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원릉에 비석을 세우다. 비문은 권근의 찬
건원릉(健元陵)에 비를 세웠다. 비문(碑文)은 이러하였다.
"하늘이 유덕(有德)한 이를 돌보아 치운(治運)을 열어 주실 적에는 반드시 먼저 이적(異蹟)을 나타내어 그 부명(符命)을 밝게 하니, 하(夏)나라에서는 현규(玄圭)093) 를 내려 준 일이 있었고, 주(周)나라에서는 협복(協卜)094) 의 꿈이 있었다. 한(漢)나라 이후로 대대로 이러한 일이 있었으니, 모두 천수(天授)에서 나온 것이요, 인모(人謀)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 공덕(功德)이 이미 높았으며, 부명(符命)도 또한 나타났었다. 꿈에 어떤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서, 그것을 주면서 말하기를, ‘공(公)은 마땅히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로잡으리라.’ 하였으니, 하(夏)나라의 현규(玄圭)와 주(周)나라의 꿈과 동부(同符)하다고 하겠다. 또 어떤 이인(異人)이 대문에 와서 글을 바치며 이르기를, ‘지리산(智異山) 암석(巖石) 가운데서 얻은 것이다.’ 하였는데, 거기에는, ‘목자(木子)095) 가 다시 삼한(三韓)을 바로잡으리라’는 말이 있었다. 그러므로 사람을 시켜 나가서 맞이하게 하였더니, 이미 가버리고 없었다. 서운관(書雲觀)의 옛 장서(藏書)인 비기(秘記)에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란 것이 있는데, ‘건목득자(建木得子)096) ’라는 말이 있다. 조선(朝鮮)이 곧 진단(震檀)이라고 한 설(說)은 수천년 전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지금에 와서야 증험되었으니, 하늘이 유덕(有德)한 이를 돌보아 돕는다는 것은 진실로 징험이 있는 것이다.
신(臣)이 삼가 《선원록(璿源錄)》을 살펴보니, 이씨(李氏)는 전주(全州)의 망성(望姓)097) 이었다. 사공(司空) 휘(諱) 이한(李翰)은 신라에 벼슬하여 종성(宗姓)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6세손(世孫) 이긍휴(李兢休)에 이르러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하였다. 13세손 황고조(皇高祖) 목왕(穆王)에 이르러 원조(元朝)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된 뒤, 4세를 습작(襲爵)하였는데, 모두 아름다운 업적을 이루었다. 원(元)나라의 정치가 쇠퇴하여지자, 황고(皇考) 환왕(桓王)은 돌아와서 고려의 공민왕(恭愍王)을 섬겼다.
지정(至正) 신축년에 홍건적(紅巾賊)이 고려의 서울[王京]을 함락하니, 공민왕은 남쪽으로 피난하고, 군사를 보내어 싸워 이겨 수복(收復)하였는데, 우리 태조께서 맨 먼저 첩서(捷書)를 올렸다. 이듬해 임인년에 호인(胡人) 나하추(納哈出)를 쳐서 패주(敗走)시켰고, 또 이듬해 계묘년에 위왕(僞王) 탑첩목(塔帖木)을 물리쳐 쫓았다. 공민왕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 여러 번 벼슬이 올라 장상(將相)에 이르러 중외(中外)에 출입하였으나, 경사(經史)를 읽기를 좋아하여 부지런히 읽고 게으르지 않았으니, 세상을 구제하는 도량(度量)과 호생지덕(好生之德)은 지성(至誠)에서 나온 것이었다. 공민왕이 훙(薨)하자 이성(異姓)098) 이 왕위에 오르니, 권간(權奸)이 나라를 마음대로 하여 조정의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해적(海賊)이 나라 안 깊숙이 들어와 군현(郡縣)을 불지르고 약탈하였다.
