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창군 권근이 전위의 불가함을 상서하다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이 상서(上書)하였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다.
"신이 가만히 천하(天下)의 일을 생각하건대, 일은 같으나 형세가 다른 것이 있으니, 태평(太平)하고 무사(無事)한 때를 당하면 상경(常經)을 지키고, 위태하고 변급(變急)한 때를 당하면 권도(權道)를 행하였습니다. 진실로 태평한 때를 당하여 권도(權道)를 쓰면 시중(時中)의 적의(適宜)함을 잃게 되어 도리어 화란(禍亂)이 생기게 되는 것이므로, 이것을 살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대저 천하(天下)의 국가를 가진 이가 반드시 대대로 서로 전위(傳位)하는 것은 예(禮)의 상경입니다. 무릇 제후(諸侯)가 나라를 전(傳)하는 데 반드시 천자(天子)에게 명(命)을 받는 것도 또한 예의 상경(常經)입니다. 옛날에 제후(諸侯)의 아들이 상복(喪服)을 벗은 뒤에 반드시 사복(士服) 차림으로 들어가 천자(天子)를 뵈오면, 천자(天子)가 거복(車服)173) 을 하사하였습니다. 그러한 뒤에야 작(爵)을 이어받고 돌아와서 그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주(周)나라가 쇠(衰)함에 이르러, 열국(列國)이 강성(强盛)하여 참람(僭濫)하여지니,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174) 이 첩의 사랑에 미혹되어 이어 어린 얼자(孽子)에게 전위(傳位)하고, 스스로 주부(主父)라고 칭(稱)하였는데, 뒤에 다른 아들을 왕(王)으로 분봉(分封)하려다가 마침내 화난(禍難)을 불러 일으켜 결국 아사(餓死)함에 이르매, 나라는 난(亂)으로 멸망하고 만세(萬歲)에 웃음꺼리가 되었습니다. 당(唐)나라 천보(天寶)175) 연간에서 송(宋)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혹은 위난(危難)에 핍박되거나 혹은 대점(大漸)176) 으로 인하여 내선(內禪)한 일이 있었는데, 모두 한 때의 권도(權道)에 따른 것이었고, 까닭 없이 이를 행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제후(諸侯)와 번방(藩邦)이 천자(天子)에게 명(命)을 청하지도 아니하고, 마음대로 후사(後嗣)를 세운 뒤에 천자(天子)에게 고하면, 천자(天子)는 어쩔 수 없이 윤허(允許)하였던 것은, 당(唐)나라 중기에 쇠약하여 번진(藩鎭)이 발호(跋扈)하면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지만, 그러나 발길을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모두 토벌(討伐)하여 없앴고, 여태껏 길이 보전한 나라는 있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전조(前朝) 때에 있어서 충선왕(忠宣王)이 충숙왕(忠肅王)에게 전위(傳位)하고 충숙왕이 충혜왕(忠惠王)에게 전위(傳位)한 것은 태평하고 무사한 때를 당하여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충선왕은 세조 황제(世祖皇帝)177) 의 외손자로서 원(元)나라 조정의 태위(太尉)의 작명(爵命)을 받고 황제(皇帝)의 사랑을 특별히 받아서 연경[燕都]178) 에 거주하기를 좋아하고 환국(還國)하기를 싫어하였던 까닭에, 친히 황제(皇帝)에게 상주(上奏)하여 이에 본국(本國)을 충숙왕에게 전(傳)해 주었고, 충숙왕도 또한 그 가법(家法)을 지키고자 하여, 또한 황제에게 상주(上奏)하여 충혜왕에게 왕위를 전해주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먼저 상주하여 청(請)함을 허락 받은 뒤에야 전한 것이니, 예(禮)의 상경(常經)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충선왕은 오랫동안 연경[燕都]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참소와 비방을 만나 토번(吐蕃)으로 귀양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충숙왕은 바로 충혜왕에게 전위하였지만 도리어 혐의와 틈이 생겨, 부자(父子)가 서로 송사하여 비방을 후세에 남겼습니다. 이것은 비록 먼저 아뢰고 뒤에 왕위를 전한 것이므로, 예(禮)의 상도(常道)를 얻었다고도 하겠지만, 그러나, 그 이익을 얻지도 못하고서 해단(害端)이 벌써 뒤따른 것이니, 이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므로 거울 삼을 만합니다.
