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품사 서장관 정치가 돌아와 황후가 죽었다는 명나라 예부의 고시
계품사(計稟使) 서장관(書狀官) 정치(鄭穉)가 왔다. 임금이 맞아서 묻기를,
"예부(禮部)에서 무슨 말을 하던가?"
하니, 대답하였다.
"예부가 말하기를, ‘김성(金聲)이 먼저 황제께 주문(奏聞)하기를, 「만산 군민(漫散軍民) 안에는 관사(官私)의 천(賤)이라 청탁하여 속인 것이 많습니다.」 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또 묻기를,
"황제가 너희들을 대접하기를 어떻게 하던가?"
하니, 대답하였다.
"후하게 대접하였습니다. 신 설미수(偰眉壽)는 황제께 시연(侍宴)한 것이 세 번이고, 또 별도로 상사가 있었습니다. 예부 낭중(禮部郞中)과 환관(宦官) 두어 사람으로 하여금 신 등을 인도하게 하여 불우(佛宇)와 관사(館舍)의 경치 좋은 곳을 두루 구경시키고, 매양 경치가 좋은 곳에서는 잔치를 베풀어 먹이었습니다. 또 황제가 서각문(西角門)에 나아와서 설미수에게 명하기를, ‘너희 나라는 말이 산출되는 땅이니, 돌아가 너의 임금에게 말하여, 좋은 말 3천 필을 네가 가지고 오면, 짐(朕)이 호부(戶部)의 포견(布絹)으로 요동(遼東)에 보내어 그 값을 보상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황제가 또 말하기를, ‘네가 안남(安南)을 평정한 조서(詔書)를 보았느냐?’고 하므로, 설미수가 대답하기를, ‘신이 서울을 떠난 지 수일 뒤에 사신을 길에서 만났으나, 그 자세한 것을 배신(陪臣)이 어떻게 알겠습니까?’고 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그럴 것이다. 너에게 자세히 말하겠다. 처음에 안남(安南)의 적신(賊臣) 여창(黎蒼)이 왕위(王位)를 계승하기를 청하고 말하기를, 「국왕(國王) 진일규(陳日煃)가 아들이 없는데, 신이 그 생질입니다.」고 하였다. 짐이 생각하기를, ‘나라에는 하루도 군장(君長)이 없을 수 없다.’고 하여, 입후(立後)하기를 명하였는데, 그 뒤에 진일규의 손자가 도망해 왔으므로 여적(黎賊)이 짐을 속이고 왕위를 도둑질한 것을 알았다. 조금 뒤에 여적이 진일규의 손자가 명나라 서울에 있는 것을 알고, 그를 세워서 후사(後嗣)를 삼기를 청하였다. 짐은 늙고 진실한 무인이라, 참말로 곧이 듣고 조관(朝官)으로 하여금 진씨의 손자를 거느리고 그 나라에 돌아가게 하였는데, 여적이 복병(伏兵)하여 이를 죽이고, 포학함이 더욱 방사(放肆)하여졌다. 짐이 부득이하여 장수에게 명하여 토벌하여, 오랜만에 적괴(賊魁)를 잡아왔다. 짐이 들으니, 너의 임금은 글을 읽은 사람이라 하니, 여적(黎賊)이 완악하기 심한 것을 알지 못하고 반드시 짐더러 군사(軍事)에 부지런하여 멀리 정벌하였다고 할 것이다. 네가 돌아가서 짐을 위하여 자세히 왕에게 고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듣고,
"그게 무슨 말이냐? 황제가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배신(陪臣)에게 또 후하게 대접하였으니, 어찌 감히 명령을 어기겠는가! 고황제(高皇帝) 때에는 비록 그 값을 주지 않더라도 말을 자주 바쳤었는데, 하물며 이제 장차 그 값을 주는 경우이겠는가!"
하고, 곧 진헌 관마색(進獻官馬色)을 설치하고,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유양(柳亮)·공조 판서 유용생(柳龍生)·총제(摠制) 김계지(金繼志)로 제조(提調)를 삼았다. 정치(鄭穉)가 예부(禮部)의 고시(告示)를 가지고 와서 황후(皇后)의 승하(昇遐)한 것을 보고하고, 또 황제의 의관(衣冠)·의장(儀章)·궁실(宮室)·영주(楹柱)274) 를 모두 소(素)275) 로 꾸몄다고 말하였다. 그 고시(告示)는 이러하였다.
"영락(永樂) 5년 7월 초4일에 대행 황후(大行皇后)가 붕서(崩逝)하였는데, 지금 마땅히 행해야 할 사리(事理)를 열서(列書)하여 문무(文武) 관원인(官員人) 등에게 고시(告示)하여 알려서 시행케 한다.
1. 명나라 서울에 있는 문무 백관(文武百官)은 본월(本月) 초6일 아침에 각각 소복(素服)·흑각대(黑角帶)·오사모(烏紗帽)를 갖추고, 사선문(思善門) 밖에 다다라 곡림례(哭臨禮)가 끝나면 봉위례(奉慰禮)를 행할 것. 초8일 아침에 각관(各官)은 소복(素服)하고 효복(孝服)276) 을 가지고 우순문(右順門) 밖에 다다라서 입고, 성복(成服)을 기다려서 사선문(思善門) 밖에 들어와, 곡림례(哭臨禮)가 끝나면 나가서 효복(孝服)을 바꾸고, 봉위례(奉慰禮)를 행하여 끝내면 각각 효복을 가지고 나갈 것. 초9일·10일의 예(禮)도 같다. 인하여 본아문(本衙門)에서 재숙(齋宿)할 것. 효복(孝服)은 《예제집요(禮制集要)》 내(內)에 자식이 부모를 위하여 참최(斬衰)를 입는다는 것에 의하여, 참최(斬衰)를 입는 것으로 이번에 합의함.
