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무구 형제를 외방으로 내치면서, 그 죄상을 일일이 열거한 교서
교서(敎書)를 내렸으니, 교서는 이러하였다.
"내가 일찍 태조(太祖) 강헌 대왕(康獻大王)의 초창(草創)하신 업(業)을 이어받아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근심하고 부지런히 하여 치평(治平)에 이르기를 기약한 지 9년이나 되었다. 우러러 생각건대, 태조 대왕께서 갑자기 군신(群臣)을 버리셨으므로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양암(諒闇)에 거처하여 예전 예제(禮制)를 다하고자 하였더니, 훈신(勳臣)·재보(宰輔)와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이 말을 합하여 조정에 나와 정사(政事) 듣기를 극력 청하여 두 번 세 번에 이르러 반드시 청(請)에 따르기를 기약하므로, 내가 부득이하여 마지못해 여러 사람의 뜻에 따랐으나, 마음이 척연(惕然)하고 편안치 못하여 서정(庶政)을 새롭게 해서 우리 태조 대왕의 어렵게 이루신 업(業)을 빛내고 키워서 무궁한 아름다움을 남기고자 하니, 아아, 어렵도다! 마땅히 대중(大衆)에게 일러야 될 일을 중외(中外)에 포고(布告)하는 바이다.
내가 지난번에 부왕께 환심을 사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 생각하고, 세자(世子) 이제(李禔)에게 전위(傳位)하고 날마다 과약(寡約)181) 한 차림으로 태상왕(太上王)의 침선(寢膳)을 가까이 모시며 자식의 직분을 다하고자 하였는데, 대소 신료(大小臣僚)가 날마다 궐정(闕庭)에 나와 불가(不可)함을 힘써 말하고 잇달아 눈물로 울었다. 내가 그래도 듣지 않으니, 대신들이 태상전(太上殿)에 달려가 고하여 사위(辭位)할 뜻을 저지시켰고, 민무구(閔無咎) 등이 또한 종지(宗支)를 전제(剪除)한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내가 심히 두려워하여 곧 중의(衆議)를 따랐다. 무구(無咎) 형제(兄弟)는 본래 금장지심(今將之心)182) 을 품어 사위하는 것을 기뻐하고, 복정(復政)하는 것을 분(憤)하게 여겨서, 이때부터 더욱 의심하고 꺼리는 마음을 품어 불충(不忠)한 형상이 여러 번 밖에 나타났다. 이에 대신(大臣)·백관(百官)이 연장(聯章) 누독(累牘)하여 무구(無咎)·무질(無疾)의 불충한 죄를 극형에 처하기를 청하였다. 내가 훈구(勳舊)의 연고로 인하여 법에 처치하지 않으매, 성헌(省憲)183) 이 교장(交章)하여 죄를 청하기를 마지 않았다. 이에 무구 형제가 스스로 그 죄를 알고 외방에 나가 거처하였다.
근자에 대간(臺諫)이 상언(上言)하기를, ‘무구 형제의 죄는 마땅히 법에 처치하여야 하는데, 하물며 지금 왕래하여 서로 결탁하는 자가 심히 많으니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청컨대, 유사(攸司)에 내려서 그 죄를 밝게 바루소서.’ 하였다. 내가 일찍이 생각하니, 무구·무질은 중궁(中宮)의 지친(至親)으로서 훈신(勳臣)의 열(列)에 참여하였으므로, 그 작질(爵秩)을 높이고, 그 녹봉(祿俸)을 후하게 하고, 그 실우(室宇)를 높게 하고, 그 전주(田疇)184) 를 넓게 하였으니, 그 마음의 욕망이 대개 족했을 것이다. 만일 부귀(富貴)를 길이 지켜 가득 차도 넘치지 않는 도[滿而不溢之道]를 생각한다면, 마땅히 늠연(澟然)히 스스로 두려워하고 송연(悚然)히 스스로 검속(檢束)하여, 바야흐로 몸을 경계하고 조심하기에 여가(餘暇)가 없을 것이니,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않고 도리어 교만 방자하여, 오히려 생살 여탈(生殺與奪)의 권세가 제 손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마음에 쾌(快)하지 못하게 여기고, 분하게 원망하고 노하여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까지 가지게 되어, 가슴속 깊이 쌓아 두었다가 밖으로 발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이 장차 복망(覆亡)시키려고 하여 그 악한 것을 쌓게 한 것이 아닌가? 사은(私恩)으로 공의(公義)를 해(害)하지 않는 것은 전기(傳記)에 나타나 있는 바이고, 일이 종사(宗社)에 관계되면 마땅히 법으로 논하는 것은 맹족(盟簇)185) 에 실려 있는 바이다. 