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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18권, 태종 9년 11월 14일 임오 2번째기사 1409년 명 영락(永樂) 7년

군량의 확보, 진헌마, 왜인의 본국 거주 등에 관한 문제점을 지적한 사간원의 시무책

사간원(司諫院)에서 시무(時務) 두어 조목을 올렸다.

"1. 전(傳)에 말하기를, ‘나라에 3년의 저축(貯蓄)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구실을 못한다.’ 하였습니다. 우리 국가가 근년 이래로 전라도(全羅道)의 군자(軍資)는 제주(濟州)를 진제(賑濟)하고, 경상도(慶尙道)의 군자(軍資)는 왜노(倭奴)에게 넉넉히 주어서, 두 도(道)의 창고(倉庫)가 거의 비고 탕갈(蕩竭)되었으니 심히 염려됩니다. 오직 저축이 있는 곳은 서북(西北) 한 도(道)뿐인데, 서북(西北)의 지경은 중국과 연접하여 얼음이 어는 때를 당하면 채찍질 한 번에 건널 수 있습니다. 하물며, 지금 중국에 군사가 일어났으니, 만일 하루아침의 변(變)이 있어 홍건적(紅巾賊)이 왔던 때처럼 먼저 이 도(道)를 점거한다면, 국가에서 장차 어떻게 응하겠습니까? 일이 절박해져서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의주(義州)·강계(江界)에 비록 절제사(節制使)를 보냈으나, 군세(軍勢)가 단약(單弱)하여 막기가 어려울까 두려우니, 신 등은 원하건대, 평양(平壤) 이북의 굳센 군사[勁兵]를 훌륭한 장수[良將]에게 주어 요충(要衝)에 둔수(屯戍)시키되, 중국이 평정하고 얼음이 풀리기를 기다려서 파하소서.

1. 나라에 중한 것은 군사이고, 군사에 중한 것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周)나라 제도에 군사를 맡은 관원을 ‘사병(司兵)’이라 하지 않고 ‘사마(司馬)’라 하였으니, 말이 나라에 쓰임이 중한 것입니다. 우리 국가가 땅덩이가 작고 말도 또한 한도가 있는데, 고황제(高皇帝) 때부터 건문(建文)에 이르기까지 그 바친 말이 몇만 필이나 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상국(上國)에서 또 마필(馬匹)을 요구하여 그 수효가 심히 많은데, 유사(有司)가 기한을 정해 독촉하여 비록 말 한 필이 있는 자라도 모두 관(官)에 바치니, 이 같이 하면 나라에 장차 말이 없을 것이니 말을 하면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당(唐)나라 태종(太宗)과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모두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고, 거란(契丹)의 군사와 홍건적(紅巾賊)이 우리를 침구(侵寇)하다가 먼저 망하였는데, 이것은 산천(山川)이 험하고 장수가 훌륭한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말이 있었던 까닭입니다. 신 등은 생각하기를, 사대(事大)의 예(禮)로 말하면 바치지 않을 수 없고, 종사(宗社)의 계책으로 말하면 많이 바칠 수 없는 것이라 여깁니다. 또 어찌 오늘에 요구하고 명일에 요구하지 않을지 알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사대(事大)의 예(禮)와 종사(宗社)의 계책으로 참작해 시행하소서.

1. 전하께서 즉위(卽位)하신 이래 문(文)을 높이고 무(武)를 숭상하여, 선비는 힘쓰고 군사는 강하여 그 위엄(威嚴)이 인적(隣敵)에게 가해져서, 유구(琉球)·섬라(暹羅)·왜국(倭國)의 사람이 내부(來附)하지 않음이 없으니, 진실로 천재(千載)에 드문 일입니다. 그러나, 왜노(倭奴)란 것은 성품이 사납고 심정이 악하여 대대로 도둑질을 행하니 백성들의 원수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백성들과 더불어 주군(州郡)에 섞여 살며 관직(官職)을 받아서 대궐 뜰에 숙위(宿衛)하는 데에까지 이르렀으니, 심히 온당치 못합니다. 진(晉)나라 초년(初年)에 여러 오랑캐[胡]가 중국에 섞여 살고 있었는데, 곽흠(郭欽)강통(江統)이 모두 무제(武帝)에게 ‘변방 밖으로 몰아내어 난(亂)의 계제(階梯)를 끊으라.’고 권하였으나, 무제가 듣지 않았다가, 20여 년 뒤에 이(伊)·락(洛)203) 의 사이가 마침내 오랑캐 지역이 되었고, 당(唐)나라 초년(初年)에 돌궐(突厥)이 그 부락(部落)을 잃고 모두 장안(長安)에 이르니, 위징(魏徵)이 태종(太宗)에게 권하기를, ‘차마 다 죽일 수는 없으니 마땅히 고토(故土)로 돌려보내고, 중국에 머물러 둘 것이 아니라.’ 하였으나, 태종이 듣지 않았다가, 드디어 당나라 왕실로 하여금 대대로 융적(戎狄)의 난(亂)이 있게 하였으니, 이것은 지난 일의 밝은 거울입니다. 신 등은 두렵건대, 혹시 내란(內亂)이 있으면 이들 무리가 마침내 외환(外患)이 될까 염려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고금(古今)을 참작하여 재탁(裁度)해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소(疏)를 보고 말하였다.

