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간원에서 하윤 등 재상들의 죄를 논했으나, 이를 무마시키다
광연루(廣延樓)에 거둥하여 우사간 대부(右司諫大夫) 오승(吳陞)·좌정언(左正言) 정초(鄭招)를 인견(引見)하였다. 두 사람이 대궐에 나와 아뢰기를,
"지난달 28일에 전하께서 신 등에게 명하시기를, ‘중외(中外) 신하들의 득실(得失)을 장문(狀文)을 갖추어 아뢰라.’ 하셨으므로, 신 등이 맨 먼저 예전의 삼공(三公)이 재앙(災殃)을 만나 자리를 피한 고사(故事)를 진달하였었습니다. 근년(近年) 이래로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서로 겹치니, 마땅히 대신(大臣)이 허물을 지고 사면(辭免)할 때입니다. 그런데, 하윤(河崙)과 조영무(趙英茂) 등이 은총(恩寵)을 탐하여 사면하지 않고 다시 법제(法制)를 세웠으며, 또 사신(使臣) 황엄(黃儼)은 황제가 총애하고 믿는 사람인데, 가끔 말하기를, ‘국왕(國王)께서 나를 대접하기를 비록 심히 후(厚)하게 하시나, 의정부(議政府)가 심히 박(薄)하다.’ 하였으니, 이 말이 만일 중국에 퍼지게 되면, 듣는 사람들이 권세가 아래에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신 등이 이것으로 아뢰었사온데 윤허(允許)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대신(大臣)의 용사(用捨)를 논(論)해 말한 것이 전하의 성감(聖鑑)에 합하지 못하니, 이목(耳目)의 벼슬에 있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황엄(黃儼)은 천하(天下)의 사치한 자이고, 하 정승(河政丞)은 검소한 중에도 검소한 사람이다. 저 사람의 사치로써 하 정승의 검소한 것을 보면 박(薄)하다고 말하는 것이 괴이할 것 없다."
하니, 오승이 대답하기를,
"간신(諫臣)으로서 재상(宰相)을 논하는 것이 성상(聖上)의 뜻에 합하지 않았으니, 어찌 다시 간원(諫院)에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곧 광연루에 거둥하여 오승·정초(鄭招)와 지신사(知申事) 황희(黃喜)를 불러들이고, 다시 사관(史官) 송포(宋褒)를 앞으로 가까이 나오라 명하고 친히 이르기를,
"오늘의 일은 사람을 시켜 전(傳)해 말할 수가 없다. 황엄이 정승(政丞)더러 박(薄)하다고 하였단 말을 나도 들었다. 그러나, 지극히 사치한 것으로 지극히 검소한 것을 보면 박하다고 할 것은 뻔한 것이다. 간관(諫官)이 근일(近日)에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과 하 정승(河政丞) 등을 탄핵하여, 이미 이루어진 명령을 추후(追後)해 고쳐서 과인(寡人)으로 하여금 상국(上國)에 실신(失信)한 죄(罪)를 입게 하려고 한 사실을 물었는데, 내가 간관이 반드시 이 말이 있을 줄을 알았다. 그러나, 황제의 딸을 이강(釐降)하게 하려고 한 것이 어찌 다른 마음이 있겠는가? 대신(大臣)을 얻기가 쉽지 않으니, 내 어찌 가볍게 고쳐 바꿀 수 있겠는가? 둔전(屯田)과 연호미(煙戶米), 그리고 도읍(都邑)을 옮기고 군기(軍器)를 수선하고 전지(田地)를 고쳐 측량하는 등의 일을 사람들이 모두 정승(政丞)의 계책이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모두 내가 한 일이다. 지금 군국(軍國)의 양식(糧食)의 저축으로 인하여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둔전(屯田)은 십분(十分)의 해(害)가 없이 군량(軍糧)을 보충할 수 있고, 연호미(煙戶米)는 그 해[歲]의 풍흉(豐凶)에 따라서 거둬들여 많고 적은 차이가 있고, 흉년(凶年)이 되면 이를 흩어 주니 모두 백성들이 스스로 먹을 것이다.