위조(僞朝)의 우왕(禑王)·창왕(昌王) 때에 이르러 감히 먼저 세우고 뒤에 상주(上奏)하였으니, 상도(常道)를 잃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왕(禑王)의 교만하고 포악함이 하늘에 넘치고, 또 군대를 동원하여 요동(遼東)을 공격하는 트집이 있게 되자, 우리 태상왕께서 의(義)를 들어 회군(回軍)하시고, 중국(中國)을 떠받듦[翊戴]에 충성이 잘 나타났습니다. 황제께서 마음으로 가상하게 여긴 까닭에 그대로 두시고 묻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신(臣) 근(近)이 문하 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 등과 함께 창왕(昌王)의 명을 받들어 친히 경사(京師)에 조근(朝覲)하기를 청하였더니, 예부 상서(禮部尙書) 이원명(李元名)이 신 등을 책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국왕의 명을 받아 재상이 되었는데, 그대가 왕에게 고하지도 않고, 그대의 벼슬을 사사로이 남에게 주며, 그 사람도 왕명(王命)이 없이 사사로이 그대에게서 벼슬을 받는다면, 국왕이 그것을 죄주지 않겠는가? 그대 나라의 왕은 황제의 명을 받고 왕작(王爵)을 받았는데, 이제 주청(奏請)도 하지 않고 〈왕위를〉 사사로이 그 아들에게 줌은 무슨 예(禮)인가?’고 하기에, 신이 ‘변고(變故)와 화단(禍端)이 매우 급박하여 천조(天朝)에 아뢰지 못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회답하는 자문(咨文)에 ‘이성(異姓)을 세워 왕을 삼으니, 배신(陪臣) 중에 어질고 슬기로운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창왕 부자는 이로 말미암아 나라를 잃었는데, 이때를 당하여 우리 태상왕의 회군(回軍)의 충의(忠義)로운 공렬(功烈)이 아니었다면, 한 나라 생령(生靈)의 화단(禍端)을 어찌 이루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태상왕께서 상왕께 왕위를 전해 주실 때에는, 태상왕께서 병이 심하시었고, 또 정도전(鄭道傳)이 감히 황제의 명을 거역함이 있었으며, 또 요동을 공격하고자 하고, 어린 서얼(庶孽)을 세우려고 탐내어 총적(冢嫡)을 죽이려고 도모해서, 화변(禍變)이 급(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중국에서도 고제(高帝)가 돌아 가고 건문제(建文帝)께서 새로 등극(登極)하여, 여러가지 일에 겨를이 없었던 까닭에, 묻지 아니한 것뿐입니다. 상왕께서 전하께 왕위를 전하여 주실 때에는, 마침 중국에 연란(燕亂)이 있어서 외국과 트집을 낼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다만 회답하는 자문(咨文)에다 거듭 그 뜻을 말함으로써 그 의중(意中)을 표시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다행하여 면(免)한 것뿐이지, 만전(萬全)의 계책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중국이 당당하여 무사(無事)한 때이며, 우리 나라 또한 급급(汲汲)한 위란(危亂)의 변(變)도 없는데, 전하께서 전철(前轍)을 밟고자 하시어 먼저 〈천자의〉 명을 청하지도 아니하고 왕위를 세자에게 전해 주신 뒤에 계품(計稟)하려 하시니, 이것은 신이 여쭌 바 ‘일은 같으나 형세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난 때에는 저들과 우리들이 모두 위태로운 변(變)이 있었던 까닭에, 우리가 권도(權道)를 써서 행할 수 있었고, 저들 또한 권도를 따라서 이것을 허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로 말하면 그렇지 아니하여, 우리들에게 위급한 사변(事變)이 없으니, 진실로 상도(常道)를 지켜서 먼저 청해야만 합니다. 저들도 또한 변고(變故)가 없는 때라, 반드시 상도에 의거하여 이것을 의논할 것입니다. 저들이 상도로써 책한다면, 우리가 무슨 말로 대답하겠습니까? 이것이 일은 같으나 형세는 달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어찌 아니겠습니까? 전하의 생각에는 ‘반드시 먼저 아뢰면, 세자가 어리다는 이유로 혹 명령을 얻지 못하게 될까.’ 여기시고, 또, ‘이미 전해 주고 나서 아뢰게 되면, 벌써 왕위를 전해 주었으니 반드시 황제의 윤허를 받을 것이다.’ 여기시나, 그러나, 제명(帝命)의 윤허는 일의 적당한지 아니한지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요, 어찌 오로지 〈왕위를〉 전해 주고 전해 주지 아니한 데 있다 하겠습니까? 천자께서 아악(雅樂)을 제후(諸侯)에게 내리심은 진실로 세상에 드문 특별한 은총(恩寵)입니다. 황제께서 특별한 은총을 전하께 가(加)하시었으니, 마땅히 이것을 친행(親行)하는 고묘(告廟)의 예(禮)에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렇지 아니하시고 갑자기 작명(爵命)을 사퇴하시니, 황제의 뜻에 어떠하겠습니까?
