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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14권, 태종 7년 9월 25일 을해 1번째기사 1407년 명 영락(永樂) 5년

세자 이제를 하정사로 경사에 보내다. 사신 일행의 명단

세자(世子) 이제(李禔)를 보내어 명나라 서울(京師)에 갔으니, 정조(正朝)를 하례(賀禮)하기 위함이었다. 세자(世子)로 진표사(進表使)를 삼고, 완산군(完山君) 이천우(李天祐)로 부사(副使)를 삼고, 우정승(右政丞) 이무(李茂)로 진전사(進箋使)를 삼고, 계성군(雞城君) 이내(李來)로 부사를 삼았다. 시종관(侍從官)은 우군 동지 총제(右軍同知摠制) 이현(李玄)·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맹사성(孟思誠)과 대호군(大護軍) 손윤조(孫閏祖)·사재감(司宰監) 지유용(池有容) 등 12인이었다. 서장관(書狀官)은 인녕부 좌사윤(仁寧府左司尹) 설칭(薛偁)·사헌 집의(司憲執義) 허조(許稠)였고, 통사(通事)는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곽해룡(郭海龍)·인녕부 우사윤(仁寧府右司尹) 오진(吳眞) 등 6인이었다. 압마(押馬)는 상호군(上護軍) 이공효(李公孝) 등 2인이었고, 압물(押物)은 봉상령(奉常令) 이회(李薈) 등 2인이었다. 사복관(司僕官)은 부정(副正) 하경복(河敬復)이었고, 의원(醫員)은 판전의감사(判典醫監事) 양홍달(楊弘達)이었고, 내시(內侍)는 지내시부사(知內侍府事) 박영문(朴英文) 등 2인이었다. 해관(奚官)307) 은 영(令) 채귀(蔡貴) 등 2인이었고, 사의(司衣)308) 는 사재 소감(司宰少監) 심서(沈舒) 등 2인이었고, 감주(監廚)309) 는 사직(司直) 홍의성(洪義成)이었고, 주자(廚子)는 3인이었고, 내료(內僚)는 7인이었고, 구한 타자군(驅趕駄子軍)은 24인이었고, 타각부(打角夫)는 봉례랑(奉禮郞) 김시우(金時遇) 등 2인이었고, 양마(養馬)는 3인이었고, 마의(馬醫)는 1인이었고, 견마배(牽馬陪)는 7인이었다. 각 관(各官)의 종인(從人)은 27명이었다. 장행마(長行馬)는 50필이었고, 노차(路次)의 반전(盤纏)은 저마포(苧麻布)가 6백 필이었다. 별례(別例)로 황제에게 진헌하는 물건은 안자(鞍子)가 4면(面)이었고, 궁대(弓袋)·전통(箭筒)이 2부(副)이었고, 잡색마(雜色馬)가 50필이었다. 동궁(東宮)의 안자(鞍子)가 2면(面)이었고, 궁대(弓袋)·전통(箭筒)이 1부(副)이었고, 잡색마(雜色馬)가 10필이었다. 임금이 법복(法服)을 갖추고 표전(表箋)에 절하고 나서, 장의문(藏義門)으로 나가 세자(世子)를 영서역(迎曙驛) 동쪽에서 전송하고, 세자에게 이르기를,

"길이 험하고 머니, 마땅히 자애(自愛)하여야 하느니라. 저부(儲副)라는 것은 책임이 중하다. 오늘의 일은 종사(宗社)·생민(生民)을 위한 계책이니라."

하였다. 세자가 울면서 하직하니, 임금도 또한 눈물을 흘리고, 좌우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드디어 환궁(還宮)하였다.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3공신(三功臣)은 가돈(街頓) 남교(南郊)에서 절하여 작별하였고, 의안 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는 종친을 거느리고 임진 나루[臨津渡]에서 전송하였다.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박신(朴信)·첨내시부사(僉內侍府事) 김완(金琓)을 보내어 요동(遼東)까지 호송하게 하였다. 처음에 설칭(薛偁)이 오래도록 세자 보덕(世子輔德)으로 있었으므로 조현(朝見)하는 데 마땅히 수행할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였고, 조정의 의논도 또한 압물(押物)로 삼았었는데, 수조(隨朝)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태거(汰去)되었다. 서장관(書狀官)인 우사간(右司諫) 신상(申商)이 헌부(憲府)의 탄핵을 받으니, 설칭이내(李來)에게 부탁하여 따라가기를 청하였다. 이내가 떠날 때에 임하여 아뢰기를,

"설칭은 노성하므로 종관(從官)에 둘 만합니다."

