 如何?" 政府言: "諫臣之言, 雖不中, 不可下獄。 若今赦之, 敢言之士出矣。" 乃令政府代言召希璟等, 詰之。 希璟等對曰: "臣等之意, 非謂設新法以斂民也。 民雖曾貸之, 今玆歲凶, 若盡徵之, 則民將失食矣。 有國家者, 豈徒恃蓄積之多哉! 民心之和, 實保國之道也。" 上命賜酒而遣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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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註 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