그 마음 가진 것을 캐어보면, 은혜를 잊고 덕(德)을 배반하여 불충하고 만족함이 없는 죄이니, 극형에 처치하여 중노(衆怒)에 대답하고 후인(後人)을 징계하는 것이 실로 지극히 공정한 도리가 되겠으나, 다만 친애(親愛)와 여유(與遊)의 오랜 것을 생각하여 차마 갑자기 법에 처치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비록 과인(寡人)의 고식지계(姑息之計)이나, 또한 인정(人情)에 있어 차마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폐하여 서인(庶人)을 만들어서 종신(終身)토록 상종하지 아니하여 군신(群臣)의 죄를 청하는 의논을 막고, 그 수령(首領)을 보전하여 천년(天年)을 마치게 해서 과인(寡人)의 차마 못하는 정[不忍之情]을 폈으니, 거의 사은(私恩)과 공의(公義)가 아울러 행해져서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어찌하여 무구·무질이 개전(改悛)하는 마음이 없고, 붕류(朋類)들을 끌어들여서 무식(無識)한 사람이 왕래하고 아부하여 죄고(罪辜)에 빠져, 마침내 대간(臺諫)이 소장(疏章)을 올리어 과인(寡人)의 청단(聽斷)을 번거롭게 하는 데 이르렀는가? 이것은 다만 제 몸에 재앙을 부를 뿐 아니라, 무구·무질로 하여금 그 멸망(滅亡)을 스스로 재촉한 것이니, 해(害)되는 바가 어찌 심히 크지 않으며, 또한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그러나 또한 무지(無知)한 사람들이 함께 죄에 빠지는 것을 염려하여 무구·무질을 외방에 거처하게 하고, 기왕에 일찍이 왕래한 자들을 모두 다 용서하고 무구·무질의 원망을 쌓은 연유와 불충한 형상을 조목조목 열거하여 신서(臣庶)에게 포고(布告)해 모두 들어 알게 한다. 혹시라도 교지(敎旨)를 살피지 못하고 다시 왕래하며 결탁하는 자는 그 마음이 반드시 다른 것이니, 그 죄가 같을 것이다. 장차 함께 법에 처치하여 후래(後來)를 엄히 징계(懲戒)하겠다. 아아! 상벌(賞罰)을 공정하게 하는 것은 내가 마땅히 할 일이다. 충순(忠純)히 하여 두 마음이 없도록 어찌 감히 신하가 힘쓰지 않겠는가? 아아! 너희들 중외(中外)의 대소 신료(大小臣僚)는 나의 지극한 생각을 체득하여 후회(後悔)가 없도록 하라. 그러므로 교시(敎示)하는 바이니 마땅히 지실(知悉)할 것이다.
1. 내가 임오년에 매우 큰 종창(腫瘡)이 났었는데, 무구·무질 등은 가만히 병세(病勢)를 엿보고 일찍이 구료(救療)할 뜻은 없이, 도리어 사사로 서로 모여서 9세 된 어린 아들을 끼고 나라 권세[國權]를 쥐려고 꾀하였다.
1. 무질이 송경(松京)에 있을 적에 우정승(右政丞) 이무(李茂)의 집에 이르러 계교를 묻기를, ‘지금 주상께서 반드시 우리들을 보전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니 우리들은 장차 어찌하랴?’ 하였으니 이것은 금장지심(今將之心)이 아닌가?
1. 병술년 사위(辭位)하려고 할 적에 무구가 들어와서 나와 말하기를, ‘고론(高論)하는 사람이 비록 많으나, 대신(大臣)으로서 아버지의 집에 가서 하교(下敎)대로 하기로 이미 의논한 자가 있다.’ 하므로, 내가 사사로 기쁘고 다행하게 여겨서 승정원(承政院)에 말하였다. 이튿날 대소 신료(大小臣僚)가 또 뜰에 모여 문을 밀치고 들어오려고 하므로, 내가 급히 내전(內殿)으로 들어가 피하고 곧 무구를 불러 묻기를, ‘내가 네 말을 믿고 이미 승정원에 말하였는데, 지금 군신(群臣)이 이같이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무구가 발끈하여 변색(變色)하며 말하기를, ‘주상께서 왜 급히 내 말을 밖에 발설하셨습니까? 그러나 누가 감히 내게 어찌하겠습니까?’ 하였다. 그 뒤 복정(復政)하던 날에 무구가 내전에 들어와 알현하였는데, 좋아하지 않는 기색이 면목(面目)에 넘쳤었다. 이것은 과인만이 본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본 바이다.
1. 무구·무질 등이 항상 말하기를, ‘인군(人君)이 아들이 많으면 형세가 심히 불편하다.’ 하였다. 사위(辭位)할 때를 당하여 내가 무구에게 말하기를, ‘세자(世子)에게 전위(傳位)한 뒤에 어린 여러 아우들로 하여금 집을 죽 늘어세우고 살게 하여 우애의 정을 두텁게 하겠다.’ 하니, 무구가 말하기를, ‘주상의 생각은 비록 이와 같으나 꾀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하였으니, 이것은 종지(宗支)를 전멸(剪滅)하여 왕실을 약하게 만들려는 뜻이다.