신이 듣자오니, 근일에 사신 황엄(黃儼)이 매양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전하께서 사대(事大)하는 정성은 그전과 다름이 없으나, 집정 대신(執政大臣)이 봉행(奉行)하기를 삼가지 못한다.’하니, 반드시 이 말로써 황제에게 상달(上達)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왕위를 전하였다는 보고가 있게 되면, 황제의 마음은 더욱 황엄의 말을 옳게 여길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권신(權臣)이 국명(國命)을 잡고 마음대로 폐립(廢立)하고, 어린 임금을 끼고 중국에 항거하고자 함이 꼭 최영(崔瑩)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비록 갑자기 문죄(問罪)하는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집정 대신을 불러서 그 연유를 따져 물을 것이니, 집정 대신이 정도전과 같이 그 명령을 거부하고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흔극(釁隙)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가지 않을 수 없다면, 전하께서는 동맹(同盟)하신 원훈(元勳)들로 마음을 다해 나라를 걱정하였던 사람을 일조(一朝)에 죄없이 헤아릴 수 없는 못에 빠지게 하여, 〈그들을〉 구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집정 대신이 가게 되면 엄한 형벌로 힐문(詰問)할 것이요, 그 죄가 이루어진다면 어찌 그 자신만 죽음을 당하는데 그칠 뿐이겠습니까? 반드시 이 때문에 우리의 죄명(罪名)을 이루어서 문죄(問罪)하는 군사를 일으킬 것입니다.
병법(兵法)에 말하기를, ‘장차 취(取)하려면 반드시 잠시 동안 그에게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황제께서 아악을 전하께 내려 주셨으니, 어찌 그 뜻이 여기에 있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전하께서 한갓 충성을 다해 사대(事大)하는 정성으로 황제의 권우(眷遇)를 믿고 계시나, 황제께서 동쪽 모퉁이에 건주위(建州衛)를 설치하였으니, 이것은 우리의 인후(咽喉)를 조르고, 우리의 오른팔을 누르는 것입니다. 밖으로는 웅번(雄藩)을 세워 우리 인민(人民)을 달래고, 안으로는 남다른 은총을 더하여 우리의 방비를 늦추게 할 것이니, 그 뜻을 진실로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전하께서 급하게 서두르시어 이를 개의치 아니하시고, 읍양(揖讓)의 예(禮)를 행하여 어리고 약한 세자에게 나라를 맡기려 하시니,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통심(痛心)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고 자세히 살피시어 여기에 대처해야 하십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신의 말을 가지고 ‘절대로 필요 없을 우원(迂遠)한 말이라.’고 여기실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처음에는 반드시 ‘총적(冢嫡)의 바른 것으로서 나라의 대통(大統)을 전해 주니, 이름도 바르고 말도 순하여, 온 나라 신민들이 반드시 기뻐서 따를 것이라.’고 여기셨을 것이나, 오늘날 의논이 분분(紛紛)하여 순종하지 아니함이 이와 같은즉, 전하께서는 신민들이 순종하지 아니할 줄 헤아리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또 어찌 중국(中國)이 묻지 않는다고 기필할 수 있겠습니까?
