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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14권, 태종 7년 7월 10일 신유 2번째기사 1407년 명 영락(永樂) 5년

영의정부사 이화 등이 민무구·민무질·신극례의 죄를 청하는 상소문

개국 정사 좌명 공신(開國定社佐命功臣)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이화(李和) 등이 상소하여,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신극례(辛克禮) 등의 죄를 청하였다. 상소(上疏)는 이러하였다.

"《춘추(春秋)》의 법에 인신(人臣)의 죄 가운데 금장(今將)237) 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이는 사심(邪心)을 막고 난원(亂源)을 방지하자는 것입니다. 여강군(驪江君) 민무구(閔無咎)·여성군(驪城君) 민무질(閔無疾) 등은 궁액(宮掖)238) 에 인연하여 지나치게 성은(聖恩)을 입어서, 일가 형제(一家兄弟)가 모두 존영(尊榮)을 누리니, 마땅히 조심하고 삼가고 두려워하여 그 직책을 정성껏 지켜서, 감히 교만하고 방자함이 없이 성은을 갚기를 도모하여야 할 터인데, 도리어 분수를 돌보지 않고 권병(權柄)을 전천(專擅)하기를 생각하여, 속으로 금장(今將)의 마음을 품고 발호(跋扈)할 뜻을 펴보려 하였습니다. 지난 해에 전하께서 장차 내선(內禪)을 행하려 할 때, 온 나라 신민(臣民)이 마음 아프게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민무구 등은 스스로 다행하게 여겨 기뻐하는 빛을 얼굴에 나타냈으며, 전하께서 여망(輿望)에 굽어 좇으시어 복위(復位)하신 뒤에 이르러서도, 온 나라 신민(臣民)이 기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민무구 등은 도리어 슬프게 여겼습니다. 이는 대개 어린아이를 끼고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하고자 한 것이니, 불충한 자취가 소연(昭然)히 나타나, 여러 사람이 함께 아는 바입니다.

또 그때를 당하여, 전하께서 종지(宗支)를 위해 영세(永世)토록 보전하여 편안히 할 계책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민무구가 감히 말하기를, ‘유액(誘掖)할 사람이 없다면 아직 이렇게 하는 것도 가(可)합니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송연(竦然)하여 곧 민무구에게 이르기를, ‘옛부터 제왕(帝王)은 적장자(嫡長子) 이외에 다시 다른 아들이 없는 것이 가(可)하냐?’ 하시었습니다. 안암(安岩) 이어소(移御所)에 이르러 전하께서 또 민무구에게 이르시기를, ‘인군이 반드시 아들 하나만 있어야 좋겠느냐?’ 하니, 민무구가 대답하기를, ‘신이 일찍이 그런 뜻을 고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민무구의 뜻은 대개 종지(宗支)를 제거하고자 한 것이니, 장래의 화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민무질은 지난날 전하께서 즉위한 지 오래 되지 않았을 때에, 대접하고 위로하는 것이 특별하고 후하였는데도, 정승 이무(李茂)의 집에 가서 앙앙(怏怏)히 불만의 뜻이 있는 것 같이 말하기를, ‘전하가 마침내는 나를 보전하지 아니할 것이니, 장차 어떻게 할꼬?’ 하므로, 이무가 간절히 예의(禮義)로 타이른 뒤에야 항복하였습니다. 그때도 처음부터 염려할 만한 일이 없었는데, 민무질이 의심과 두 마음을 품고서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였으니, 그 뜻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듣건대, 민무구 등이 주상께 아뢰기를, ‘세자(世子) 이외에는, 왕자(王子) 가운데 영기(英氣)가 있는 자는 없어도 좋습니다.’ 하였다 하니, 금장(今將)의 마음을 품은 것이 명백합니다. 또 일찍이 전하의 곁에 있을 때, 감히 취산군(鷲山君) 신극례(辛克禮)를 부추겨서 친남(親男)의 먹장난[墨戲]한 종이를 취하여 찢게 하고, 또 말하기를, ‘제왕의 아들이 영기 있는 자가 많으면 난을 일으킨다.’고 하였으니, 또한 종지(宗支)를 삭제(削除)하고자 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그 마음이 불충한 것을 환히 아시면서도, 훈친(勳親)의 옛 정리를 생각하여 반드시 보전하시려 하여, 굽어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셨지만, 민무질이 또 구종지(具宗之)의 집에 이르러 말하기를, ‘전하가 우리들을 의심하고 꺼리신다.’고 하였고, 또 전하더러 참소하는 말을 듣고 믿는다 하여, 불손한 말이 여러 번 입에서 나왔으니, 금장(今將)의 죄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대의로 결단하시고 민무구·민무질·신극례 등을 유사(攸司)에 내려 그 정상을 국문하게 하여, 난의 근원을 막으시면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상소를 대내(大內)에 머물러 두고 내리지 아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14권 2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03면
  • 【분류】
    변란(變亂) / 정론(政論)

