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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14권, 태종 7년 11월 25일 을해 2번째기사 1407년 명 영락(永樂) 5년

삼관(三館)의 유생들이 의정부에 잡과 출신자들과의 차이를 인정해 달라고 건의하다

삼관(三館)343) 에서 의정부(議政府)에 글을 올렸다. 유학 제조(儒學提調)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과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문화(李文和)제생원(濟生院)에 앉아 고강(考講)하려고 하니, 삼관의 여러 유생(儒生)들이 모두 연고를 칭탁하고 강(講)하지 않고 물러가서, 정부에 글을 올렸다.

"삼가 상고하건대, 《춘추전(春秋傳)》에 말하기를, ‘백가(百家)를 내치고 공씨(孔氏)를 높인다. 이것은 만세의 아름다운 법이다' 하였는데, 공씨의 무리는 예의(禮義)를 귀하게 여기고 염치(廉恥)를 존숭하는 것이 그 큰 절개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가 창업한 초기에 제도를 세우고 기강을 확립하여 만세에 법을 남기려 하여, 유학(儒學)의 제과(諸科)에서 천한 악공(樂工)에 이르기까지 무리를 지어 예조(禮曹)에 모여, 그 재예(才藝)를 시험하여 자급(資級)을 옮기는 법을 삼으니, 권장(勸奬)하는 도리가 가위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모두 재주가 없는 사람들로서 두 번이나 국가의 시험에 합격하여 전정(殿庭)에서 대책(對策)에 답하였으니, 여러 잡과(雜科)에 비하면 진실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천한 악공과 더불어 같이 취재(取才)한 뒤에야 서용(敍用)한다면, 국가에서 유학을 높이고 선비를 대접하는 뜻에 부족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전(傳)에 말하기를, ‘예의염치(禮義廉恥)는 이것을 사유(四維)라고 한다.’ 하였으니, 사유(四維)가 진작되고 폐하게 되는 것이 실로 풍화(風化)에 관계됩니다. 저희들이 이것을 생각하면 저으기 유감스런 점이 있습니다.

본년(本年) 11월 초7일에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이 학식(學式)을 지어서 삼관(三館)에 고시(告示)하였는데, 그 첫째에, ‘매월 초하루와 보름 뒤에 두차례씩 삼관(三館) 제원(諸員)은 각각 이름 아래에다 이미 읽은 경서(經書)와 지금 읽는 아무 책을 갖추 기록하고, 모월(某月) 모일(某日)에서 시작하여 모월 모일까지 이미 몇 편을 읽었다고 자세히 하나하나 써서 문안(文案)을 만들어 바치라.’ 하였고, 둘째에는, ‘제조(提調)가 나와 앉는 날에 삼관(三館) 제원(諸員)이 먼저 이르러, 각각 읽은 경서(經書)를 가지고 서로 토론하고, 제조가 나와 앉은 뒤에 그 경서의 차례대로 의난(疑難)한 곳을 질문하여, 그 나은 것에 따라 질정(質正)하라.’ 하였고, 세째에는, ‘시산(時散) 6품 이상의 관원(官員)으로서 자진하여 와서 강론해 질정(質正)을 받을 자는 허락한다.’ 하였고, 네째에는 ‘제원(諸員)이 까닭없이 한 번 불참한 자는 치부(置簿)하여 과(過)를 기록하고, 두 번 불참한 자는 벌로서 가볍게 제마수(齊馬首)를 행하고, 세 번 불참한 자는 중하게 제마수를 행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권학하는 방법의 훌륭한 법입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예조에서 취재(取才)하는 것은 없애고, 한결같이 길창군(吉昌君)이 지은 위의 법식에 의하여 밝게 권과(勸課)하는 것을 보이면, 국가의 권장하는 방법과 예의 염치의 도리에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의정부에서 그 글을 가지고 아뢰니, 임금이 말하였다.

"이미 이루어진 법을 고칠 수 없다. 10학(十學)344) 가운데서 만일 삼관(三館)의 고강(考講)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 하나를 폐지하는 것이다. 또 제과(諸科) 내에 이과(吏科)·음양과(陰陽科)·역과(譯科) 같은 유(類)가 어찌 모두 천인이라 하여, 이들과 더불어 항오(行伍)를 이루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인가! 영인(伶人)·악공(樂工)같은 것은 비록 다같이 ‘10학(十學)’이라고는 하나, 그 업(業)이 심히 천하니 유학(儒學)과는 다르다."

황희(黃喜)가 아뢰었다.

