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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8권, 태종 4년 12월 5일 임신 1번째기사 1404년 명 영락(永樂) 2년

검교 정당 문학 조운흘의 졸기

검교 정당 문학(檢校政堂文學) 조운흘(趙云仡)이 졸(卒)하였다. 조운흘은 호(號)가 석간(石磵)이었는데, 뜻을 세우는 것이 기걸(奇傑)하여 옛스럽고, 호탕(豪宕)함이 남보다 뛰어나고, 지레 뜻을 곧이 곧대로 행하여 시속(時俗)에 따라 굽어보거나 쳐다봄을 즐기지 않았다. 신축년에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구적(寇賊)을 피하여 남쪽으로 순행(巡行)할 때 조정의 신하들이 많이 도망하여 숨어 구차하게 삶을 구하였으나, 조운흘은 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으로 호종(扈從)하였다. 사건이 평정되자, 녹공이 3등으로 되었다. 세상 이속에 아무 욕심이 없고 초연(超然)하게 세상 밖의 일에만 생각이 있었다. 홍무(洪武) 갑인년 봄에 전법 총랑(典法摠郞)으로서 관직을 버리고 물러가 상주(尙州)노음산(露陰山) 아래에 살면서 일부러 미치고 스스로 어두운 척 하였고,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소를 탔는데, 기우찬(騎牛讚)·석간가(石磵歌)를 지어 그 뜻을 보이었다. 정사년에 기용되어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에 제배되었고, 다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옮겼지만, 그가 좋아한 바는 아니었다.

신유년에 물러가 광주(廣州)원강촌(垣江村)에 살면서 자은승(慈恩僧) 종림(宗林)과 더불어 세속을 떠나 교제하여, 판교원(板橋院)사평원(沙平院)의 양 사원을 중창(重創)하여 스스로 원주(院主)라고 칭하였는데, 해진 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서 역도(役徒)와 더불어 그 노고를 같이하니, 지나가는 자가 그가 달관(達官)인지 알지 못하였다. 무진년에 기용되어 밀직 제학(密直提學)이 되었으나, 그때 조정에서 의논하여, 각도에 안렴사(按廉使)가 직질(職秩)이 낮아 직사(職事)를 능히 거행할 수가 없다고 하여, 양부(兩府)에서 위엄과 덕망이 있는 자를 골라 도관찰 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삼아 교서(敎書)와 부월(斧鉞)134) 을 주어 보냈는데, 조운흘서해도(西海道)의 도관찰 출척사가 되어 기강을 진작시키고, 호강(豪强)한 이를 억누르고 약한 이를 도와서, 법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털끝만치도 용서하지 아니하니, 부내(部內)가 다스려졌다. 소환되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제배되었다.

임신년 가을에 태상왕(太上王)이 즉위하여 강릉 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를 제수하였는데, 은혜와 사랑이 있어 부(府)의 사람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게 되었다. 계유년 가을에 병으로 사임하니, 검교 정당 문학(檢校政堂文學)에 제배되었다. 조운흘은 물러가 광주(廣州)의 별서(別墅)에 거처하였는데, 당시 검교(檢校)의 예로 녹봉을 받게 되었으나, 조운흘은 사양하고 받지 아니하였다. 정승 조준(趙浚)조운흘과 더불어 교유가 있었는데, 손님을 전송하는 일로 인하여 한강(漢江)을 건넜다가 동렬(同列) 재상과 더불어 기악(妓樂)을 거느리고 주찬(酒饌)을 싸 가지고 가서 찾으니, 조운흘치의(緇衣)135) 에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 문(門)까지 나와 길게 읍(揖)하고 맞이하여 모정(茅亭)에 이르러 좌정(坐定)하였다. 조준이 풍악을 잡히고 술자리를 마련하니, 조운흘은 짐짓 귀가 먹어 듣지 못하는 척하고, 눈을 감고 정좌(正坐)하여 높은 소리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창(唱)한 것이 두 번이었는데, 옆에 마치 아무도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니, 조준이 사과하여 말하기를,

"선생이 이를 싫어하는군요."

