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실록 17권, 태종 9년 4월 13일 을유 4번째기사
1409년 명 영락(永樂) 7년
태평관의 북루를 새로 짓고, 관사를 개축하다
태평관(太平館) 북루(北樓)를 새로 지었다. 임금이 이귀령(李貴齡)에게 일렀다.
"참찬(參贊)은 태평관 감조 제조(太平館監造提調)이니, 정릉(貞陵)의 정자각(丁字閣)을 헐어서 누(樓) 3간을 짓고, 관(館)의 구청(舊廳)을 가지고 동헌(東軒)·서헌(西軒)을 창건하면, 목석(木石)의 공력을 덜고 일도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황엄(黃儼)이 일찍이 말하기를, ‘정자 터를 높이 쌓고, 가운데에 누각(樓閣)을 짓고, 동쪽·서쪽에 헌(軒)을 지어 놓으면 아름다울 것이다.’ 하였는데, 지금 이 누각을 짓는 것은 황엄의 의견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정릉의 돌을 운반하여 쓰고, 그 봉분(封墳)은 자취를 없애어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하는 것이 좋겠으며, 석인(石人)은 땅을 파고 묻는 것이 좋겠다."
황희(黃喜)가 아뢰기를,
"석인을 가지고 주초(柱礎)를 메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귀령에게 이르기를,
"옳지 못하다. 묻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17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81면
- 【분류】건설(建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