홍무(洪武) 경신년에 우리 태조께서 운봉(雲峰)에서 싸워 이겨, 동남 지방이 편안하여졌다. 무진년에 시중(侍中) 최영(崔瑩)이 권간(權奸)들을 주륙(誅戮)할 적에 지나치게 참혹하게 하였는데, 우리 태조의 힘을 입어 살아난 자가 자못 많았다. 최영이 태조를 시중으로 삼고, 이어서 우군 도통사(左軍都統使)의 절월(節鉞)을 주어 억지로 요동(遼東)을 치게 하였다. 군사가 위화도(威化島)에 머물렀을 때, 앞장서서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정의(正義)에 의한 깃발을 돌이켰다. 군사가 강 언덕에 오르자 큰물이 섬을 휩쓸어 버리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최영을 잡아서 물리치고, 대신 명유(名儒) 이색(李穡)을 좌시중(左侍中)으로 삼았다. 바로 이때 권간(權奸)들이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광패(狂悖)한 자들이 중국과 흔극(釁隙)을 만들어, 위망(危亡)이 눈앞에 닥치고 화란(禍亂)이 헤아리기 어려웠었는데, 우리 태조의 돌이킨 힘이 아니었더라면 나라가 위태하였을 것이다. 이색(李穡)이 말하기를, ‘지금 공의 의거(義擧)는 중국을 높인 것인데, 집정 대신(執政大臣)이 친히 입조(入朝)하지 않으면 불가(不可)합니다.’ 하고, 날을 받아 명나라 서울로 가려 하매, 태조가 여러 아들 중에서 지금의 우리 주상 전하(主上殿下)099) 를 골라 이색과 함께 조현(朝見)하게 하였더니, 고황제(高皇帝)가 가상(嘉賞)히 여겨 돌려보냈다.
기사년 가을에 황제가 이성(異姓)100) 이 왕이 된 것을 문책하였으므로, 태조께서 여러 장상(將相)과 더불어 왕씨(王氏)의 종친(宗親)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선택하여 왕으로 세우고, 마음을 다하여 정사를 보필하였다. 사전(私田)을 개혁하고 용관(冗官)을 도태시키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두 기뻐하였다. 공(功)이 높아지자 시기(猜忌)를 받아, 참소(讒訴)와 간계(奸計)가 번갈아드니, 정창군(定昌君)이 자못 의혹하였다. 태조(太祖)는 지위가 성만(盛滿)101) 하다고 하여 노퇴(老退)하기를 청하였으나, 사퇴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그때 마침 서쪽 지방에 행차하였다가 병을 얻어 돌아왔는데, 이 틈을 타서 모해(謀害)하는 자들이 일을 더욱 급박하게 만들었다. 우리 전하(殿下)가 시기에 응해 변(變)을 제압하여, 모든 모해(謀害)가 와해되었다.
홍무(洪武) 임신년 가을 7월 16일에, 전하가 대신(大臣)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 등 52명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왕으로 추대(推戴)하니, 신료(臣僚)들과 부로(父老)들이 모의하지 아니 하고도 모두 뜻을 같이하였다. 태조(太祖)가 정변(政變)을 듣고 놀라 일어나서 두세 번 굳이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왕위에 올랐다. 집의 섬돌을 내려오지 아니하고 한 집안을 나라로 화(化)하게 하였으니, 하늘이 유덕(有德)한 이를 계도(啓導)하여 돕지 아니 하고서야 누가 능히 이같이 할 수 있겠는가! 즉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조반(趙胖)을 중국에 보내어 주문(奏聞)하니, 황제가 조(詔)하기를, ‘삼한(三韓)의 백성들이 이미 이씨(李氏)을 높였고, 백성들은 병화(兵禍)가 없이 사람마다 각각 하늘이 주는 즐거움을 즐기고 있으니, 이는 상제(上帝)의 명(命)이다.’ 하였다. 또 칙명(勅命)하기를, ‘나라 이름은 무엇으로 고쳐 호칭하려 하는가?’ 하였으므로, 즉시 예문 학사(藝文學士) 한상질(韓尙質)을 보내어 주청(奏請)하니, 또 조(詔)하기를, ‘조선(朝鮮)이란 명칭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을 근본으로 하여 지었으면 좋겠다. 하늘을 몸받아 백성을 기르고, 길이 후사(後嗣)를 창성하게 하라.’ 하였다. 우리 태조(太祖)의 위엄(威嚴)과 명성(名聲)과 의열(義烈)이 천자(天子)에게까지 높이 들려서 황제(皇帝)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에, 고명(誥命)을 청하자 문득 유음(兪音)을 받게 된 것이니,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3년을 지난 갑술년 여름에 나라를 모함하는 자가 있어, 황제가 친아들을 보내어 입조(入朝)시키라고 명하였다. 태조께서 우리 전하가 경서(經書)에 능통하고 사리(事理)에 통달하여 여러 아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하여, 즉시 보내어 명(命)에 응하게 하였다. 명나라에 이르러 부주(敷奏)한 것이 황제의 뜻에 맞으니, 우대하여 돌려보냈다. 