1. 명나라 서울[京師]에 있는 문무 4품(文武四品) 이상 관원의 명부(命婦)는 본월(本月) 초7일 아침에 각각 소복(素服)하고, 금은(金銀)·주취(珠翠)·지분(脂粉)·장식(粧飾)은 사용하지 못하고, 서화문(西華門)으로 들어와 사선문(思善門) 안에 나와서 기다렸다가 곡림례(哭臨禮)를 행할 것. 초8일에서 10일까지 3일 동안 새벽에 각각 소복(素服)하고 효복(孝服)을 바꾸고, 봉위례(奉慰禮)를 행하여 끝내면 각각 효복(孝服)을 가지고 서화문 안에 들어와서 입고, 사선문(思善門) 안에 이르러 기다렸다가 곡림례(哭臨禮)를 행할 것. 효복(孝服)은 마포 개두(麻布蓋頭)·마포 장삼(麻布長衫)·마포 장군(麻布長裙)·마포 혜(麻布鞋)를 쓸 것.
1. 명나라 서울에 있는 청제 관원(聽除官員)·판사관(判事官)·감생(監生)·생원(生員)·인재(人材)·이전(吏典)·승도(僧道)·방상장(坊廂長) 등의 사람은 관복(官服)에 상복(喪服)하고, 그 나머지는 소복(素服)하고 모두 순천부(順天府)에 다다라 3일 동안 거애(擧哀)할 것.
1. 명나라 서울에 있는 군민(軍民)은 3일 동안 소복(素服)하고, 부인은 소복하고 장식을 하지 않기를 모두 본월(本月) 초8일부터 시작하여 10일에 이르러 그칠 것.
1. 음악을 정지하고, 도살(屠殺)을 금하고, 가취(嫁娶)를 금할 것."
- 【태백산사고본】 5책 14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11면
- 【분류】외교-명(明)
- [註 274]
○庚戌/計稟使書狀官鄭穉來, 上迎問曰: "禮部有何言?" 對曰: "禮部曰: ‘金聲先聞于帝曰: 「漫敬軍民內, 托以官私之賤而誣之者多矣。」’" 上又問: "皇帝待若等何如?" 對曰: "待以厚。 臣眉壽之侍宴於帝者三, 又別有賞賜。 令禮部郞中及宦官數人, 引臣等, 遍觀佛宇館舍之奇勝, 每於奇觀, 設宴以饋。 又帝御西角門, 命眉壽曰: ‘爾國産馬之地, 歸報爾王, 良馬三千匹, 汝可將來。 朕以戶部布絹送于遼東, 當酬其直。’ 帝又曰: ‘爾見平安南詔否?’ 眉壽對曰: ‘臣離京數日, 遇使臣於途, 然其纖悉, 陪臣何知?’ 帝曰: ‘喏。 爲爾詳告之。 初安南賊臣黎蒼請嗣位, 乃曰: 「國王陳日煃絶嗣, 而臣爲其甥」。 朕以爲國不可一日無長, 爰命立後。 厥後日煃之孫來奔, 乃知黎賊誑朕竊位也。 旣黎賊知陳孫在京, 請立爲後, 朕老實武人, 聽以爲眞, 令朝官率陳孫復國, 黎賊伏兵殺之, 其暴益肆。 朕不獲已, 命將討之, 久乃得賊魁以來。 朕聞爾王讀書人也, 未知黎賊頑甚, 必謂朕勒兵遠伐矣。 爾還爲朕詳告于王。’" 上聞之曰: "是何言也? 帝謂我如此, 而於陪臣且厚接之, 豈敢方命! 在高皇帝時, 雖不賜其直, 獻馬數矣。 況今將賜其直乎?" 卽置進獻官馬色, 以參贊議政府事柳亮、工曹判書柳龍生、摠制金繼志爲提調。 穉齎禮部告示, 來報皇后升遐, 且言: "皇帝衣冠儀章宮室楹柱, 皆用素飾。" 其告示曰:
永樂五年七月初四日, 大行皇后崩逝。 今將合行事理, 開坐告示, 文武官員人等知會施行。 一, 在京文武百官, 於本月初六日早, 各具素服黑角帶烏紗帽, 赴思善門外, 哭臨禮畢, 行奉慰禮。 初八日早, 各官素服, 將帶孝服, 赴右順門外穿着, 伺候成服, 入思善門外哭臨畢, 就易孝服, 行奉慰禮畢, 各將孝服出。 初九日十日禮同, 仍於本衙門齋宿。 孝服依《禮制集要》內子爲父母服斬衰, 今議合服斬衰。 一, 在京文武四品以上官命婦, 於本月初七日早, 各素服, 不用金銀珠翠脂粉粧飾, 從西華門進至思善門內伺候, 行哭臨禮。 初八日至十日三日, 淸晨各素服, 將帶孝服, 入西華門內穿着, 赴思善門內伺候, 行哭臨禮。 孝服用麻布蓋頭、麻布長衫、麻布長裙、麻布鞋。 一, 在京聽除官員、判事官、監生、生員、人材、吏典、僧道、坊廂長人等官服喪服, 其餘素服, 俱赴順天府, 擧哀三日。 一, 在京軍民, 素服三日; 婦人素服不粧飾, 俱自本月初八日爲始, 至十日止。 一, 停音樂, 禁屠宰, 禁嫁娶。
- 【태백산사고본】 5책 14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11면
- 【분류】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