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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15권, 태종 8년 5월 7일 을묘 1번째기사 1408년 명 영락(永樂) 6년

사헌부에서 모화루 남쪽에 연못 파는 일로 판공안부사 박자청을 탄핵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 박자청(朴子靑)을 탄핵하였다. 자청(子靑)이 선공 소감(繕工少監) 홍이(洪理) 등을 거느리고 모화루(慕華樓) 남지(南池)의 역사(役事)를 감독하여 열흘이 넘어도 성취(成就)하지 못하고, 역도(役徒)들은 피로하여 지쳤다. 사헌 집의(司憲執義) 권우(權遇) 등이 이를 탄핵하고자 하여 먼저 서리(書吏) 김사진(金思進)·오귀진(吳貴珍)을 보내어 가만히 못의 깊이와 넓이, 수맥(水脈)의 유무(有無)를 살피었다. 홍이가 이를 알고 두 사람에게 이르기를,

"못이 모화루까지 1백 50여 보(步)이고, 길이는 3백 80척(尺), 넓이는 3백 척(尺), 깊이는 두세 길[丈]이고, 수맥(水脈)의 유무(有無)는 자네가 보는 바대로이다."

하고, 비밀히 자청(子靑)에게 그 상황을 말하였다. 자청이 그 서리(書吏)를 잡아다 욕(辱)을 보이고 매질을 하려 하다가, 옆에서 말리는 자가 있어 그만두었는데, 반드시 탄핵을 당할 것을 스스로 헤아리고 말을 달려 먼저 대궐에 나아가 아뢰기를,

"헌부(憲府)에서 아전을 시켜 신 등이 감독하는 형태를 엿봅니다."

하였다. 조금 뒤에 헌부(憲府)에서 자청(子靑)을 탄핵하기를,

"여러 날 못을 파도 물을 얻지 못하였는데, 오히려 토목(土木)의 역사(役事)를 마음 속으로 달게 여겨 계문(啓聞)해 이를 정파(停罷)하려 하지 않고, 한갓 백성의 힘을 수고롭게 하니, 재상(宰相)의 의취(意趣)가 없습니다."

하고, 홍이를 탄핵하기를,

"자청(子靑)에게 아부하여 조석(朝夕)으로 그 집에 드나들어 마치 가신(家臣)과 같고 억지로 물 없는 못을 파며 정파(停罷)하기를 청하지 못하니, 사풍(士風)을 더럽힙니다."

하였다. 임금이 듣고 노(怒)하여 장무(掌務)인 지평(持平) 최자해(崔自海)를 불러 힐난(詰難)하기를,

"못을 파는 역사는 내가 명한 것인데 자청홍이가 무슨 죄가 있느냐?"

하고, 자해(自海)를 순금사(巡禁司)에 가두려고 하다가, 조금 뒤에 노여움이 좀 풀리어 순금사 나장(螺匠)099) 을 시켜 자해를 데려다 그의 집에 두었다. 이에 권우(權遇) 등이 모두 그들의 집에서 대죄(待罪)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헌부(憲府)에서 자청홍이를 탄핵한 공함(公緘)100) 을 가져다 보고, 심히 노하여 의정부(議政府)에 보이고 말하기를,

"헌사(憲司)의 소위(所爲)가 저와 같으니 어떻게 처치하랴?"

하니,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윤(河崙)·좌정승(左政丞) 성석린(成石璘)·우정승(右政丞) 이무(李茂) 등이 아뢰기를,

"헌사(憲司)의 소위(所爲)가 비록 중도(中道)를 잃었다 하더라도 언관(言官)의 잘못은 죄를 가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자청홍이를 명하여 다시 역사를 감독하게 하고, 순금사에 명하기를,

"김사진(金思進)오귀진(吳貴珍)을 결박(結縛)하여 못 옆에 두어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라."