그해 겨울 11월에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짓고 종묘(宗廟)를 세웠으며, 일찍이 4대(四代)를 추존(追尊)하여 황고조(皇高祖)를 목왕(穆王)으로, 배위(配位) 이씨(李氏)를 효비(孝妃)로, 황증조(皇曾祖)를 익왕(翼王)으로, 배위 최씨(崔氏)를 정비(貞妃)로, 황조(皇祖)를 도왕(度王)으로, 배위 박씨(朴氏)를 경비(敬妃)로, 황고(皇考)를 환왕(桓王)으로, 배위 최씨(崔氏)를 의비(懿妃)로 하였다. 예악(禮樂)을 닦고 제사하는 일을 삼가며, 장복(章服)102) 을 정하여 관등(官等)의 위의(威儀)를 구분하고,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육성하며, 봉록(俸祿)을 후하게 하여 선비를 권장하고, 소송(訴訟)을 바르게 판결하며, 수령(守令)을 신중히 뽑았다. 피폐한 정치를 모두 개혁하고, 여러가지 업적이 빛나니, 해구(海寇)가 와서 복종하고, 온 나라 안이 평안하여졌다. 우리 태조(太祖)의 높고 넓은 성덕(盛德)은 참으로 이른바 하늘이 주신 지용(智勇)·총명(聰明)·신무(神武)·웅위(雄偉)의 임금이라고 하겠다.
간신(奸臣) 정도전(鄭道傳)이 표문(表文)의 글 때문에 중국 조정의 견책(譴責)을 받게 되자, 명(命)을 거역하려고 음모하여, 무인년 가을 8월에 우리 태조(太祖)가 편찮은 틈을 타서 어린 얼자(孽子)103) 를 끼고 자기의 뜻을 펴 보려고 하였는데, 우리 전하가 기미(幾微)를 밝게 살펴 이들을 섬멸하여 없애고, 적장(嫡長)이라 하여 상왕(上王)104) 을 세자(世子)로 세우도록 청하였다. 9월 정축일에 태조가 병이 낫지 않은 까닭으로 상왕에게 선위(禪位)하였다. 상왕은 계사(繼嗣)가 없고, 또 나라를 세우고 사직(社稷)을 안정시킨 것이 모두 우리 전하의 공적이라고 하여, 곧 세자로 책립(冊立)하였다. 경진년 가을 7월 기사일에 태조(太祖)에게 계운 신무 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의 호(號)를 올렸다.
11월 계유일에 상왕도 또한 병 때문에 우리 전하에게 선위하였다. 사신을 중국에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니, 영락(永樂) 원년 여름 4월에 황제가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어, 조(詔)와 인(印)을 받들고 와서 우리 전하를 국왕(國王)으로 봉(封)하고, 이어서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 등을 보내어 와서 전하에게 곤면 구장(袞冕九章)을 하사하였으니, 품계(品階)가 친왕(親王)과 동일하였다. 우리 전하가 양궁(兩宮)105) 을 봉양(奉養)하는데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하였다. 영락(永樂) 무자년 5월 24일 임신일에 태조께서 승하하니, 춘추가 74세이고, 재위(在位)가 7년이며, 늙어서 정사를 보지 않으신 지 11년이다. 갑자기 활과 칼만 남기시니,106) 아아, 슬프도다! 우리 전하께서 애모(哀慕)함이 망극(罔極)하여 거상(居喪) 중에 예(禮)를 다하였다. 책보(冊寶)를 받들어 태조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太祖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의 호(號)를 올리고, 이해 9월 초9일 갑인일에 성동(城東) 양주(楊州)의 경내 검암산(儉巖山)에 장사하고, 능(陵)을 건원릉(健元陵)이라 하였다. 부음(訃音)을 듣고 황제가 놀라고 슬퍼하여 파조(罷朝)107) 하고, 곧 예부 낭중(禮部郞中) 임관(林觀) 등을 보내어 태뢰(太牢)108) 의 예로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글의 대략은 이러하였다. ‘왕은 총명하고 사리에 통달하며 선(善)을 좋아하였으니, 천성에서 나온 것이며, 천도(天道)를 공경하여 순종하고, 의(義)을 들어 충성을 다하여 공순히 사대(事大)하기를 힘쓰며, 한 지방의 백성을 보호하고 긍휼(矜恤)히 하니, 우리 황고(皇考)께서 그 충성을 매우 아름답게 여겨 다시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고 내렸다. 왕의 뛰어난 공덕(功德)은 비록 옛날 조선의 어진 임금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 나을 수 없으리라.’ 하고, 또 고명(誥命)을 내려 시호(諡號)를 ‘강헌(康獻)’이라 하였다. 또 전하에게 칙유(勅諭)하고 부의(賻儀)를 특별히 후하게 내렸다. 남달리 사랑하는 은전(恩典)을 극진히 하여 유감(有感)됨이 없었으니 대개 우리 태조(太祖)의 하늘을 두려워하는 정성과 전하의 그 뜻을 이어받드는 효성이 전후(前後)에 서로 이어서, 천심(天心)을 잘 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종(始終)의 즈음에 있어 하늘과 사람이 위 아래에서 돕는 것이 이처럼 지극함을 얻은 것이니, 아아, 거룩하도다!
