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헌부에서 세포전·문묘 배향·여자의 의복 제도 등에 관한 시무를 올리다
사헌부에서 시무(時務)에 대해 두어 조목을 올렸다.
"1. 이제 토지의 경계를 바르게 하고 조세(租稅)를 정하여 손실법(損實法)을 밝게 하니, 조세를 적게 거두고 민생(民生)을 후하게 한다고 이를 만합니다. 오로지 세포전(稅布田)068) 만은 이러한 법을 행하지 아니하여, 시절이 풍년이 들거나 흉년이 들어도 거두는 데는 늘이거나 줄이는 것이 없습니다. 가령 10결(結)의 땅에 손재(損災)가 반분(半分)에 이르는데도 세(稅)는 원수(元數)대로 받습니다. 그러므로 법령이 고르게 행해지지 못하고 혜택이 고르게 미치지 못하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세포전을 한결같이 녹전(祿田)의 제도에 따라 수손급손(隨損給損)하여, 전제(田制)가 널리 행해지고 혜택이 골고루 베풀어지게 할 것입니다.
1. 우리 동방(東方)의 예악 형정(禮樂刑政)과 전장 문물(典章文物)이 중국과 견주어 부끄러울 바가 없는 것은, 비록 기자(箕子)의 교화(敎化)에 근본을 두지만, 또한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을 갖춘 신하가 치도(治道)를 널리 펴고 왕화(王化)를 도운 것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동방의 문신 가운데 성교(聖敎)에 공이 있고 치도(治道)에 도움이 있는 이는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도록 하여 포장(褒奬)하고 존숭(尊崇)하는 은전을 보였으니,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과 설총(薛聰)·안향(安珦)이 바로 그분들입니다. 이후로부터 우리 조정에 이르기까지 문신 가운데 도덕과 공업(功業)이 어찌 안향·설총보다 앞서는 이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한 사람도 배향한 이가 없는 것은 하나의 흠입니다. 원컨대, 도당(都堂)에 명하여 전조(前朝)에서 아조(我朝)에 이르기까지 문신 가운데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할 만한 이를 들추어내어서 배향(配享)하는 예를 행하여 후세에 법을 남기소서.
1. 우리 나라의 전장 문물(典章文物)이 모두 중국의 제도를 따르지만, 여자의 의복 제도만은 아직도 구습(舊習)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니, 고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선 구제(舊制)에 따라 적당하게 상정(詳定)하여 그 참람한 것은 없애고, 사치스러운 것은 깎아서 등급(等級)과 상하(上下)의 명분을 분별하게 함이 옳습니다. 우리 나라 여자의 의복 가운데 존귀(尊貴)한 것은 오군(襖裙)과 입모(笠帽)입니다. 그러나 주부(主婦)와 종비(從婢)의 상하(上下)가 모두 흑라모(黑羅帽)와 백초군(白綃裙)을 사용하니, 값이 비싸 재화를 허비하게 될 뿐 아니라. 존귀(尊貴)한 이와 비천(卑賤)한 이가 서로 섞이게 됩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대소 부녀(大小婦女)와 종비(從婢)의 의복은 오군(襖裙)을 입지 못하게 하고, 그 입모(笠帽)는 저포(苧布)만 쓰고 나(羅)·초(綃)는 사용하지 못하게 하며, 그 모첨(帽襜)의 장단(長短)도 주부의 입모(笠帽)와 같지 아니하게 하면, 시장의 값도 줄어들고 상하(上下)의 분별도 있을 것입니다.
1. 백성 가운데 토목(土木)의 역사에 죽는 자가 간혹 있는데, 수령(守令)이 감사(監司)와 도당(都堂)에 보고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사역(使役)시키는 자가 그 괴로움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감독하는 자가 그 죽음을 알지 못하여, 도당에서는 계문하지 못하고, 전하께서는 이를 알지 못하십니다. 문왕(文王)이 서민(庶民)을 자식같이 돌보았다는 뜻에 어떠하며, 이윤(伊尹)이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불행함이 있으면 자기가 구렁텅이 속에 밀어 넣은 것처럼 생각하던 마음에 또 어떠하겠습니까? 원컨대, 이제부터 외방(外方)은 감사가, 경중(京中)은 제조(提調)가 명심하고 그 역사(役事)를 고찰하여, 모관(某官) 관하(管下)에 병들어 죽은자가 몇 사람, 굶어 죽은 자가 몇 사람, 나무와 돌에 눌려 죽은 자가 몇 사람, 나루를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몇 사람인가를 명백하게 일일이 기록하여 도당(都堂)에 전달 보고하게 하고, 도당(都堂)에서는 곧 계본(啓本)을 올려서, 사망자(死亡者)를 많이 낸 경우에는 그 감독한 관원을 죄주고, 그 사망자의 집을 우대하여 구휼하면, 이것 또한 인정(仁政)의 일단(一端)입니다.