《주역》에 말하기를, ‘일을 시작 함에 시초에서 도모하라.’ 하였습니다. 시초에서 잘 도모하지 못하면 마침내 반드시 근심이 있는 법이니, 작은 일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대사(大事)에 있어서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세자께서 비록 총적(冢嫡)이라 하더라도, 어리고 약하시어 여러 사람의 마음에 미흡(未洽)하오니 하늘의 뜻이 아직도 집중되지 않았음을 또한 알만합니다. 전하께서 나라의 형세가 염려할 만한 것은 생각치 않으시고, 하늘 뜻을 어기고 중심(衆心)을 어기면서 억지로 어리고 약한 자에게 〈나라를〉 전해 주려 하시니, 이것은 종사(宗社)를 가벼이 여기고 버리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고 자세히 살피시어 조처하시어, 국새(國璽)를 환수하시고 친히 만기(萬機)에 임하소서. 그리하여, 세자의 연기(年紀)가 장성하여 공덕(功德)이 더욱 나타나고, 민정(民情)이 즐겨 따르고, 천명(天命)이 집중되기를 기다린 연후에 먼저 조정(朝廷)에 보고하고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려 전하시면, 종사(宗社)에 심히 다행할 것이요, 국가에 심히 다행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비록 윤허하지는 않았으나, 뜻은 약간 감오(感悟)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4책 12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1책 373면
- 【분류】왕실(王室) / 역사-고사(故事) / 정론-정론(政論)
- [註 173]거복(車服) : 수레와 의복(衣服).
- [註 174]
무령왕(武靈王) : 중국 전국(戰國)시대 조(趙)나라의 왕(王). 여러 번 진(秦)과 싸웠으며, 재위(在位)는 27년간이었음.- [註 175]
천보(天寶) :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후기(後期) 시대. 곧 742∼756년간. 현종(玄宗)은 재위(在位) 44년간이었는데, 초기에 정사를 바로잡아 성당(盛唐) 시대를 이룬 때가 개원(開元) 연간이었고, 후기에 양귀비(楊貴妃)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안녹산(安祿山)의 난(亂)을 만나 나라가 어지럽게 된 시대가 천보(天寶) 연간이었음.- [註 176]
대점(大漸) : 임금이 크게 편찮음.- [註 177]
세조 황제(世祖皇帝) : 몽고(蒙古)의 제5대 칸(Khan)인 쿠빌라이(khubilai). 남송(南宋)을 쳐서 멸망시킨 후, 연경(燕京)에 도읍하여 원(元)나라를 세움. 일본·중앙 아시아 등지에 원정군(遠征軍)을 보내 대제국(大帝國)을 건설함.- [註 178]
연경[燕都] : 지금의 북경(北京).臣竊惟天下之事, 有事同而勢異者。 當治平無事之時, 則守其經, 當危亂變急之際, 則行其權。 苟當治平, 而從其權, 則失其時中之宜, 反致禍亂之生矣, 此不可以不察也。 夫有天下國家者, 必以世及相傳, 禮之經也; 凡諸侯之承國, 必受命於天子, 亦禮之經也。 古者諸侯之子除喪之後, 必以士服入見天子, 天子錫以車服, 然後得襲其爵, 而歸治其國焉。 及周之衰, 列國强僭, 趙武靈王, 惑於嬖寵, 乃傳幼孽, 自稱主父, 後欲分王它子, 遂致禍難, 終至餓死, 國以亂亡, 爲萬世笑。 自唐 天寶迄于宋季, 或迫於危難, 或因大漸, 而有內禪之擧, 皆因一時之權宜耳, 未聞無故而行之者也。 若夫侯藩不行請命, 擅自立後, 而後告于天子, 天子不得已而許之者, 自唐中衰, 藩鎭跋扈而始耳。 然不旋踵, 皆至討除, 未有能永保者也。 