수비(首妃) 한씨(韓氏)는 안변(安邊)의 세가(世家)로서 증 영문하부사(贈領門下府事) 안천 부원군(安川府院君) 휘(諱) 한경(韓卿)의 딸인데, 먼저 훙(薨)하였다. 처음에 시호(諡號)를 절비(節妃)라고 하였다가, 뒤에 승인 순성 신의 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의 호(號)를 더하였다. 6남 2녀를 낳았는데, 상왕(上王)이 둘째이고 전하가 다섯째이다. 맏이는 이방우(李芳雨) 진안군(鎭安君)인데 먼저 졸(卒)했고, 세째는 방의(芳毅) 익안 대군(益安大君)인데 역시 먼저 졸(卒)하였다. 그 다음 네째는 이방간(李芳幹) 회안 대군(懷安大君)이고, 여섯째는 이방연(李芳衍)인데 과거에 올랐다가 곧 죽으니 원윤(元尹)을 증직(贈職)하였다. 장녀(長女)는 경신 궁주(慶愼宮主)인데 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에게 시집갔다. 같은 이씨가 아니다. 다음은 경선 궁주(慶善宮主)인데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에게 시집갔다. 차비(次妃) 강씨(康氏)는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윤성(康允成)의 딸인데, 처음에 현비(顯妃)를 봉하였으나 먼저 훙(薨)하자, 시호(諡號)를 신덕 왕후(神德王后)라고 하였다.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長男)은 이방번(李芳蕃)이니 공순군(恭順君)을 증직하였고, 다음은 이방석(李芳碩)이니 소도군(昭悼君)을 증직하였다. 딸은 경순 궁주(慶順宮主)이니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에게 시집갔는데, 역시 같은 이씨는 아니다. 모두 먼저 졸(卒)하였다. 상왕(上王)의 비(妃)는 김씨이니, 지금 왕대비(王大妃)를 봉하였으며, 증 문하 시중(門下侍中) 김천서(金天瑞)의 딸로서 자식이 없다.
우리 중궁(中宮)은 정비(靜妃) 민씨(閔氏)인데,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 시(諡) 문도공(文度公) 민제(閔霽)의 딸이다. 4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세자(世子) 이제(李禔)이고, 다음은 이호(李祜)108) 효령 대군(孝寧大君), 다음은 이도(李祹)109) 충녕 대군(忠寧大君)이며, 다음은 어리다. 장녀는 정순 궁주(貞順宮主)이니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는데, 역시 같은 이씨는 아니다. 다음은 경정 궁주(慶貞宮主)이니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경안 궁주(慶安宮主)이, 길천군(吉川君) 권규(權跬)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어리다. 진안군(鎭安君)은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은 복근(福根) 봉녕군(奉寧君), 다음은 덕근(德根) 원윤(元尹)이다. 익안 대군(益安大君)은 증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석근(石根) 익평군(益平君)이다. 회안 대군(懷安大君)은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맹중(孟衆) 의령군(義寧君)이다.