하고, 또 병조 좌랑(兵曹佐郞) 최진성(崔進誠)과 내관(內官) 두 사람을 명하여 감역관(監役官)을 삼고, 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 종[奴]과 군기감(軍器監) 별군(別軍)을 더 징발하여 그 역사를 돕게 하였다. 못을 파기를 깊게 파니 그제서야 물이 나왔다. 우사간(右司諫) 김자지(金自知) 등이 대궐에 나와 아뢰기를,

"생각하옵건대, 대신(臺臣)101) 은 말하는 것으로 책임을 삼으니 다만 직책을 다하고자 한 것뿐이온데, 전하께서 이와 같이 꺾으시니 오늘날의 견문(見聞)에 해괴(駭怪)할 뿐 아니라, 사책(史冊)에 쓴다면 후세(後世)에 모범을 남기는 바가 아닙니다. 또 이제부터 언관(言官)의 책임이 경(輕)하여지고 언로(言路)가 막힐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중관(中官)을 시켜 전지(傳旨)하기를,

"너희들이 진실로 헌부(憲府)에서 핵문(劾問)한 정실(情實)을 안다면, 역시 집에 물러가서 출입(出入)하지 말아야 하고, 만일 알지 못하였다면, 사실을 조사하여 다시 아뢰라."

하였다. 김자지 등이 대답하기를,

"신 등은 다만 헌부(憲府)에서 못[池] 파는 일로 인하여 자청(子靑)을 논핵(論劾)하였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며, 정실(情實) 같은 것은 감히 알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이튿날 김자지 등이 합문(閤門)102) 에 엎드려 아뢰기를,

"어제 전하께서 전지(傳旨)하시기를, ‘사실을 조사하여 다시 아뢰라.’ 하셨사온데, 신 등이 듣자오니 헌부(憲府)에서 역사(役事)가 오래도록 끝나지 않으므로 사람을 시켜 살펴보게 하였다 하는데, 홍이(洪理)자청(子靑)에게 이를 말하여 도리어 능욕(凌辱)을 가하였으므로, 헌부에서 이것을 논집(論執)한 것뿐입니다. 비록 중도(中道)에 맞지 않았더라도 포용(包容)을 가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역사(役事)에 본래 사망(死亡)한 자가 없는데, 헌부(憲府)에서 공연히 역도(役徒)가 죽은 자가 있는가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엿보고, 조금 뒤에 또 탄핵하였다. 내가 못을 파게 한 까닭은 조수(鳥獸)나 어별(魚鼈)의 구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상국(上國)의 사명(使命)103) 을 위해서 한 것이다. 자청(子靑)이 토목(土木)을 마음속으로 달게 여겼다는 것은 무슨 일이며, 홍이가 사풍(士風)을 오염(汚染)시켰다는 것은 무슨 연고이며, 사필(史筆)이 쓰는 데 있어서는 어찌해서 허물이 되는가?"하였다. 대답하기를,

"헌부(憲府)에서 논(論)한 것을 신 등이 지적(指摘)해 알 수 없사오나, 다만 언관(言官)이 중도(中道)에 맞지 않았다 하더라도 또한 함용(含容)하는 것이, 언로(言路)를 열어주고 옹폐(壅蔽)104) 를 막는 것입니다. 만일 너그러이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걸핏하면 죄책(罪責)을 가한다면, 사책(史冊)에 쓰면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토목(土木)을 마음속으로 달게 여기고 사풍(士風)을 오염(汚染)시킨 것으로서 만일 지적할 만한 일이 있다면, 너희들도 마땅히 탄핵하여야 한다. 언관(言官)이 중도(中道)에 맞지 않는 말을 한 것을 또한 너그러이 용납한다면, 언관(言官)이 죄가 있는 것은 장차 어떻게 할 것이냐?"

하였다. 이튿날 김자지 등이 또 합문(閤門)에 엎드려 아뢰기를,

"헌부(憲府)는 전하(殿下)의 이목(耳目)의 관원인데 어찌 자청(子靑)의 일로 인하여 이목의 관원을 경(輕)하게 여기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너희들은 헌부(憲府)의 죄가 경(輕)하다고 생각하는가? 지금 비록 세 번째 간(諫)하더라도 내가 듣지 않겠다."

하였다. 이에 자지(自知) 등이 모두 물러나와 사직(辭職)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15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38면
  • 【분류】
    건설(建設) / 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註 099]
    나장(螺匠) : 죄인을 문초할 때 매를 때리는 하예(下隷).
  • [註 100]
    공함(公緘) : 글로써 죄인을 심문하는 것. 또는 그 내용.
  • [註 101]
    대신(臺臣) : 사헌부의 대사헌 이하 지평까지의 벼슬아치.
  • [註 102]
    합문(閤門) : 편전(便殿)의 앞문.
  • [註 103]
    사명(使命) : 사신(使臣).
  • [註 104]
    옹폐(壅蔽) : 임금의 총명(聰明)을 막아서 가림.