하였고, 임금도 또한 신상(申商)이 일찍이 말하기를, ‘세자가 민씨(閔氏)의 가문에서 생장하였으니, 민무구를 소외(疎外)하거나 배척하기는 어렵다.’고 하였다는 말을 듣고, 〈신상을〉 좋아하지 않았던 터라, 설칭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설칭이 이미 청을 허락받으매 기뻐하여 말하기를,

"조현(朝見)의 일행에 참여하였다가 돌아오면, 재상 되기가 무어 어려울 게 있겠나!"

하였다. 설칭은 집이 가난하여 드디어 집을 팔아서 행장(行裝)을 꾸렸기 때문에 홀로 뒤떨어졌다.


  • 【태백산사고본】 5책 14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16면
  • 【분류】
    외교-명(明) / 왕실-의식(儀式)

  • [註 307]
    해관(奚官) : 관인(官人)의 질병(疾病)·범죄(犯罪) 따위를 맡아 보던 내시부(內侍府)의 종8품직(從八品職).
  • [註 308]
    사의(司衣) : 궁내(宮內)의 의복(衣服)·수식(首飾)을 맡아 보던 내시부(內侍府)의 정6품직.
  • [註 309]
    감주(監廚) : 궁내에서 음식을 만드는 주자(廚子)를 감시 감독하던 내시부(內侍府)의 종5품직.

○乙亥/遣世子如京師。 賀正也。 以世子爲進表使, 完山君 李天祐副之; 右政丞李茂爲進箋使, 雞城君 李來副之。 侍從官右軍同知摠制李玄、藝文館提學孟思誠及大護軍孫閏祖、司宰監池有容等十二人, 書狀官仁寧府左司尹薜偁、司憲執義許稠、通事判軍器監事郭海龍、仁寧府右司尹吳眞等六人, 押馬上護軍李公孝等二人, 押物奉常令李薈等二人, 司僕官副正河敬復、醫員判典醫監事楊弘達、內侍知內侍府事朴英文等二人, 奚官令蔡貴等二人, 司衣司宰少監沈舒等二人, 監廚司直洪義成, 廚子三人, 內僚七人, 驅趕駄子軍二十四人, 打角夫奉禮郞金時遇等二人, 養馬三人, 馬醫一人, 牽馬陪七人, 各官從人二十七名。 長行馬五十匹, 路次盤纏苧麻布六百匹, 別例進獻帝所鞍子四面, 弓袋箭筒二副, 雜色馬五十匹, 東宮鞍子二面, 弓袋箭筒一副, 雜色馬一十匹。 上具法服, 拜表箋訖, 出自藏義門, 餞世子于迎曙驛之東。 謂世子曰: "道阻且脩, 宜自愛。 儲副任重, 今日之事, 爲宗社生民計也。" 世子泣辭, 上亦泫然, 左右莫不流涕。 遂還宮。 議政府六曹三功臣拜辭于街頓南郊, 義安大君 率宗親餞于臨津渡。 遣淸平君 李伯剛、參知議政府事朴信、僉內侍府事金琓, 護送至遼東。 初, 以久爲世子輔德, 自度當隨朝, 朝議亦充爲押物, 旣而, 以隨朝人多汰之。 及書狀官右司諫申商爲憲府所劾, 乃托李來請從行。 臨行啓曰: "老成, 可備從官。" 上亦聞嘗曰: "世子生長閔氏家門, 疎斥無咎等難矣。" 不悅, 乃以代之。 旣得請, 喜曰: "與朝見之行而還, 則宰相何難得之有!" 家貧, 遂賣其家以治裝, 故獨後焉。


  • 【태백산사고본】 5책 14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16면
  • 【분류】
    외교-명(明) / 왕실-의식(儀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