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 내사가 칙서와 자문을 가지고 오다. 도망자 송환 등을 요구
명나라 내사(內使) 황엄(黃儼)·양영(楊寧)·한첩목아(韓帖木兒)·상보사 상보(尙寶司尙寶) 기원(奇原) 등이 이르니, 산붕(山棚)을 맺고 나례(儺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시복(時服) 차림으로 백관을 거느리고 반송정(盤松亭)에 나가서 백희(百戲)를 베풀고 맞이하여 경복궁에 이르렀다. 칙서(勅書)는 이러하였다.
"짐(朕)이 선황고(先皇考)050) ·황비(皇妣)051) 의 은덕을 거듭 생각하여 천양(薦揚)하는 제전(祭典)을 거행하고자 하여, 특별히 사례감 태감(司禮監太監) 황엄 등을 보내어 그대 나라와 탐라(耽羅)에 가서 동불상(銅佛像) 몇 좌(座)를 구하게 하니, 잘 도와 성사시켜 짐(朕)의 뜻에 부응(副應)하도록 하라."
황엄 등이 또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왔는데, 한 통[件]은 이러하였다.
"좌군 도독부(左軍都督府)의 조회(照會)를 받아 의준하건대, 당해 보정후(保定侯) 맹선(孟善)의 자문에, ‘혁제 연간(革除年間)052) 의 만산 토인(漫散土人)은, 흠차(欽差) 천호(千戶) 왕득명(王得名) 등이 조선에 가서 초무(招撫)하여 회환(回還)시켜 직업을 회복한 자를 제외하고, 전자수(全者遂) 등 4천 9백 40구(口)가 그대로 본국에 있는데, 풍해도(豊海道) 등지에서 숨어 삽니다.’ 하니, 뒤이어 본국에서 김봉(金奉) 등 19명을 회환(回還)시킨 외에는 그 나머지 사람은 아직 보내 오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또 토관(土官) 천호 고욱(高勖) 등의 관하(官下) 가속(家屬)으로 해서(海西) 등 14명이 조선으로 도망해 갔는데, 조회(照會)가 본부(本府)에 이르렀으므로 합하여 자문(咨文)하니, 본국에서는 재촉해 모아서, 번거롭지만 급히 서둘러 보내 본업(本業)을 회복하도록 시행하여 주소서."
다른 한 통은 이러하였다.
"당해 건주위 지휘(建州衛指揮)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가 주달(奏達)하기를, ‘그 친속(親屬) 완자(完者) 등 11명과 아울러 가속(家屬)이 현재 조선에 있다.’고 하였는데, 본부(本府)에서 성지(聖旨)를 받들기를, ‘너희 예부(禮部)에서 행문(行文)하여 글을 국왕(國王)에게 보내어 알려서 저들에게 주어 완취(完聚)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칙서(勅書)에 절하기를 마치고 전(殿)에 올라가 사신에게 연회하고 안마(鞍馬)를 주었다. 황엄 등은 태평관(太平館)으로 돌아가고, 임금은 창덕궁(昌德宮)으로 돌아왔다. 처음에 선위사(宣慰使) 박석명(朴錫命)이 먼저 이르러서 아뢰었다.
"신(臣)이 황엄을 보니, 황엄이 말하기를, ‘그대는 전하가 친히 믿는 신하이다. 이제 그대를 보내어 나를 맞이하니, 이것이 나를 기쁘게 하오. 나도 황제가 친히 믿는 신하이오. 이제 나를 그대 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었으니, 또한 전하를 무겁게 여기는 까닭이요.’ 하였습니다."
황엄이 벽제역(碧蹄驛)에 이르니, 임금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묻기를,
"우리 나라에서 대인(大人)이 받들고 오는 것이 조서(詔書)인지 칙서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황명(皇命)을 맞이하는 예(禮)를 이제까지 정하지 못하였다."
하니, 황엄이 말하기를,
"칙서(勅書)입니다. 국왕이 있는 곳에 이르러 개독(開讀)할 때까지 기다리십시요."
하였다. 예관이 말하기를,
"그러면, 시복(時服) 차림으로 맞이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황엄이 말하기를,
"공복(公服)을 착용함이 마땅합니다."
하므로, 좌정승 하윤(河崙)이 황엄에게 이르기를,
"우리 나라에서 중국 조정의 예제(禮制)를 준용(遵用)하는데, 조서(詔書)를 맞이하는 외에는 공복을 감히 착용하지 못합니다."
하니, 황엄이 매우 노하였다. 임금이 다시 예관(禮官)을 보내어 그 가부(可否)를 묻고자 하여, 급히 입직(入直)한 예조의 낭관(郞官)을 불렀다. 밤이 이미 깊어서 여러 번 독촉하였으나, 정랑(正郞) 유영(柳穎)이 병으로 즉시 나아가지 못하니, 임금이 곧 유영을 순금사(巡禁司)에 가두도록 명하고, 다시 좌랑 권선(權繕)으로 하여금 《홍무예제(洪武禮制)》를 가지고 벽제역에 달려 가서 질문하게 하니, 황엄이 그제서야 말하기를,
"그렇다면, 시복 차림으로 맞이함이 가하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11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1책 354면
- 【분류】외교-명(明)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 [註 050]
○己卯/朝廷內使黃儼ㆍ楊寧ㆍ韓帖木兒、尙寶司尙寶奇原等至, 結山棚儺禮, 上以時服, 率百官出盤松亭, 陳百戲, 迎至景福宮。 勑曰:
朕重惟先皇考皇妣恩德, 欲擧薦揚之典, 特遣司禮監太監黃儼等, 往爾國及耽羅, 求銅佛像數座, 尙相成之, 以副朕意。
儼等又齎禮部咨來一件:
承準左軍都督府照會: "該保定侯 孟善咨, 革除年間漫散土人, 除欽差千戶王得名等, 往朝鮮招回復業外, 有全者遂等四千九百四十口, 仍在本國豐海等道藏住; 續該本國將金奉等一十九名回還外, 其餘不見送到。 又有土官千戶高勗等下家小海西等十四名, 逃往朝鮮。" 照會到部。 合咨本國催聚, 煩爲作急發來, 復業施行。 一件, 該建州衛指揮猛哥帖木兒奏, 有親屬完者等一十一名幷家小, 見在朝鮮, 本部奉聖旨: "恁禮部行文書與國王知道, 給與他完聚。"
上拜勑訖, 升殿宴使臣, 贈鞍馬。 儼等往太平館, 上還昌德宮。 初, 宣慰使朴錫命先至, 啓曰: "臣見儼, 儼曰: ‘子, 殿下所親信也。 今遣子迎我, 是喜我也。 我亦皇帝所親信也。 今使我於子國, 亦所以重殿下也。’" 儼至碧蹄驛, 上遣禮官問曰: "我國未知大人齎捧是詔與勑, 故迎命之禮, 至今未定。" 儼曰: "勑書也。 待至國王處開讀耳。" 禮官曰: "然則當以時服迎之。" 儼曰: "宜用公服。" 左政丞河崙謂儼曰: "我國欽遵朝廷禮制, 迎詔之外, 不敢用公服。" 儼怒甚。 上欲更遣禮官, 問其可否, 趣召入直禮曹郞, 夜已深, 屢督之。 正郞柳穎以病未卽進, 上卽命囚穎于巡禁司, 更使佐郞權繕, 齎《洪武禮制》, 馳至碧蹄驛質問, 儼乃曰: "然則可以時服迎。"
- 【태백산사고본】 4책 11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1책 354면
- 【분류】외교-명(明)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