○乙卯/司憲府劾判恭安府事朴子靑子靑率繕工少監洪理等, 監督慕華樓南池之役, 旬日未就, 役徒勞困。 司憲執義權遇等欲劾之, 先遣書吏金思進吳貴珍, 密度池之深廣與水脈有無。 知之, 謂二人曰: "池距樓一百五十餘步, 長三百八十尺, 廣三百尺, 深二三丈。 水之有無, 則在汝所見。" 遂密爲子靑言其狀, 子靑執其吏折辱之, 幾欲箠楚, 旁有禁之者乃止。 自度必見彈劾, 馳馬先詣闕啓曰: "憲府使吏窺覘臣等監督形止。" 俄而, 憲府劾子靑曰: "累日鑿池, 乃不得水, 尙且甘心土木之役, 不肯啓聞停罷, 徒勞民力, 無宰相意趣。" 劾曰: "阿附子靑, 朝夕造門, 有似家臣。 强鑿無水之池, 不能請罷, 玷累士風。" 上聞之怒, 召掌務持平崔自海詰之曰: "鑿池之役, 予所命也。 子靑有何罪焉?" 欲下自海于巡禁司, 旣而怒稍解, 使巡禁司螺匠, 押自海寘于其家。 於是等皆待罪于家。 上命取憲府劾子靑洪理公緘覽之, 怒甚, 以示議政府曰: "憲司所爲如彼, 何以處之?" 領議政府事河崙、左政丞成石璘、右政丞李茂等啓曰: "憲司所爲雖失中, 言官之失, 不可加罪。" 乃命子靑洪理復督役。 命巡禁司曰: "思進貴珍, 宜縛而揭于池側, 以示諸人。" 又命兵曹佐郞崔進誠及內官二人, 爲監役官, 益發內資ㆍ內贍寺奴、軍器監別軍, 助其役。 鑿池旣深, 乃得水焉。

〔○〕 右司諫金自知等, 詣闕啓曰: "竊惟臺臣, 以言爲責, 但欲盡職而已, 而殿下如此挫折之, 非惟駭於今日之見聞, 書於史冊, 非所以貽範後世也。 且恐自今, 言官任輕, 而言路閉塞矣。" 上使中官傳旨: "若等誠知憲府所以劾問之情實者, 亦宜退就於家, 毋得出入。 如曰不知, 覈實復啓。" 自知等對曰: "臣等但聞憲府以鑿池之故, 劾子靑耳, 若情實則非所敢知。" 翼日, 自知等伏閣啓曰: "昨日, 殿下有旨, 覈實復啓。 臣等竊聞, 憲府以役久未訖, 使人視之, 洪理乃言於子靑, 反加凌辱, 憲府以此論執耳。 雖或不中, 願加包容。" 上曰: "此役本無死亡者, 而憲府妄意役徒有死者, 使人覘之, 尋又劾之。 予所以使鑿池者, 非爲鳥獸魚鼈之玩, 但爲上國使命而爲之也。 子靑之甘心土木者, 何事, 洪理之汚染士風者, 何故, 史筆所書者, 未知何以爲有過乎?" 對曰: "憲府所論, 臣等未知所指, 但言官雖或不中, 亦且含容, 所以開言路防壅蔽也。 若不優納, 動加罪責, 史冊書之, 則非美事矣。" 上曰: "甘心土木, 汚染士風, 若有可指之事, 則若等亦當劾之。 言官不中, 亦且優容, 則言官有罪者, 且將如何?" 翼日, 自知等又伏閣啓曰: "憲府, 乃殿下耳目之官, 乃何以子靑之故, 輕耳目之官乎?" 上曰: "若等以憲府之罪爲輕乎? 今雖三諫, 予未之聽矣。" 於是, 自知等皆退而辭職。


  • 【태백산사고본】 6책 15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38면
  • 【분류】
    건설(建設) / 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