  • [註 237]
    금장(今將) :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말하기를, ‘임금의 친척에겐 장(將)이 없고, 장(將)이 있으면 반드시 벤다.’고 하였는데, 《한서(漢書)》 숙손통전(叔孫通傳)을 보면, ‘인신(人臣)에게는 장(將)이 없어야 한다.’ 하고, 그 주(注)에 ‘장(將)은 역란(逆亂)을 말한다.’고 하였음. 그러므로 금장(今將)은 곧 역란(逆亂)의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함.
  • [註 238]
    궁액(宮掖) : 궁액(宮掖)은 궁문(宮門)의 좌우에 있는 소문(小門)이나 방사(旁舍)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왕비(王妃)를 가리킴.

○開國定社佐命功臣領議政府事李和等, 上疏請閔無咎閔無疾辛克禮等罪。 疏曰:

《春秋》之法, 人臣之罪, 莫大於今將, 所以杜邪心而防亂源也。 驪江君 閔無咎驪城君 閔無疾等, 夤緣宮掖, 過蒙聖恩, 一家兄弟, 皆享尊榮, 誠宜小心謹畏, 恪守其職, 罔敢驕逸, 圖報聖恩, 顧乃不顧涯分, 思擅權柄, 潛蓄今將之心, 欲逞跋扈之志。 去年殿下將行內禪之時, 擧國臣民罔不痛心, 而無咎等自以爲幸, 喜形于色, 及至殿下俯從輿望, 復位之後, 擧國臣民罔不忻慶, 而無咎等反以爲慼, 蓋欲挾幼以逞威福, 不忠之迹, 昭然炳著, 衆心共知。 又當其時, 殿下欲爲宗支, 圖其永世保安之計, 而無咎敢曰: "苟無誘掖之人, 則可姑且如此耳。" 殿下聞之竦然, 卽謂無咎曰: "自古帝王, 嫡長之外, 更無餘子可乎?" 及至安巖移御之所, 殿下又謂無咎曰: "人君必須只有一子可乎?" 無咎對曰: "臣嘗告其然矣。" 無咎之意, 蓋欲除去宗支, 將來之禍, 不可測也。 況無疾曩在殿下卽位未久之時, 待慰優厚, 乃詣政丞李茂之第, 怏怏若有不滿之意, 以爲: "殿下終不我保, 其將何以?" 李茂諄諄諭以禮義, 然後自服。 當其時, 初無可慮之事, 而無疾乃懷疑(二)〔貳〕 不能自安, 其意何如? 竊聞無咎等啓于上曰: "世子之外, 王子之有英氣者, 無亦可也。" 其蓄今將之心明矣。 又嘗在殿下之側, 敢激鷲山君 辛克禮, 取親男墨戲而裂之, 且曰: "帝王之子, 有英氣者多, 則致亂", 亦欲削除宗支也。 殿下灼知其心不忠, 然念勳親之舊, 必欲保全, 曲加恩貸。 無疾又至具宗之之家, 以爲: "殿下疑忌我等。" 又謂殿下聽信讒言, 不遜之言, 屢發於口。 今將之罪, 莫大於此。 伏望殿下, 斷以大義, 將無咎無疾克禮等下攸司, 鞫問其情, 以杜亂源, 幸甚。

疏留中不下。


  • 【태백산사고본】 5책 14권 2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03면
  • 【분류】
    변란(變亂) / 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