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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12권, 태종 6년 7월 16일 계묘 1번째기사 1406년 명 영락(永樂) 4년

황엄이 불상을 가지고 오면서 끼친 민폐. 전라감사가 사직을 청하다

황엄(黃儼)·한첩목아(韓帖木兒)·양영(楊寧)·기원(奇原)나주(羅州)에서 돌아왔다. 처음에 황엄 등이 용구현(龍駒縣)으로 돌아올 때, 임금이 불편[違豫]하여 출영(出迎)하지 못하고, 이조 판서 이직(李稷)을 보내어 연고를 알렸었다. 황엄이 바라보고 정승(政丞)이 오는 것으로 여겼다가, 직(稷)을 보고서는 안색이 좋지 아니하니 직(稷)이 이것을 알고 핑계하여 말하였다.

"오늘 두 정승이 모두 가기(家忌)098) 를 만나서 달려 오지 못했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반드시 와서 맞이할 것입니다."

이문화(李文和)도 사람을 시켜 아뢰기를,

"황엄이 전하께서 교외(郊外)에 나와 맞이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심히 좋지 않은 빛이 있었습니다. 또 황엄 등은 전하께 동불(銅佛)을 맞이할 때 오배 삼고두(五拜三叩頭)하게 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노(怒)하여 말하였다.

"황엄(黃儼)이 나를 욕보임이 어찌 여기에 이르는가? 황엄탐람(貪婪)099) 하고 간험(姦險)하며, 또 불상(佛像)을 수송하는 까닭으로 사람을 때려 죽였으니 그 죄 또한 중하다. 내 이를 천자(天子)에게 상주(上奏)하고자 한다."

대언(代言)들이 모두 말하였다.

"황엄이 탐람하고 간휼함은 천하에서 다 아는 바입니다. 그가 우리 나라에 온 것은 고명(誥命)·인장(印章)·주관(珠冠)·면복(冕服)을 받들고 온 것이니, 은의(恩義)가 또한 많습니다. 지금 만일 격노(激怒)하시면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임금의 노기가 조금 풀려서, 의정부와 육조(六曹)로 하여금 친히 동불(銅佛)에 대해 절할 것인지의 가부(可否)를 의논하게 하고, 지신사 황희를 보내어 양재역(良才驛)에서 영견(迎見)하고, 병때문에 나오지 못한다고 알리게 하였다. 정승 하윤(河崙)·조영무(趙英茂)에게 명하여 한강(漢江)에서 맞이하게 하고, 백관(百官)에게 숭례문(崇禮門)밖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황엄 등이〉 관(館)100) 에 이르자, 백관이 예(禮)를 행하고자 하니, 황엄이 임금이 나오지 아니한 데 노하여 말하기를,

"지금 전하를 뵙지 못하였으니 예(禮)를 받을 수 없소."

하였다. 정부(政府)에서 대신 하마연(下馬宴)을 베풀고자 하여도 받지 아니하였다. 황엄 등은 동불상(銅佛像) 3좌(座)를 받들고 왔는데, 감실[龕] 15개를 사용하여 불상(佛像)·화광(火光)·연대(蓮臺)·좌구(坐具)를 나누어 담았고, 또 모란(牧丹)·작약(芍藥)·황규(黃葵) 등의 특수한 꽃을 감실[龕]에다 흙을 담아 심고 궤(樻)를 만들었는데, 판자(板子) 1천 장[葉], 철(鐵) 6백 근, 마(麻) 7백 근을 사용하였다. 그 불상과 화광의 감(龕)이 셋인데, 높이와 너비가 각각 7척 쯤이며, 안에는 막이로 백지(白紙) 2만 8천 장과 면화(緜花) 2백 근을 사용하였다. 짐꾼[擔夫]이 수천여 인이었는데, 매양 관사(館舍)에 이를 적마다 옛 청사(廳事)는 좁고 더럽다 하여 새 청사를 관사 왼쪽에 따로 짓게 하였는데, 몹시 굉창(宏敞)하게 하였고, 지나는 곳마다 물자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조금이라도 여의치 못하면 문득 매질하여 수령(守令)을 욕보였으니, 주(州)·현(縣)이 그 공억(供億)에 지쳤었다. 전라도 도관찰사 박은(朴訔)은 매사(每事)에 재량으로 감(減)하였으나, 충청도 도관찰사 성석인(成石因)은 한결같이 그의 뜻대로 하니, 황엄박은에게는 노(怒)하고, 성석인은 좋아하였다. 돌아오자 임금에게 말하기를,

"감사(監司)로서 전하를 저버리지 아니한 사람은 오직 박은뿐이었습니다."

하였다. 그 뒤 박은이 상서(上書)하여 말하였다.