1. 복정(復政)한 뒤에 무구·무질이 아버지의 집에 모여 항상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들은 형세가 서울에 있기 어려우니 마땅히 밖으로 나가야 한다. 너는 경상도로 가고, 나는 충청도로 가겠다.’ 하였는데, 조금 뒤에 무구가 나가서 통진(通津)에 있다가 월여(月餘) 만에 돌아왔고, 또 다시 유후사(留後司)로 갔다가 사세가 불편하여 오랜만에 서울로 들어왔으니, 지금의 자원(自願)해 거처하는 것은 과연 미리 계획한 것과 같은 것이다.
1. 지난번에 무구·무질 등이 감히 사분(私憤)을 품고 간신(諫臣) 이지직(李之直)과 문인(門人) 전가식(田可植)을 사주(使嗾)하여 말을 만들어 내서, 과인(寡人)이 성색(聲色)과 응견(鷹犬)을 좋아하고 의복과 음식을 사치스럽게 한다고 무함 탄핵(誣陷彈劾)하여 과인을 불의(不義)에 빠뜨리려고 힘썼다. 이에 정부(政府)와 대간(臺諫)이 상언(上言)하기를, ‘지직과 가식 등이 상덕(上德)의 없는 일로 말을 만들어 무망(誣妄)해서 상덕(上德)에 누(累)가 되게 하였으니, 대불경죄(大不敬罪)로 가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내가 일이 난처한 데 관계되기 때문에 내버려두고 묻지 않았다.
1. 참의(參議) 구종지(具宗之)가 무질에게 병권(兵權)을 내놓은 이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주상께서 신 등을 의심하기를 상당군(上黨君)과 같이 하므로 병권을 내놓았다.’ 하였다. 이것은 종지가 성발도(成發道)에게 고하여 내게 알렸다.
1. 민씨(閔氏) 형제가 양인(良人) 수백구(數百口)를 억압하여 사천(私賤)을 만들었으므로, 그 사람이 북[鼓]을 쳐서 신문(申聞)하였다. 이에 승정원(承政院)과 삼성(三省)186) 으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게 하여 오결(誤決)한 관원 김첨(金瞻) 등을 폄출(貶黜)하였다.
1. 내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에 입던 관대(冠帶)를 장차 세자(世子)에게 전해주려고 하였는데, 무구가 제 마음대로 착용하고 교만 방자하게 굴었다.
1. 민씨(閔氏)가 아비의 첩(妾)을 시켜 궁중에 드나들게 하여 궁중의 일들을 거짓 퍼뜨려 공신(功臣)·재상(宰相)을 이간시키므로, 내가 그 정상을 알고 외방으로 내쳤다."
- 【태백산사고본】 6책 16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54면
- 【분류】사법(司法) / 왕실(王室) / 변란(變亂)
- [註 181]과약(寡約) : 검소하고 절약함.
- [註 182]
금장지심(今將之心) : 대역지심(大逆之心).- [註 183]
성헌(省憲) : 사헌부·사간원의 관원.- [註 184]
○下敎書。 敎曰:
予惟早承太祖康獻大王草創之業, 夙夜憂勤, 期底于治, 玆惟九年。 仰惟太祖大王奄棄群臣, 不勝痛悼, 居于諒闇, 欲盡古制, 勳臣宰輔, 大小臣僚, 合辭力請臨朝聽政, 至再至三, 期於必從。 予不獲已, 勉循輿意, 惕然不寧, 思欲聿新庶政, 以光大我太祖大王艱難之業, 以垂無疆之休。 嗚呼艱哉! 事之當諭衆者, 宜用播告中外。 予於曩者, 自念不獲乎親, 欲傳位于世子禔, 日以寡約, 昵侍太上之寢膳, 以供子職, 大小臣僚, 日進闕庭, 力言不可, 繼以涕泣。 予猶不聽, 大臣奔告于太上殿, 以沮辭位之志; 無咎等亦有剪除宗支之語, 予甚懼焉, 卽從衆議。 無咎兄弟, 素畜今將之心, 喜於辭位, 而慍於復政, 自是益懷疑忌, 不忠之狀, 屢見於外。 