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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16권, 태종 8년 11월 23일 정묘 1번째기사 1408년 명 영락(永樂) 6년

영의정부사로 치사한 권중화의 졸기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 치사(致仕)한 권중화(權仲和)가 죽었다. 중화(仲和)안동(安東) 사람인데, 고려(高麗) 정승(政丞) 권한공(權漢功)의 아들이다. 지정(至正) 계사년 을과(乙科) 제2인에 올라 공민왕(恭愍王)을 섬겨 대언(代言)이 되었다가, 지신사(知申事)로 옮기고 전선(銓選)을 맡았는데, 근신(謹愼)하고 주밀(周密)하여 친구(親舊)에게 사(私)를 두지 않으니, 공민왕이 심히 중하게 여기었다. 정당 문학(政堂文學)으로 정사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는데, 문하(門下)에 명사(名士)가 많았다. 염정(恬靜)219) 자수(自守)220) 하여 권귀(權貴)에게 아부하지 않아서 세상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여러 벼슬을 거쳐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렀다. 태조(太祖)가 즉위한 뒤에 기년(耆年)·숙덕(宿德)으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를 제수하고 예천백(醴泉伯)을 봉하여, 본관(本官)221) 으로 그대로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고사(故事)에 정통하므로 무릇 상정(詳定)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나가서 물었다. 나이 비록 늙었으나 정력(精力)이 쇠하지 않아서 의약(醫藥)·지리(地理)·복서(卜筮)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고, 더욱이 대전(大篆)222)팔분(八分)223) 을 잘 썼다. 평소에 산업(産業)을 다스리지 않고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앉아서 이[蝨]를 잡으며 이야기하였다. 늙어서 다만 말라빠진 말[馬] 한 필이 있었다. 나이 87세에 죽으니 조회(朝會)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중관(中官)을 명하여 조제(弔祭)하였다. 유사(有司)에 명하여 예장(禮葬)하고, 문절(文節)이란 시호(諡號)를 주었다. 중궁(中宮)도 또한 내시(內侍)를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아들이 하나이니 권방위(權邦緯)이다.


  • 【태백산사고본】 6책 16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64면
  • 【분류】
    인물(人物)

  • [註 219]
    염정(恬靜) : 마음이 고요하고 평안함.
  • [註 220]
    자수(自守) : 행실이나 말을 스스로 조심하여 지킴.
  • [註 221]
    본관(本官) : 판문하부사를 말함.
  • [註 222]
    대전(大篆) : 한자(漢字) 서체(書體)의 하나. 주(周)나라 선왕(宣王) 때 태사(太史) 주(籒)가 만들었다고 하며, 그 특색은 번잡(繁雜)하고 수식(修飾)을 주로 한 점임.
  • [註 223]
    팔분(八分) : 예서(隷書) 이분(二分)과 전서(篆書) 팔분(八分)을 섞어서 만든 한자(漢字)의 서체(書體). 한(漢)나라 채옹(蔡邕)이 처음 만들었다고 함.

○丁卯/領議政府事仍令致仕權仲和卒。 仲和, 安東人, 高麗政丞漢功之子。 登至正癸巳乙科第二人, 事恭愍王爲代言, 遷知申事。 掌銓選, 謹愼周密, 不私親舊, 恭愍甚重之。 以政堂文學, 同知丁巳貢擧, 門下多名士。 恬靜自守, 不附權貴, 爲世所重, 累官至門下贊成事。 太祖卽位, 以耆年宿德, 拜判門下府事, 封醴泉伯, 以本官仍令致仕。 通曉故事, 凡有詳定, 必就而咨之。 年雖遲暮, 精力不衰, 醫藥地理卜筮, 靡不通曉, 尤長於大篆八分。 平居不治生産, 與人竝坐, 捫蝨而談。 其老也, 只畜一疥馬, 年八十七而終。 輟朝三日, 命中官弔祭, 有司禮葬, 贈諡文節。 中宮亦遣內侍致祭。 一子, 邦緯


  • 【태백산사고본】 6책 16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64면
  • 【분류】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