신이 역대(歷代)의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을 보건대, 덕업(德業)의 성대함과 부명(符命)의 신기함이 간책(簡冊)에 밝게 나타나서 그 빛이 끝없이 흐르는데, 우리 조선이 일어남에 거룩한 덕과 신령한 부명(符命)이 옛날보다 빛남이 있다. 이는 마땅히 이미 그 위(位)를 얻고 또 수(壽)를 얻었으니, 넓은 기업(基業)을 더 높이고 큰 복조(福祚)를 이어받아 천지와 더불어 장구하리다. 신 권근(權近)이 외람되게 비(碑)에 새길 글을 지으라는 명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정성을 다하여 성덕(盛德)을 드러내서 밝은 빛을 후세에 드리우지 않으리오! 그러나 신은 글재주가 비졸(鄙拙)하여 성(盛)하고 아름다운 덕(德)을 드러내서 밝은 뜻을 남김없이 칭송하기에는 부족하와, 삼가 공훈(功勳)과 덕업(德業)이 사람들의 귀와 눈에 남아 있는 것만을 찬술(撰述)하고, 감히 손으로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명(銘)을 드리노라. 그 글[詞]은 이러하다.
‘하늘이 이 백성 낳으시고 사목(司牧)110) 을 세워, 기르고 다스리실 제 유덕(有德)한 이 돌보시네. 하늘이 순순(諄諄)히 말하지 않건마는 명(命)은 혁혁(赫赫)하게 나타나 있나니, 우(禹)임금은 현규(玄圭)를 내려 주고, 주(周)나라의 꿈은 협복(協卜)일세. 우리 조선 처음 왕업(王業)을 여실 제,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금척(金尺)을 주었으니, 부록(符籙)이 먼저 정해지고, 천명(天命)이 아주 분명하였네, 고려 운수 이미 다하매, 임금은 어둡고 재상은 혹독하여, 농사철에 군사 일으켜 중국(中國)과 흔극(釁隙)을 일으켰네, 우리 군사 의(義)의 깃발 돌이키니, 죄인(罪人)들 복죄(伏罪)하여 벌받았네. 충성이 위에 들려 황제 마음 기뻐하였네. 천운(天運)이 돌아오고 여정(輿情)이 절박(切迫)하여, 대업(大業)은 이미 이룩되었건만, 저자[市肆]는 바뀌지 아니하였네. 고황제(高皇帝) 조(詔)하기를, 「그대 나라를 세웠으매, 백성들 병화(兵禍) 없고 하늘이 준 기쁨 즐기네.」 하였고, 이어서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회복하여 주었네. 땅을 골라 도읍(都邑)을 정하니 한강의 북쪽이라. 범이 웅크린 듯 용이 도사린 듯, 왕기(王氣)가 쌓인 바라. 궁실(宮室)은 높디 높고 종묘(宗廟)는 의젓하네. 임금 어진 마음 깊어 살리기를 좋아하고, 정사는 아름답고 생각은 화순하여, 온갖 제도 갖춰지고 모든 교화(敎化) 흡족하네. 정사에 지치시어 적사(嫡嗣)에게 선위(禪位)하니, 공 있는 이에게 양보하셨네. 밝고 밝은 우리 전하 기미(幾微)를 밝게 살펴, 화란(禍亂)을 두 번이나 평정하니, 그 경사 지극히 돈독하네. 나라를 세우고 사직을 안정시킨 것 모두 우리 전하의 공적이니, 대명(大命)을 사양하기 어려워 신기(神器)111) 를 부탁받았네. 양궁(兩宮)을 공경히 받드니, 경건하고 공순함이 더욱 지극하도다. 효제(孝弟)가 신(神)에 통하여, 상제(上帝)의 돌보심이 더욱 우악(優渥)하네. 태조의 상(喪)을 만나 근심에 잠겨, 애모(哀慕)의 슬픈 정 몸부림치네. 황제가 듣고 놀라고 슬퍼하여, 사신을 보내어 조곡(弔哭)하고 태뢰(太牢)로 제사하며, 칙명(勅命)하여 후부(厚賻)하고 아름다운 시호(諡號)를 주어 포장(褒奬)하니, 휼전(恤典)은 온전히 갖추어졌네. 하늘의 도우심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어, 큰 복이 길이 이어지고, 자손이 번창하여, 종사(宗祀)가 유구(攸久)하여 하늘처럼 무궁하리라.’"