"신(臣)은 천성이 본래 우직(愚直)하여 교묘한 말과 아첨하는 얼굴로 남을 기쁘게 하는 재주가 없습니다. 특별히 성은(聖恩)을 입어 갑자기 공명(功名)을 이루고 스스로 전하의 이목지신(耳目之臣)이라 여기어, 듣고 보는 바가 있으면 다 말씀드리지 아니함이 없어,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를 기약함이 신(臣)의 지극한 소원입니다. 지금 신이 감사(監司)가 되어 외방으로 나오니, 중요한 일[機務]이 심히 많아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제 스스로 죄과(罪過)가 심히 많은 것을 아는지라 자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번 초운(初運)의 조전선(漕轉船)에 그 수호(守護) 병선(兵船)의 수가 적은 것을 알지 못한 것이 아니나, 전례(前例)에 구애되어 정신차려 살피지 못했기 때문에, 도둑을 당하게 되었으니, 신의 죄의 첫째이고, 국가에서 박모(朴謨)·김도생(金道生) 등을 보내어 동불(銅佛)을 제주(濟州)에서 가져오게 하오매, 신은 먼저 제주 목관(濟州牧官)에 이문(移文)하여 법화사(法華寺)의 동불(銅佛) 3좌(座)를 급히 수출(輸出)해서 배로 실어 보내게 하였더니, 제주 목관에서는 신의 이문(移文)을 보고, 즉시 이졸(吏卒)들을 동원하여 그 동불을 운반하여 바닷가에 막 도달할 무렵, 그 이튿날 박모(朴謨) 등이 잇달아 이르렀습니다. 마침 쾌풍(快風)이 불므로, 즉시 안동하여 싣고 나와서 겨우 해안에 이르렀는데, 바람과 물이 순탄치 못하기를 수순(數旬) 동안이나 하였습니다. 대체로 부처의 일로써 위임을 맡고 온 사람이 있으나, 신은 일신(一身)의 이해(利害)를 돌보지 않고 먼저 뱃사람을 보내어 부처를 실어 오게 하고, 황 태감(黃太監) 등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가지 못하게 하여 나주(羅州)에서 40여 일 동안 묵게 하며, 부처를 실을 자재와 기구를 크게 만들게 해서 한 경내[一境]가 그 해독을 받게 하였으니, 이것이 신의 죄의 둘째입니다.

처음에 황 태감(黃太監) 등이 서울로 떠나매, 경기(京畿)·충청(忠淸) 두도의 감사(監司)가 영접할 때 크게 나례(儺禮)를 갖추고, 기악(妓樂)과 유밀과상(油蜜果床)이 지극히 번화해도 폐단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신이 이 소식을 듣고, 그들이 옳지 못한 전례(前例)를 만드는 것을 분하게 여기어, 즉시 도체찰사(都體察使)101) 박석명(朴錫命)에게 글을 보내, 모든 영접(迎接)하는 일은 그 도(道)의 예(例)에서 수등(數等)을 감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도(道)의 예(例)에 이끌려서 완산부(完山府)에서는 나례(儺禮)와 과상(果床)을 차려 놓았으니, 이것이 신의 죄의 세째입니다.

황 태감(黃太監) 등이 만드는 부처를 운반할 자재와 기구가 매우 번거롭고 무거워, 백성에게 해(害)가 되는데, 이를 금지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꽃함[花函] 10여 구(具)를 만들어 잡꽃을 심어 가지고 서울로 돌아가려고 할 때, 신은 곧 황 태감을 보고 말하기를 ‘내 감사(監司)로서 왕지(王旨)를 받들지 아니하고 감히 이 함(函)들을 실어 보낼 수 없습니다.’ 하니, 황공(黃公)이 대답하기를, ‘세 부처 앞에 3구(具)씩 놓아 가지고 돌아가려 하니, 그대는 속히 전하께 계문(啓聞)해서 만들도록 하고, 혹시라도 지체하여 나의 노여움을 사지 마시오.’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신은 즉시 도당(都堂)에 보고하였는데, 도당에서는 신으로 하여금 잘 핑계하여 실어 보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국가의 대체(大體)를 중히 생각하여 끝까지 금하지 못하고, 승도(僧徒)들로 하여금 그 꽃함을 운반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신의 죄의 네째입니다.

전하께서는 신(臣)이 직임을 감당하지 못하여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물을 허비하였다는 죄로써 다스리시어, 한 도의 피로한 백성들의 소망을 위로하여 주시면, 부월(鈇鉞)의 벌(罰)이라 하더라도 원망이나 후회가 없겠습니다. 만일 전하께서 신의 지정(至情)을 살피시고, 신의 다른 마음이 없었음을 불쌍히 여기시어, 신의 어쩔 수 없었음을 용서하여서 〈신을〉 폐(廢)해 서인(庶人)으로 삼아 여생을 보전케 하시면, 이보다 더 큰 다행은 없겠습니다. 비록 대체(大體)를 살피지 않고 개연(慨然)히 고론(高論)하는 자가 있어 신을 논함이 있다 하더라도, 신은 또한 두렵지 않습니다. 오직 전하의 명을 기다릴 따름입니다."


