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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11권, 태종 6년 5월 27일 병진 1번째기사 1406년 명 영락(永樂) 4년

인소전의 터를 창덕궁 북쪽에 잡는 것에 대해 논의하다

명하여 인소전(仁昭殿)076) 을 개기(開基)하였다. 임금이 장차 인소전(仁昭殿)창덕궁(昌德宮) 북쪽에 다시 지으려고, 북문(北門)을 나가서 서운관(書雲觀)에 명하여 터를 잡게 하니, 유한우(劉旱雨)가 아뢰기를,

"창덕궁(昌德宮) 주산(主山)의 기운이 이 땅에 모였는데, 만약 땅을 파서 집을 지으면 반드시 궁궐에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직(李稷)을 불러 의논하니, 이직이 말하기를,

"주산(主山)의 맥(脈)이 아니고 따로 궁륭(穹窿)의 모양으로 나와서, 남향의 형세를 이룬 것입니다. 전하가 만약 가까운 땅을 골라서 진전(眞殿)을 지으려면 이곳보다 나은 데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기뻐하여 곧 개기(開基)하도록 하고, 해온정(解慍亭)에 돌아와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이직 이하 여러 대언(代言)들이 차례로 술잔을 올렸다. 이직이 조용히 말하기를,

"조종(祖宗)의 법을 가볍게 고칠 수 없습니다. 가볍게 고치면 인심이 가볍게 변하고 나라의 힘이 굳건해지지 못하니,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임오년 동북면(東北面)의 변란(變亂)에 대해 말이 미치자,

"내가 그때에 대개 간당(奸黨)을 물리치고 태상왕(太上王)을 봉영(奉迎)하고자 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마음은 끝내 평안치 못하였는데, 지금 이러한 한기(旱氣)는 바로 하늘이 나를 견책(譴責)하는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것은 비록 영전(令典)이 아닐지라도 공구 수성(恐懼修省)하는 뜻을 보이고자 함이니, 마땅히 중외(中外)로 하여금 정하게 제사를 마련하도록 힘쓰게 해야 한다."

하고, 또 옥관(獄官)에게 명하여 죄수(罪囚)를 속결(速決)하게 하였다. 이튿날 임금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내가 본디 유한우(劉旱雨)의 말을 의심하였는데, 이제 이 땅을 보니, 참으로 주산(主山)의 맥(脈)이 아니구나. 또 궁궐과 가까우니, 내가 아침 저녁으로 봉사(奉祀)하기를 평시(平時)와 같이 하고자 한다."

하고, 잇따라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는 진전(眞殿)만 세워두고자 하였는데, 김첨(金瞻)이 말하기를, ‘불당(佛堂)이 있어야 마땅하다.’ 하니, 아울러 짓게 하는 것이 가하다."

하니, 지신사(知申事) 황희(黃喜)가 말하기를,

"불당 하나를 짓는 것이 비록 폐가 없다고 하시지만, 다만 후세에 법을 남기는 것이면 옳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부처의 도(道)는 허실(虛實)을 알기가 어렵다. 예전에 권중화(權仲和)가 말하기를, ‘오도자(吳道子)077) 가 그린 관음상(觀音像)에 광채가 났었다.’고 하였는데, 내가 듣고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하니, 황희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오도자가 비술(秘術)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어찌 부처가 신령하고 기의한 때문이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옛 제왕(帝王)의 우열(優劣)을 논평하기를,

"한(漢) 고조(高祖)는 너그럽고 어질며 호탕(豪宕)한 기질이 있었고, 문제(文帝)는 온화(溫和)하고 삼가고 무거워서 진실로 태평 시대의 인주(人主)였고, 명제(明帝)는 성품이 가볍고 조급하여, 일찍이 대단히 노한 것으로 인하여 손수 사람을 때렸고, 광무제(光武帝)는 진실로 본받을 만하나, 혹은 가소(可笑)로운 말도 있었다."