乃者大臣百官, 聯章累牘, 請將無咎、無疾不忠之罪, 置之極刑, 予以勳舊之故, 不置於法, 省憲交章, 請罪不已。 無咎兄弟, 自知其罪, 出居于外。 近者, 臺諫上言: "無咎兄弟之罪, 當置於法。 矧今往來交結者甚衆, 其志莫測, 請下攸司, 明正其罪。" 予嘗思之, 無咎、無疾, 以中宮之親, 與於勳臣之列, 高其爵秩, 厚其祿俸, 峻其室宇, 廣其田疇, 其心之欲, 蓋亦足矣。 苟思所以長守富貴, 滿而不溢之道焉, 則宜其澟然而自懼, 悚然而自束, 方且檢身小心之不暇, 何有於他志! 慮不出此, 顧乃驕橫慢傲, 猶以殺活予奪之柄, 不出於手, 未快於心, 憤然怨怒, 至有無君之心, 積於中而發於外。 是豈天將覆之而稔其惡耶? 不以私恩, 害乎公義, 見於傳記; 事關宗社, 當以法論, 載在盟簇。 原其設心, 其忘恩背德不忠無厭之罪, 置之極刑, 以對衆怒, 以懲後人, 實爲至公之道, 第以念夫親愛與遊之久, 而不忍遽置於法。 此雖寡人姑息之計, 然亦情所不忍。 所以廢爲庶人, 終身不齒, 以塞群臣請罪之議, 俾其保全首領, 得終天年, 以伸寡人不忍之情, 庶乎私恩公義竝行而不悖矣。 奈何無咎、無疾, 罔有悛心, 援引朋類, 而無識之人, 往來依附, 罹于罪辜, 以致臺諫之封章, 以煩寡人之聽斷哉! 此非唯自災于厥躬, 亦使無咎、無疾, 自促其滅亡, 其爲害, 豈不甚大, 而亦誰怨哉? 然亦慮其無知之人, 同陷于罪, 其無咎、無疾外方居處, 已曾往來者, 竝皆宥除, 而條列無咎、無疾畜怨之由、不忠之狀, 布告臣庶, 咸使聞知。 其或不審敎旨, 尙復往來交結者, 其心必異, 厥罪惟鈞, 宜將同置於法, 痛懲于後。 於戲! 賞罰惟公, 予之所當爲也。 忠純無貳, 臣其敢不懋哉? 咨爾中外大小臣僚, 體予至懷, 俾無後悔。 故玆敎示, 想宜知悉。 一, 予於壬午年, 發瘡甚鉅, 無咎、無疾等, 密伺疾勢, 曾無救療之意, 顧乃私相聚會, 謀挾九歲弱息, 以握國柄。 一, 無疾在松京之時, 至右政丞李茂家, 問計曰: "今上終必不肯保全我輩, 我輩將若之何?" 此非今將之心乎? 一, 丙戌年辭位之時, 無咎入與我語: "高論之人雖多, 大臣或有到父家, 已議承敎者。" 予私自喜幸, 言於承政院。 翼日, 大小臣僚, 又聚于庭, 至欲排闥, 予驟入內避之, 卽召無咎問曰: "吾以汝言爲信, 已言于承政院矣。 今群臣若此, 何也?" 無咎悖然變色曰: "上遽以吾言發之於外耶? 然亦誰敢我何!" 厥後復政之日, 無咎入見于內, 不豫之色溢於面目, 非惟寡人所親見, 亦人人之所共覩也。 一, 無咎、無疾等常言: "人君多子, 勢甚不便。" 當辭位之時, 予語無咎曰: "傳位世子之後, 令乳兒諸弟, 列屋而居, 以篤友于之情。" 無咎乃曰: "上慮雖如此, 其無誘掖之人乎?" 此欲剪滅宗支, 以弱王室之志也。 一, 復政之後, 無咎與無疾, 會于父家, 常相議曰: "我輩勢難住京, 當出于外。 汝之慶尙道, 我之忠淸道。" 旣而, 無咎出居通津, 月餘而還, 又歸留後司, 以勢不便, 久乃入京。 今之自願居處, 果如夙計。 一, 曩者, 無咎、無疾等, 敢懷私憤, 乃嗾諫臣李之直門人田可植, 造言誣彈寡人以聲色鷹犬之好, 衣服飮食之侈, 務陷寡人於不義。 政府臺諫上言: "之直、可植等, 以上德所無之事, 造言誣妄, 以累上德, 請加以大不敬之罪。" 予以其事干難處之地, 置而不問。 一, 參議具宗之, 與無疾問釋兵之由, 答曰: "上疑臣等如上黨君, 是以釋兵。" 宗之告于成發道, 以達于我。 一, 閔氏兄弟, 壓良人數百口, 以爲私賤。 其人擊鼓以聞, 令承政院三省覈實, 乃貶誤決官金瞻等。 一, 予在東宮時所服冠帶, 將以傳于世子也。 無咎擅自穿著, 以逞驕僭。 一, 閔氏以父妾出入宮中, 誣宣宮中之事, 離間功臣宰相。 予得其情, 黜之于外。
- 【태백산사고본】 6책 16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54면
- 【분류】사법(司法) / 왕실(王室) / 변란(變亂)
- [註 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