1. 지금 대소 인원(大小人員)과 동량 승도(棟梁僧徒)들이 각도 각 고을의 진성(陳省)을 받아, 각사(各司)에 바치는 공물(貢物)을 스스로 준비해 선납(先納)하고, 체지(帖紙)069) 를 받아 그 고을로 내려가서 값을 배(倍)로 징수하므로, 백성들을 침해함이 심합니다. 원컨대, 이제 부터 위와 같이 스스로 준비하여 선납(先納)하는 자를 일절 금단(禁斷)하여 그 폐단을 없애도록 하소서."
의정부에 내려 의논하게 하니, 의정부에서 한결같이 장내(狀內)에서 말한 대로 시행할 것을 의결하였으므로,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7책 17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77면
- 【분류】재정-전세(田稅) / 재정-공물(貢物) / 재정-역(役) / 농업-전제(田制) / 사상-유학(儒學) / 의생활(衣生活) / 구휼(救恤)
○壬戌/司憲府上時務數條:
一, 今也正經界、定租稅、明損實之法, 可謂薄稅斂厚民生矣。 獨稅布之田, 則不行此法, 歲有豐凶, 而收無盈縮。 假令十結損至半分, 而稅依元數, 故令行不均, 而澤有不及, 不可不慮。 願自今稅布之田, 一依祿田之制, 隨損給損, 則田制通行, 澤施均矣。 一, 我東方禮樂、刑政、典章、文物, 擬諸華夏而無愧者, 雖本於箕子之化, 亦由道德文章之臣, 笙鏞治道, 黼黻王化而然也。 故我東方文臣之有功於聖敎, 有補於治道者, 使之配享文廟, 以示褒崇之典, 文昌侯 崔致遠與薛聰、安珦是已。 自是以後, 以至我朝, 其文臣之有道德功業者, 豈無過於安、薛諸公者乎? 然無一配享者, 一欠也。 願命都堂, 將前朝以至我朝, 其文臣之可配文廟者, 表而出之, 以擧配享之典, 垂法後世。 一, 今我國家典章文物, 悉遵華制, 而女服之制, 獨因舊習, 不可不更也。 然姑從舊制, 量宜詳定, 去其僭削其侈, 以別等級上下之分可也。 我朝女服之尊者, 襖裙與笠帽也, 而主婦從婢上下, 皆用黑羅帽白綃裙, 非惟價重財費而已, 尊卑混而貴賤雜矣。 願自今大小婦女從婢之服, 不許襖裙; 其笠帽則只用苧布, 不許羅綃; 其帽襜長短, 不與主婦笠帽相等, 則市價省而上下辨矣。 一, 民之死於土木之役者, 蓋或有之, 守令不報監司都堂, 故役之者不恤其苦, 監之者不知其死, 都堂不得聞, 而殿下不得知。 其於文王子庶民之義, 爲何如哉, 其於伊尹若己推而納諸溝中之心, 又如何哉? 願自今, 外方則監司, 京中則提調, 銘心考察其役, 某官管下病死者幾人、飢死者幾人、逼死於木石者幾人、溺死於津渡者幾人, 明白開寫, 傳報都堂, 都堂卽呈啓本, 其多致死亡者, 罪其監臨官, 優恤其家, 此亦仁政之一端。 一, 今大小人員及棟樑僧徒等受各道各官陳省, 以其各司所納貢物, 自備先納, 受帖下歸, 倍取其價, 侵擾人民甚矣。 願自今, 上項自備先納者, 一皆禁斷, 以除其弊。
下議政府擬議。 政府議得: "一依狀內施行。" 從之。
- 【태백산사고본】 7책 17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77면
- 【분류】재정-전세(田稅) / 재정-공물(貢物) / 재정-역(役) / 농업-전제(田制) / 사상-유학(儒學) / 의생활(衣生活) / 구휼(救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