  • 【태백산사고본】 4책 12권 2장 A면【국편영인본】 1책 363면
  • 【분류】
    외교-명(明) / 인사-임면(任免)

  • [註 098]
    가기(家忌) : 집안 조상의 기제(忌祭).
  • [註 099]
    탐람(貪婪) : 욕심이 많음.
  • [註 100]
    관(館) : 태평관.
  • [註 101]
    도체찰사(都體察使) : 조선조 때 나라의 중대한 일이 있을 때 의정(議政)의 자급(資級)에서 뽑아 임명하던 임시 군직(軍職). 일을 결단할 수 있는 전권을 위임 받음.

○癸卯/黃儼韓帖木兒楊寧奇原至自羅州。 初, 等還至龍駒縣, 上違豫未能出迎, 遣吏曹判書李稷告之, 故望見, 以爲政丞來, 及見, 色有不豫。 知之, 諉曰: "今日兩政丞, 皆値家忌, 未能趨造, 明朝當來迎矣。" 李文和亦使人啓曰: "聞殿下不郊迎, 殊有不豫色。 且等欲殿下迎銅佛, 五拜三叩頭。" 上怒曰: "黃儼何辱我至此! 貪婪姦險, 且以輸佛像之故, 毆殺人命, 其罪亦重。 予欲以此奏于天子。" 代言等皆曰: "之貪譎, 天下所共知也, 至於我國, 則奉誥命印章珠冠冕服而來, 恩義亦多。 今若激怒, 無乃不可?" 上怒稍解, 令議政府、六曹, 僉議親拜銅佛可否, 遣知申事黃喜, 迎見于良才驛。 以病未能出告, 命政丞河崙趙英茂, 迎于漢江, 百官迎于崇禮門外。 及至館, 百官欲行禮, 怒上之不出, 乃曰: "今未見殿下, 不敢受禮。" 政府欲代設下馬宴, 亦不受。 等奉銅佛像三座來, 用龕十五, 分盛佛像, 火光蓮臺坐具, 且將牧丹芍藥黃葵等異花, 盛土於龕而種之。 作櫃用板千葉鐵六百斤麻七百斤。 其佛像火光之龕三, 崇廣各七尺許, 內用隔白紙二萬八千張、緜花二百斤, 擔夫數千餘人。 每至館舍, 以舊廳事隘陋, 令別構新廳於館左, 極其宏敞; 所過要索物貨, 無所不至, 小不如意, 輒鞭辱守令, 州縣疲於供億。 全羅道都觀察使朴訔, 每事裁減, 忠淸道都觀察使(成石珚)〔成石因〕 , 一如其意, 而喜石因。 及還, 爲上言: "監司之不負殿下者, 惟朴訔耳。" 其後上書曰:

臣性本愚戇, 無巧令悅人之才, 特蒙聖恩, 驟致功名, 自許爲殿下耳目之臣, 有所聞見, 無不盡言, 期報萬一, 此臣之至願也。 今臣出爲監司, 機務甚煩, 罔知所措, 自知罪過甚多, 不可以不首也。 向者, 非不知初運漕轉船守護兵船之數少也, 而拘於前例, 失其覺察, 致有盜患, 臣罪一也。 國家遣朴謨金道生等, 取銅佛於濟州, 臣卽先移文濟州牧官, 法華寺銅佛三坐, 作急輸出, 載船送來。 濟州官見臣移文, 卽發吏卒, 輸其銅佛, 將至海濱。 翌日, 朴謨等繼至, 會有快風, 卽得押載出來, 纔到岸, 風水不順, 幾乎數旬。 蓋取佛之事, 自有委來者, 而臣不顧一身利害, 先遣舟人, 俾輸佛, 而使黃太監等, 不得渡海, 留于羅州四十餘日, 大作輸佛資具, 一境受其毒, 臣罪二也。 初, 太監等發京, 而京畿忠淸兩道監司, 於迎接之際, 大備儺禮, 妓樂油蜜果床, 極其繁華, 不以爲弊。 臣聞之, 憤其作俑於前, 卽通書於都體察使朴錫命, 凡迎接事件, 減於彼道之例數等爲之。 然牽於彼道例, 只於完山府, 設儺禮果床, 臣罪三也。 黃太監等所造輸佛資具, 甚煩且重, 有害於民, 而不能禁止。 又欲造花函十數具, 栽植雜花, 持以歸京, 臣卽對太監言: "吾爲監司, 非奉王旨, 不敢轉輸此函。" 公答言: "欲於三佛前, 各以花函三具, 供給行歸, 汝可速啓殿下, 毋或留滯, 以激吾怒。" 臣卽具報都堂, 都堂令臣托辭不輸。 臣重念國家大體, 終不固禁, 乃以僧徒, 輸其花函, 臣罪四也。 願殿下治臣以不勝職任, 勞民傷財之罪, 以慰一方疲民之望, 則鈇鉞之誅, 無復怨悔矣。 儻蒙殿下察臣至情, 憐臣無他, 恕臣不得已, 廢爲庶人, 俾保餘生, 幸孰大焉? 雖有不察大體, 慨然高論者, 有以論臣, 臣亦不懼也, 惟殿下之命是竢耳。


  • 【태백산사고본】 4책 12권 2장 A면【국편영인본】 1책 363면
  • 【분류】
    외교-명(明) / 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