하니, 좌우에서 말하기를,

"송(宋) 태조(太祖)도 어진 군주(君主)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그러나, 그 간에 지나친 일도 있었다."

하였다. 임금이 지리(地理)를 의논하여 말하기를,

"동북면(東北面)은 우리 조상의 산릉(山陵)이 있는데, 그 산맥(山脈)의 지리(地理)가 보통 땅과는 아주 다르다."

하니, 좌우에서 말하기를,

"진실로 성상의 말씀과 같습니다."

하였다. 황희가 말하기를,

"유한우가 옛날에 사감(私憾)으로 인하여 전시(田時)를 태상왕에게 고하여 여러 장상(將相)과 신 등이 모두 옥에 갇히고 죄를 얻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나도 일찍이 그러한 말을 들었으나, 그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유한우는 그 얼굴을 보면, 참으로 으늑하고 궤휼(詭譎)하니, 반드시 비술(秘術)이 있는 자일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4책 11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1책 359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건설-건축(建築) / 사상-불교(佛敎)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歷史)

  • [註 076]
    인소전(仁昭殿) :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비(妃) 신의 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를 모신 혼전(魂殿). 태종 8년(1408)에 태조가 승하하자, 이름을 문소전(文昭殿)이라 고치고 태조와 신의 왕후를 같이 모심.
  • [註 077]
    오도자(吳道子) : 중국 당(唐)의 화가 오도현(吳道玄)의 자(字). 당 현종(唐玄宗) 때 사람으로 당대(唐代) 제일의 화가였으며, 특히 불화(佛畫)에 뛰어났음.

○丙辰/命開仁昭殿基。 上將改營仁昭殿昌德宮北, 出北門命書雲觀卜地。 劉旱雨啓: "昌德宮主山之氣, 畜於此地, 若堀而營室, 必不利於宮闕。" 上召李稷議之, 曰: "非主山之脈, 乃別出穹窿, 爲南面勢也。 殿下若擇近地營眞殿, 則無踰此地矣。" 上悅, 卽令開基, 還解慍亭置酒, 以下諸代言以次進爵。 從容言曰: "祖宗之法, 不可輕改。 輕改則人心輕變, 輕變則國勢不固矣, 不可不謹也。" 上曰: "卿言是也。" 語及壬午東北之變曰: "予於其時, 蓋欲黜退奸黨, 奉迎太上也, 然於心終不安。 今玆旱氣, 乃天所以譴我也。" 上又曰: "祈雨雖非令典, 欲示恐懼修省之意也。 宜令中外, 務要精究設祭。" 又命獄官速決罪囚。 明日, 上謂左右曰: "予固疑旱雨之言, 今觀此地, 實非主山之脈也。 且近於宮闕, 予欲朝夕奉祀如平時也。" 因曰: "予初欲只置眞殿, 金瞻言宜有佛堂, 可令幷營。" 知申事黃喜曰: "營一佛堂, 雖曰無弊, 但垂法後世則未可也。" 上曰: "佛氏之道, 虛實難知也。 昔權仲和言: ‘吳道子所畫觀音像放光。’ 予聞而甚異之。" 曰: "然則想道子有秘術而然, 豈佛氏之靈異也?" 上論古昔帝王優劣曰: " 高祖寬仁有豪宕之氣, 文帝溫和謹重, 誠太平之主也。 明帝稟性輕躁, 嘗因盛怒, 手自擊人; 光武實可取法, 然或有可笑之言也。" 左右曰: " 太祖亦賢君也。" 上曰: "然。 然其間有過中之事也。" 上論地理曰: "東北面, 予之祖先山陵。 其山脈地理, 殊異於常地。" 左右曰: "誠如上敎。" 黃喜曰: "劉旱雨昔因私憾, 愬田時於太上王, 諸將相及臣等, 皆下獄得罪。" 上曰: "予嘗聞此而不知其詳, 然旱雨觀其面則眞幽譎, 必有秘術者也。"


  • 【태백산사고본】 4책 11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1책 359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건설-건축(建築) / 사상-불교(佛敎)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歷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