이 글은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이 지은 것이다. 정승(政丞) 성석린(成石璘)이 쓰고, 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정구(鄭矩)가 전액(篆額)을 쓰니, 성석린에게는 안마(鞍馬)를, 정구에게는 말 1필을 하사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17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1책 483면
- 【분류】역사-사학(史學) / 어문학-문학(文學)
- [註 093]현규(玄圭) : 현(玄)은 검은 빛이요. 규(圭)는 큰 홀(笏)이다. 예전에 요(堯)임금이 우(禹)임금에게 이 현규(玄圭)를 하사하였었는데, 이것은 하늘 아래의 모든 것을 물려준다는 뜻임.
- [註 094]
협복(協卜) : 문왕(文王)이 사냥을 나갈 때 꿈을 꾼 것을 점치고, 그의 대업(大業)을 도운 강태공(姜太公)을 얻었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 [註 095]
목자(木子) : 이씨(李氏).- [註 096]
건목득자(建木得子) : 이씨(李氏)를 이르는 말임.- [註 097]
망성(望姓) : 이름 높은 양반 성씨.- [註 098]
이성(異姓) : 신씨(辛氏). 곧 우왕(禑王).- [註 099]
주상 전하(主上殿下) :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 [註 100]
이성(異姓) : 신씨(辛氏). 창왕(昌王).- [註 101]
성만(盛滿) : 차고 넘침. 곧 정승의 자리를 말함.- [註 102]
장복(章服) : 관복(官服)의 제도.- [註 103]
얼자(孽子) : 이방석(李芳碩).- [註 104]
상왕(上王) : 공정왕(恭靖王) 즉 정종(定宗).- [註 105]
양궁(兩宮) : 태상왕(太上王)과 상왕(上王).- [註 106]
갑자기 활과 칼만 남기시니, : 옛날 중국의 황제(皇帝)가 죽어서 하늘로 올라갈 때 활[弓]을 떨어뜨렸고, 또 황제(皇帝)를 장사지냈다는 교산(橋山)이 무너졌을 때 그 관중(棺中)에는 다만 칼[劎]만 남아 있었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 곧 귀인(貴人)의 죽음을 일컫는 말임.- [註 107]
파조(罷朝) : 철조(輟朝).- [註 108]
태뢰(太牢) : 나라 제사에 소를 통째로 올리는 일. 처음에는 소·양·돼지를 아울러 올렸으나, 뒤에 소만 올리게 되었음.- [註 108]
이호(李祜) : 효령대군의 초명.- [註 109]
○立健元陵碑。 文曰:
天眷有德, 以開治運, 必先現異, 彰其符命。 夏有玄圭之錫, 周有協卜之夢, 由漢以降, 代各有之。 皆由天授, 非出人謀。 惟我太祖大王之在龍淵也, 勳德旣隆, 符命亦著。 夢有神人執金尺, 自天降而授之曰: "公宜持此正國。" 夏圭周夢, 可同符矣。 又有異人來門獻書云: "得之智異山巖石之中, 有木子更正三韓之語。" 使人出迎則已去矣。 書雲觀舊藏秘記, 有九變震檀之圖, 建木得子。 朝鮮卽震檀之說, 出自數千載之前, 由今乃驗, 天之眷佑有德, 信有徵哉! 臣謹按璿源李氏, 全州望姓。 司空諱翰仕新羅, 娶宗姓之女。 六世而至兢休, 始仕高麗, (十三)〔十八〕 世而至皇高祖穆王, 入仕元朝而長千夫, 四世襲爵, 咸能濟美。 元政旣衰, 皇考桓王還仕高麗。 恭愍王 至正辛丑, 紅寇陷王京, 恭愍南遷, 遣使克復。 我太祖先登獻捷。 明年壬寅, 擊走胡人 納哈出, 又明年癸卯, 却逐僞王塔〈思〉帖木〈兒〉, 恭愍恃倚益重, 累官至將相, 出入中外。 樂觀經史, 亹亹無倦, 濟時之量、好生之德, 出於至誠。 恭愍薨, 異姓竊位; 權奸擅國, 濁亂朝政; 海寇深入, 焚掠郡縣。 洪武庚申, 我太祖戰捷雲峯, 東南以安。 戊辰, 侍中崔瑩誅戮權奸, 過於慘酷, 賴我太祖, 全活頗多。 瑩以太祖爲侍中, 仍授右軍都統節鉞, 逼遣攻遼。 師次威化島, 倡率諸將, 仗義旋旆, 師旣登岸, 大水沒島, 人皆神之。 執退瑩, 代以名儒李穡爲左侍中。 方是時也, 權奸濁亂, 狂悖構隙, 危亡岌岌, 禍亂莫測, 非我太祖轉移之力, 一國殆矣。 穡曰: "今公擧義以尊中國, 然非執政親朝, 則不可", 剋日如京, 太祖爲擇諸子, 以今我主上殿下, 與穡偕朝, 高皇帝嘉賞而遣。 己巳秋, 帝責異姓爲王, 太祖與諸將相, 選立王氏宗親定昌君 瑤, 盡心輔政, 革私田汰冗官, 群情胥悅。 功高見忌, 讒慝交構, 定昌頗惑焉。 太祖以盛滿, 請老而不得謝。 會因西行, 遘疾而還, 謀者益急, 我殿下應機制變, 群謀瓦解。 洪武壬申秋七月十六日, 殿下與大臣裵克廉、趙浚等五十二人, 倡義推戴, 臣僚父老, 不謀僉同。 太祖聞變驚起, 牢讓再三, 勉登王位。 不下堂陛而化邦國, 非天啓佑有德, 疇克如玆! 卽遣知中樞院事趙胖奏聞, 帝詔曰: "三韓之民, 旣尊李氏, 民無兵禍, 人各樂天之樂, 乃帝命也。" 繼又有勑: "國更何號?" 卽遣藝文學士韓尙質奏請, 又詔曰: "維朝鮮之稱美, 可以本其名而祖之。 體天牧民, 永昌後嗣。" 繇我太祖威聲義烈, 升聞于上, 簡在帝心, 故當請命, 輒蒙兪音, 豈偶然哉! 越三年甲戌夏, 有構國家者, 帝命遣親男入朝。 太祖以我殿下通經達理, 賢於諸子, 卽遣應命。 旣至, 敷奏稱旨, 優禮賜還。 其冬十一月, 定都于漢陽, 營宮室、建宗廟。 嘗已追尊四代, 皇高祖爲穆王, 配李氏爲孝妃; 皇曾祖爲翼王, 配崔氏爲貞妃; 皇祖爲度王, 配朴氏爲敬妃; 皇考爲桓王, 配崔氏爲懿妃。 修禮樂而毖祀事, 定章服而辨等威。 興學以育材, 重祿以勸士。 辨析詞訟, 愼簡守令。 弊政悉革, 庶績惟熙。 海寇來服, 四境按堵。 我太祖巍蕩盛德, 眞所謂天錫智勇聰明神武雄偉之主也。 奸臣鄭道傳, 以表辭獲譴帝庭, 陰謀拒命。 戊寅秋八月, 乘我太祖不豫之隙, 欲挾幼孼, 以肆己志。 我殿下炳幾殲除, 以嫡以長, 請建上王爲世子。 九月丁丑, 太祖以疾未瘳, 禪于上王。 上王未有繼嗣, 且謂開國定社, 咸我殿下之績, 乃冊爲世子。 庚辰秋七月己巳, 獻太祖以啓運神武太上王之號。 冬十有一月癸酉, 上王亦以疾禪位于我殿下, 遣使請命。 永樂元年夏四月, 帝遣都指揮使高得等, 奉詔印來封我殿下爲國王, 繼遣翰林待詔王延齡等, 來賜殿下袞冕九章, 秩視親王。 我殿下奉養兩宮, 誠敬備至。 永樂戊子五月二十四日壬申, 太祖晏駕, 春秋七十四歲。 在王位七年, 老不聽政十有一年, 弓劍忽遺, 嗚呼痛哉! 我殿下哀慕罔極, 諒闇盡禮。 奉冊寶上太祖 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之號。 以是年九月初九日甲寅, 葬于城東楊州治之儉巖山, 陵曰健元。 