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에게 전위한다는 명을 철회하다
비로소 왕위를 세자에게 전한다는 명령을 거두었다. 종친(宗親)·원훈(元勳)·기로(耆老)·문무 백관(文武百官)이 다시 창덕궁(昌德宮)의 뜰로 나아가고, 세자도 국새(國璽)를 받들고 이르러 전상(殿上)에 놓았다. 처음에 임금이 이숙번을 불러 비밀히 말하기를,
"밤마다 꿈에 모후(母后)를 뵈었는데, 우시면서 나에게 고하기를, ‘너는 나를 굶기려 하느냐?’고 하시니, 내 아직도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이숙번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만약 약하고 어린 세자에게 전위(傳位)하시면, 종사(宗社)가 보전되지 못하여 모후께서 굶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모후께서 정녕(丁寧) 고하시기를, ‘전위(傳位)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어찌 신인(神人)이 모두 싫어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원컨대, 세 번 더 생각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자식에게 전하는데 어찌하여 이와 같은고?"
하였다. 이숙번이 나와서 대신들에게 고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같은 말로 굳이 청하기를,
"‘지자(智者)도 천 번 생각하면 반드시 한 번은 실수가 있고, 어리석은 자도 천 번 생각하면 반드시 한 번은 좋은 수를 얻는다’고 하였으니, 신 등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다 하나, 어찌 한 번의 득[一得]을 보는 소견(所見)이 없겠습니까? 모든 사람의 말이 한결같으되, 그렇게 하자고 공모하여 일치한 것이 아니니, 전하께서 어찌하여 윤허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임금이 이숙번을 반열(班列)에서 불러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반드시 경이 내 말을 누설하였기 때문이다."
하자, 이숙번이 대답하기를,
"일이 종사(宗社)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록 신의 말이 아니더라도 진실로 굳이 청해야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 뜻이 벌써 정해졌으니 고칠 수 없다."
하고, 이숙번으로 하여금 나아가 전지(傳旨)하게 하였다. 하윤(河崙)이 아뢰기를,
"근일에 내사(內史)가 환도(還都)할 때에, 전하께서 반드시 의장(儀仗)을 갖추고 그를 맞이해야만 하는데, 국새(國璽)가 없어서는 아니됩니다."
하였다. 이숙번이 들어가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는 29일에 인소전(仁昭殿)으로 나가겠다. 생(栍)179) 을 알아본 뒤에 계책을 정하겠다."
하니, 하윤이 대답하기를,
"그날의 위의(威儀)에도 국새(國璽)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바로 이숙번에게 명하여 성석린 등에게 전지(傳旨)하게 하고, 또 겸상서 윤(兼尙瑞尹) 황희(黃喜)·소윤(少尹) 안순(安純)에게 명하여 국새를 받아 상서사(尙瑞司)에 들여놓게 하였다. 세자(世子)와 군신(群臣)이 사배(四拜)를 행하고, 천세(千歲)를 세 번 부른 다음, 또 사배(四拜)를 행하고 나왔다.
- 【태백산사고본】 4책 12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1책 374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정론(政論)
- [註 179]생(栍) : 점(占)을 치거나 강경(講經)을 하기 위하여 글귀를 적어 통에 꽂아 두는 대쪽들. 그 대쪽을 뽑아 거기에 적힌 글귀를 보고 점(占)을 치기도 하였고, 강경(講經)할 때 강생(講生)이 이 대쪽을 뽑아서 그 글귀에 따른 장(章) 또는 편(編)을 암송(暗誦)하였음. 찌.
○壬子/始寢傳位世子之命。 親勳耆老文武百官, 復詣昌德宮庭, 世子亦奉國璽而至, 置于殿上。 初, 上召李叔蕃密語之曰: "連夜夢, 母后泣涕告予曰: ‘汝欲使予飢矣。’ 予未知是何意歟?" 叔蕃對曰: "殿下若傳位於(弱初)〔弱幼〕 , 則宗社不保, 而母后飢矣。 此實母后丁寧告之以傳位之不可也, 豈非神人之同所惡也? 願加三思。" 上曰: "吾以傳子, 何若是耶?" 叔蕃出而告諸大臣。 至是同辭固請曰: "智者千慮, 必有一失; 愚者千慮, 必有一得。 臣等雖至愚, 豈無一得之見乎? 萬口同辭, 不謀而合, 殿下何以不允乎?" 上召李叔蕃於班列, 謂之曰: "今日之事, 必卿洩我語也。" 叔蕃對曰: "事關宗社, 不敢不語。 雖非臣言, 固當堅請。" 上曰: "予志已定, 不可改也。" 令叔蕃出傳旨。 河崙啓曰: "近日內史還都之日, 殿下必備儀仗而迎之, 國璽不可無也。" 叔蕃入啓, 上曰: "來二十九日, 詣仁昭殿, 知栍後定計矣。" 崙對曰: "其日威儀, 亦不可無國璽也。" 上乃命叔蕃, 傳旨于成石璘等, 又命兼尙瑞尹黃喜、少尹安純, 受國璽入置于司。 世子及群臣四拜, 三呼千歲, 又四拜而出。
- 【태백산사고본】 4책 12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1책 374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