"삼관(三館)의 뜻은 다만 이것 때문이 아닙니다. 현재 상정(詳定)한 조례(條例)에 있기를, ‘그 읽은 것을 시험하여 상등인 자는 초천(超遷)하고, 그 다음인 자는 예(例)에 따라 천전(遷轉)하며, 또 그 하등인 자는 외방에 서용한다.’고 하였는데, 만일 새 제도대로 한다면, 오래 되어 차례가 천전하는 데 해당된 자가 엄체(淹滯)되어 펴지를 못하게 되고, 신진(新進) 가운데 아래에 있는 자가 요행으로 초자(超資)하여 발탁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록(利祿)을 가지고 사람을 유혹하는 것이니, 후래(後來)에 전하기가 곤란할 듯합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일이라면, 뜬말을 믿고 법을 허물어뜨릴 수는 없다. 만일 이 무리들의 말을 들어준다면, 이것 또한 법을 무너뜨리는 일단(一端)이 된다. 어찌 그것이 옳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5책 14권 43장 B면【국편영인본】 1책 424면
  • 【분류】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상-유학(儒學) / 출판-서책(書冊)

  • [註 343]
    삼관(三館) : 성균관(成均館)·예문관(藝文館)·교서관(校書館).
  • [註 344]
    10학(十學) : 태종 6년(1406)에 좌정승(左政丞) 하윤이 설치한 10가지 교육기관. 즉 첫째는 유학(儒學), 둘째는 무학(武學), 세째는 이학(吏學), 네째는 역학(譯學), 다섯째는 음양 풍수학(陰陽風水學), 여섯째는 의학(醫學), 일곱째는 자학(字學), 여덟째는 율학(律學), 아홉째는 산학(算學), 열째는 악학(樂學)이었음.

○三館獻書于議政府。 儒學提調吉昌君 權近及禮曹判書李文和, 坐濟生院, 欲考講, 三館諸儒, 皆托故不講而退。 乃獻書于政府曰:

謹按《春秋傳》曰: "黜百家尊孔氏, 此萬世之令典也。" 而孔氏之徒, 貴禮義崇廉恥, 是其大節也。 今我國家, 創業之初, 立經陳紀, 垂憲萬世, 自儒學諸科, 以至樂工之賤, 群聚禮曹, 試其才藝, 以爲遷資之法, 其奬勸之道, 可謂至矣。 然某等俱以不才, 再中國試, 對策殿庭, 視諸雜科, 固有異矣。 更與樂工之賤等, 而取才然後敍用, 則於國家尊儒待士之義, 似有慊焉。 《傳》曰: "禮義廉恥, 是謂四維。" 四維振廢, 實關於風化。 某等念此, 竊有憾焉。 本年十一月初七日, 吉昌君 權近, 著爲學式, 以示三館, 其一曰: "每月朔望後二次, 三館諸員, 各於名下, 具錄曾讀經書及今讀某書, 自某月某日始, 至某月某日已讀幾篇, 備細開寫, 擧案進呈。" 其二曰: "提調坐日, 三館諸員先到, 各以所讀經書, 互相論議。 提調坐後, 以其經次, 質問疑難, 從其長者而就正焉。" 其三曰: "時散六品已上員, 自來講論就正者聽。" 其四曰: "諸員無故一不至者, 置簿記過; 二不至者, 罰輕行齊馬首; 三不至者重行。" 此誠勸學之良法也。 願自今除禮曹取才, 一依吉昌君所著上項令式, 明示勸課, 則其於國家奬勸之方, 禮義廉恥之道, 幸甚。

議政府以其書啓, 上曰: "已成之法, 不可改也。 十學之中, 若不許三館考講, 則廢其一矣。 且諸科之內, 若吏科陰陽科譯科之類, 豈盡是賤人, 而恥與之爲伍乎? 若伶人樂工, 則雖均曰十學, 而所業甚賤, 與儒學異矣。" 黃喜啓曰: "三館之意, 非只爲此也。 見今詳定條例, 有曰: ‘試其所讀, 上等超遷, 其次隨例遷轉, 又其下者外敍。’ 若果如新制, 則久次當遷者, 淹滯而未伸; 新進居下者, 僥倖而超擢。 是以利祿誘人, 似難示後。" 上曰: "可東可西之事, 不可信浮言而毁法。 若聽此輩之言, 是亦毁法之一端也, 其可乎?"


  • 【태백산사고본】 5책 14권 43장 B면【국편영인본】 1책 424면
  • 【분류】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상-유학(儒學) / 출판-서책(書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