及訃聞, 皇帝震悼罷朝, 卽遣禮部郞中林觀等, 賜祭以太牢。 其文略曰: "惟王明達好善, 出於天性, 敬順天道, 效義攄忠, 恭謹事大, 保恤一方之民。 我皇考深嘉忠誠, 賜復國號曰朝鮮。 王功德之著, 雖古朝鮮之賢王, 無以過也。" 又賜誥命, 諡曰康獻。 又勑殿下賜賻特厚, 寵異之典, 備極無憾。 蓋我太祖畏天之誠, 殿下繼志之孝, 前後相承, 克享天心, 故於始終之際, 大獲天人上下之助如此其至, 嗚呼盛哉! 首妃韓氏, 安邊世家, 贈領門下府事安川府院君諱卿之女, 先薨。 初諡節妃, 後加諡承仁順聖 神懿王后。 誕六男二女, 上王居二, 我殿下居五。 長曰芳雨, 鎭安君, 先卒。 次三芳毅, 益安大君, 亦先卒。 次四芳幹, 懷安大君。 次六芳衍, 登科不祿, 贈元尹。 女長慶愼宮主, 下嫁上黨君 李佇, 非一李也。 次慶善宮主, 下嫁靑原君 沈淙。 次妃康氏, 判三司事允成之女, 初封顯妃, 先薨, 諡神德王后。 誕二男一女, 男長芳蕃, 贈恭順君, 次芳碩, 贈昭悼君。 女慶順宮主, 下嫁興安君 李濟, 亦非一李也。 皆先卒。 上王妃金氏, 今封王大妃, 贈門下侍中天瑞之女, 無嗣。 我中宮靜妃 閔氏, 驪興府院君諡文度公諱霽之女。 誕四男四女, 長男世子禔, 次祜 孝寧大君, 次 【今上諱。】 忠寧大君, 次幼。 女長貞順宮主, 下嫁淸平君 李伯剛, 亦非一李。 次慶貞宮主, 下嫁平壤君 趙大臨; 次慶安宮主, 下嫁吉川君 權跬; 次幼。 鎭安娶贊成事池奫之女, 生二男, 長曰福根 奉寧君, 次曰德根元尹。 益安娶贈門下贊成事崔仁㺶之女, 生男曰石根, 益平君。 懷安娶門下贊成事閔璿之女, 生男曰孟衆, 義寧君。 臣觀歷代受命之君, 德業之盛, 符命之神, 輝映簡冊, 流光罔極。 今我朝鮮之誕興也, 盛德貞符, 于古有光, 是宜旣得其位, 又得其壽, 峙洪基流景祚, 與天地而久長矣。 臣近濫承勒碑之命, 敢不竭精鋪張盛德, 以垂耿光! 然臣筆力鄙拙, 不足以發揚盛美, 稱塞明旨, 謹撰勳德之在人耳目者, 敢拜手稽首而獻銘。 其詞曰: 天生斯民, 立以司牧。 迺長迺治, 迺眷有德。 非天諄諄, 有命赫赫。 禹錫玄圭, 周夢協卜。 惟我朝鮮, 肇基王迹。 夢有神人, 授以金尺。 符籙前定, 天命昭晣。 麗運旣終, 君昏相酷。 農月興師, 大邦構隙。 我師義旋, 罪人斯得。 忠誠上聞, 帝心載懌。 曆數有歸, 輿情斯迫。 大業旣成, 市肆不易。 高皇曰咨, 惟爾有國。 民無兵禍, 樂天之樂。 繼賜國號, 朝鮮是復。 相地定都, 于漢之北。 虎踞龍盤, 王氣攸積。 宮室崇崇, 宗廟翼翼。 仁深好生, 治蔚思輯。 百度俱修, 萬化斯洽。 乃倦于勤, 傳付聖嫡。 乃讓于功, 惟世惟及。 明明我后, 有幾必燭。 禍亂再平, 其慶克篤。 開國定社, 咸我之績。 大命難辭, 神器有托。 祗奉兩宮, 虔恭愈恪。 孝弟通神, 帝眷尤渥。 遭喪惸惸, 哀慕踴擗。 帝聞震悼, 遣使弔哭。 太牢有祀, 厚賻有勑。 美諡褒嘉, 恤典備飭。 自天佑之, 終始不忒。 景祚緜緜, 子孫千億。 宗祀攸長, 與天罔極。
吉昌君 權近所製也。 政丞成石璘書, 前判漢城府事鄭矩篆額。 賜石璘鞍馬, 矩馬一匹。
- 【태백산사고본】 7책 17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1책 483면
- 【분류】역사-사학(史學) / 어문학-문학(文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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