"간관(諫官)의 말이 진실로 옳다. 군량(軍糧)을 준비할 계책을 정부(政府)로 하여금 다시 의논해 아뢰게 하라."


  • 【태백산사고본】 7책 18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1책 517면
  • 【분류】
    재정-창고(倉庫) / 교통-마정(馬政) / 정론(政論)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참(兵站) / 역사-고사(故事)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외교-유구(琉球)

  • [註 203]
    이(伊)·락(洛) : 이수(伊水)·낙수(洛水).

○司諫院上時務數條:

一, 《傳》曰: "國無三年之畜, 國非其國。" 惟我國家, 近年以來, 全羅軍資, 賑濟濟州; 慶尙軍資, 優給倭奴, 二道倉庫, 幾乎虛竭, 甚可慮也。 惟畜積所在, 西北一道而已。 西北之境, 接於中國, 時當氷合, 一鞭可渡。 況今中國兵興, 若有一朝之變, 如紅賊之來, 先據此道, 國家將何以應之乎? 事之至迫, 悔之何及! 義州江界, 雖遣節制, 軍勢單弱, 恐難禦之。 臣等願以平壤以北之勁兵, 授之良將, 屯戍要衝, 待中國平定氷解而罷。 一, 國之所重者兵也, 兵之所重者馬也, 故制掌兵之官, 不曰司兵, 而曰司馬, 馬之於國, 其用重矣。 我國家壤地褊小, 馬亦有限, 自高皇帝至于建文, 所獻之馬, 不知其幾萬匹。 今者, 上國又求馬匹, 其數甚多, 有司程督, 雖有一馬者, 皆納於官。 如此則國將無馬, 言之可爲流涕矣。 太宗煬帝, 皆不克而還; 丹兵紅賊寇我而先亡, 此非惟山川之險、將帥之良, 亦以有馬故也。 臣等謂以事大之禮言之, 不可不獻; 以宗社之計言之, 不可多獻。 又安知今日求之, 而明日不求耶? 伏惟殿下, 以事大之禮、宗社之計, 參酌施行。 一, 殿下卽位, 崇文尙武, 士勵兵强, 威加隣敵, 琉球暹羅倭國之人, 莫不來附, 誠千載之罕遇也。 然倭奴者, 性狠情惡, 世爲寇盜, 百姓之讎也。 今與吾民, 雜處州郡, 以至受職宿衛闕廷, 甚爲未便。 初, 諸雜處中國, 郭欽江統, 皆勸武帝驅出塞外, 以絶亂階, 武帝不從, 後二十餘年, 之間, 遂爲(氈毬)〔氈裘〕 之域。 初, 突厥亡, 其部落皆至長安, 魏徵太宗曰: "不忍盡殺, 宜縱還故土, 不可留之中國。" 太宗不聽, 遂使室世有戎狄之亂, 此前事之明鑑也。 臣等恐儻有內亂, 此類終爲外患。 伏惟殿下參酌古今, 聖裁施行。

上覽之曰: "諫官之言, 良是。 備糧之策, 令政府更議以聞。"


  • 【태백산사고본】 7책 18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1책 517면
  • 【분류】
    재정-창고(倉庫) / 교통-마정(馬政) / 정론(政論)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참(兵站) / 역사-고사(故事)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외교-유구(琉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