惟在前朝之時, 忠宣傳於忠肅, 忠肅傳於忠惠, 則當治平無事之時而行之耳。 然忠宣以世祖皇帝之外甥, 受元朝太尉之爵命, 特蒙帝眷, 樂居燕都, 不欲還國, 故親奏于帝, 乃以本國, 傳付忠肅, 忠肅亦欲守其家法, 又奏于帝而傳付忠惠。 是皆先奏得請, 而後傳之, 得禮之經者也。 然忠宣以久居燕都, 終遭讒謗, 以有吐蕃之行; 忠肅乃與忠惠反構嫌隙, 父子相訟, 貽譏後世。 是雖先奏後傳, 得禮之常, 然其利未獲而害已隨之, 此非美事, 可以鑑矣。 及至僞朝禑、昌之際, 乃敢先立而後奏, 失於常經。 然禑之驕惡滔天, 又有擧兵攻遼之隙, 而我太上王擧義回軍, 翊戴中國, 忠誠克著, 帝心嘉賞, 故置而不問。 然在其時, 臣近偕門下評理尹承順等, 奉昌之命, 請親朝覲于京師, 禮部尙書李元名責臣等曰: "爾受國王之命而爲宰相, 爾不告于王, 而以爾爵私與於人, 其人亦無王命, 而私受於爾, 則國王其不罪之乎? 爾國之王, 受帝之命, 以承王爵, 今不奏請, 私與其子, 是何禮也?" 臣以變禍甚迫, 不及聞天對之。 然其回咨, 有立異姓爲王, 陪臣無賢智者之語。 昌之父子, 由是失國。 當是之時, 非我太上回軍忠義之烈, 則一國生靈之禍, 豈可勝言也哉! 及我太上傳付上王之時, 太上疾漸, 亦有鄭道傳敢拒帝命, 又欲攻遼; 貪立幼孼, 謀戕冢嫡禍變之急故爾。 中國亦値高帝登遐, 建文新立, 庶事未遑, 故不問爾。 上王傳付殿下之時, 適中國方有燕亂, 不暇生釁於外國, 但於回咨, 反覆致意, 以示其意。 此皆幸而免耳, 非萬全之計也。 方今當中國堂堂無事之時, 我國亦無汲汲危亂之變, 殿下欲效其前轍, 不先請命, 傳付世子, 而後計稟, 是臣所謂事同而勢(畢)〔異〕 者也。 其在曩時, 彼我皆有危變, 故我得以從權, 而彼亦以從權而許之也。 今時則不然, 我無危急之變, 固當守經而先請, 彼亦無變故之際, 亦必以據(徑)〔經〕 而議之矣。 彼以經常而責之, 我以何辭對之乎? 此豈非事同而勢異, 不可不察者乎? 殿下之意必以爲先聞, 則以世子幼沖, 或不得命, 旣傳而後聞, 則業已傳之, 必蒙兪允。 然帝命之允, 在乎事之當否, 豈專在乎傳與不傳也哉? 天子以雅樂賜於諸侯, 誠稀世之異寵也。 帝以異寵加於殿下, 宜卽用之, 親行告廟之禮, 今乃不然, 遽辭爵命, 其於帝意以爲如何? 臣聞近日使臣黃儼, 每語人云: "殿下事大之誠則如舊矣, 執政大臣奉行不謹。" 必以此言聞于帝聰, 繼有遞位之報, 則帝心益以儼言爲然, 是必權臣執國命, 擅自廢立, 欲挾幼主, 以抗中國, 有如崔瑩之爲者矣。 雖不遽興問罪之師, 必召執政, 以詰其由。 執政能如鄭道傳之拒命不往乎? 然則釁隙由此而成矣。 不能不往, 則殿下使同盟元勳盡心憂國者, 一朝以無罪, 陷之不測之淵, 而莫之救也。 執政旣往, 嚴刑詰問, 織成其罪, 則豈止其身受戮而已乎? 必將以此成我罪名, 以興問罪之師矣。 兵法有曰: "將欲取之, 必姑與之。" 帝以雅樂賜之殿下, 安知其意不在於此乎? 殿下徒以盡忠事大之誠, 而恃帝之眷遇, 然帝於東隅, 置建州衛, 是扼我咽喉掣我右臂也。 外立雄藩, 以誘我人民; 內加異寵, 以懈我禦侮, 其意固難測也。 殿下旋旋不以爲意, 欲行揖讓, 以委幼弱, 擧國臣民罔不痛心。 伏惟殿下, 深思而審處之。 殿下必以臣言爲必無之迂言, 然而殿下初必以謂以冢嫡之正, 傳付大統, 名正言順, 擧國臣民, 必悅而從之矣, 今乃紛紛, 不順如此。 殿下不能料臣民之不順, 又安能必上國之不問哉? 《易》曰: "作事謀始。 始之不謀, 終必有患。" 小事尙然, 況大事乎? 世子雖是嫡冢, 以其幼弱, 群情未附, 則天意之未集, 亦可知矣。 殿下不恤國勢之可慮, 乃欲違天違衆, 强付幼弱, 是輕宗社而棄之也。 伏望殿下, 深思而審處之, 收還國璽, 親臨萬幾, 以待世子年紀旣壯, 功德益著, 民情樂附, 天命是集, 然後先報朝廷, 以竢明降而傳之, 宗社幸甚, 國家幸甚。
上雖不允, 意稍感悟。
- 【태백산사고본】 4책 12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1책 373면
- 【분류】왕실(王室) / 역사-고사(故事) / 정론-정론(政論)
- [註 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