그리고 환도(還都)한 것은 송도(松都)에 있으면서 여러 번 수한(水旱)의 재앙이 있었고, 내가 생각하기를 종묘(宗廟)·사직(社稷)이 모두 신도(新都)에 있으니 마땅히 옮겨야 될 것이라고 여겨, 환도(還都)한 것인데,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승(政丞)이 말하였다고 한다. 내가 전조(前朝) 말년(末年)에 밀직 제학(密直提學)으로 도당(都堂)202) 에 참여하여 앉아서 보았는데, 예빈시(禮賓寺)가 오로지 도당(都堂)을 위해 공급[供億]하여 왕관(王官)과 같지 않았고, 또 도당(都堂)에 지응고(支應庫)를 두어서 허비하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앞에서 분주(奔走)하게 사령(使令)하는 자까지도 때때로 의식(衣食)의 비용을 주었다. 지금 정승(政丞)이 일체 혁파(革罷)하고 말하기를, ‘왕부(王府)에서 역사(役事)하는 사람들도 오히려 다 입히고 먹이지 못하는 자가 있는데, 하물며, 이 도당(都堂)의 붙이들이겠는가?’ 하고, 오로지 검소하고 절약하는 것을 숭상하였으니, 근래에 상신(相臣)이 된 자로서 정승(政丞) 같은 사람이 드물다. 대신(大臣)에게 오로지 맡기는 옛날 인군(人君)의 체통이 아닌가? 좌·우 정승(左右政丞)이 식견(識見)은 비록 다르기는 하나 기(氣)는 한가지이다. 좋고 나쁜 것[休戚]을 같이하니 어찌 그 사이에 털끝만치나 의심이 있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난(亂)에 임(臨)한 임금은 그 신하(臣下)를 각각 어질[賢]게 여긴다.’ 하였는데, 내가 말하는 것이 혹 이와 같을 것이다. 지금부터 이후로는 경들은 다시 대신(大臣)을 움직이고 흔들지 말라. 임금과 신하가 서로 의지하는 것이 또한 좋지 않은가? 경들은 구차하게 간원(諫院)에 있는 것을 혐의하지 말고 힘써 대체(大體)를 보존하라."
하였다. 오승(吳陞) 등이 이에 물러갔다.
- 【태백산사고본】 5책 13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1책 399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정론(政論)
- [註 202]도당(都堂) :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고려 충렬왕(忠烈王) 5년에 변방(邊方)의 군사 문제만 의논하던 도병마사(都兵馬使)를 고친 이름인데, 이 이름으로 바뀐 뒤부터는 첨의(僉議)·밀직(密直)의 양부(兩府) 대신(大臣)이 합좌(合坐)하여 일반 정치 문제도 의논하게 되어, 최고 의정(議政) 기관으로 변모하게 되었고, 고려말에는 서무(庶務)를 집행하는 권한도 갖게 되어 명실 공히 최고 정치기관이 되기에 이르렀음.
○御廣延樓, 引見右司諫大夫吳陞、左正言鄭招。 二人詣闕啓曰: "前月二十八日, 殿下命臣等曰: ‘中外臣僚得失, 具狀以聞。’ 臣等首陳古者三公遇災避位故事。 近年以來, 水旱相仍, 正大臣引咎辭免之時也, 而河崙、趙英茂等, 貪寵不辭, 更立法制。 又使臣黃儼, 帝所寵信也。 往往曰: ‘國王待予雖甚厚, 議政府則甚薄。’ 此言若布中國, 聞者以爲權在下矣。 臣等以此啓聞, 未蒙允許。 論說大臣用捨, 未合殿下之鑑, 難以居耳目之官。" 上曰: "儼, 天下之奢者也; 河政丞, 儉乎儉者也。 以彼之奢, 見政丞之儉, 其謂之薄, 無愧。" 陞對曰: "以諫臣論宰相, 不中上意, 豈可復在諫院耶?" 上乃御樓, 召陞、招及知申事黃喜入, 復命史官宋褒近前, 親諭之曰:
今日之事, 不可使人傳語也。 黃儼之謂政丞爲薄, 予亦聞之, 然以至奢而見至儉, 其謂薄也必矣。 諫官近日劾驪興府院君及河政丞等, 問其欲追改已成之命, 使寡人得失信之罪於上國, 予固知諫官之必有是言也。 然欲釐降帝女者, 豈有他心乎? 大臣不易得, 予豈可輕有改易乎? 若屯田煙戶米遷都邑修軍器改量田等事, 人皆謂政丞之策, 其實皆予之所爲也。 今以軍國糧餉之儲, 誠不可不慮, 屯田無十分之害, 而可以補軍餉; 煙戶米則隨歲之豐凶而斂之, 有多少之差, 至於凶年則散, 皆民所自食也。 還都則在松都屢有水旱之災, 予以爲宗廟社稷, 皆在新都, 故斷然而還, 不知者謂政丞之言。 予於前朝之季, 以密直提學, 參坐都堂, 見禮賓寺專爲都堂供億, 不似王官, 又於都堂置支應庫, 糜費不可勝記, 至於奔走使令於前者, 以時給衣食之資。 今政丞一切罷之, 乃曰: "王府役使之人, 尙有未盡衣食之者。" 況此都堂之屬乎? 專尙儉約, 近來爲相, 如政丞者鮮矣。 專任大臣, 非古昔人君之體乎? 左右政丞識見雖殊, 氣則一也。 休戚所同, 豈有毫髮之疑於其間哉? 古人云: "臨亂之君, 各賢其臣。" 予之所言, 或者類此, 自今以後, 卿等勿復動搖大臣。 君臣相資, 不亦可乎? 卿等毋以苟在諫院爲嫌, 務存大體。
陞等乃退。
- 【태백산사고본】 5책 13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1책 3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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