하고, 명하여 풍악을 중지시키고, 차(茶)를 마시고 돌아갔다. 그가 세속을 희롱하고 스스로 고고하기가 이와 같았다. 병이 들자, 스스로 묘지(墓誌)를 짓고, 아무 거리낌 없이 앉은 채로 죽었다. 그 묘지는 이러하였다.

"자헌 대부(資憲大夫) 정당 문학(政堂文學) 조운흘(趙云仡)풍양현(豐壤縣) 사람이니, 고려태조(太祖)의 신하 평장사(平章事) 조맹(趙孟)의 30대 손이다. 공민왕 대에 흥안군(興安君) 이인복(李仁復)의 문하로서 등과(登科)하여 두루 중외(中外)의 벼슬을 지냈으니, 다섯 주(州)의 수령이 되고, 네 도(道)의 관찰사가 되어, 비록 크게 드러난 자취도 없었으나 또한 더러운 이름도 없었다. 나이 73세에 병으로 광주(廣州)원성(垣城)에서 종명(終命)하니, 후손이 없다. 일월(日月)로써 상여(喪輿)의 구슬을 삼고, 청풍(淸風)과 명월(明月)로써 전(奠)을 삼아, 옛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 남쪽 마하야(摩訶耶)136) 에 장사지낸다. 공자(孔子)행단(杏壇)137) 위이요, 석가(釋迦)는 사라 쌍수(沙羅雙樹)138) 아래였으니, 고금의 성현(聖賢)이 어찌 독존(獨存)하는 자가 있으리오! 아아! 인생사(人生事)가 끝났도다."


  • 【태백산사고본】 3책 8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1책 316면
  • 【분류】
    인물(人物) / 어문학-문학(文學)

  • [註 134]
    부월(斧鉞) :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큰 도끼와 작은 도끼.
  • [註 135]
    치의(緇衣) : 검은 옷. 승복(僧服).
  • [註 136]
    마하야(摩訶耶) : 마하(摩訶:Maha)는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하는 대(大)·다(多)·승(勝)의 삼의(三義)이고, 야(耶:ya)는 불타(佛陀) 제자(弟子)의 일문(一門)을 말함. 곧 불타(佛陀)의 가르침을 따르는 승려들이 있는 곳.
  • [註 137]
    행단(杏壇) : 옛날 공자(孔子)가 사수(泗洙)에서 그 제자(弟子)들을 가르치던 유지(遺趾). 공자(孔子)는 행단(杏壇) 위에서 강(講)하였다고 함.
  • [註 138]
    사라 쌍수(沙羅雙樹) : 석가모니가 인도의 구시나갈라성(拘尸那揭羅城) 밖 발제하(跋堤河)가에 있는 사라수(沙羅樹:Sala)의 수풀 속에서 입적(入寂)할 때, 그 주위 사방에 각각 한 쌍씩 서 있었던 있었던 사라수(沙羅樹). 하나의 뿌리에서 두 개의 줄기가 나와서 한 쌍을 이루었다고 함.

○壬申/檢校政堂趙云仡卒。 云仡石磵。 立志奇古, 跌宕瑰偉, (經)〔徑〕 情直行, 不肯隨時俯仰。 至正辛丑, 高麗 恭愍王避寇南巡, 朝臣多竄匿苟活, 云仡以刑部員外郞從之。 事平, 錄功爲三等, 恬於勢利, 超然有世外之想。 洪武甲寅春, 以典法摠郞棄官, 退居尙州 露陰山下, 佯狂自晦, 出入必騎牛, 著《騎牛讃》《石磵歌》以見意。 丁巳, 起拜左司議大夫, 再轉判典校寺事, 非其好也。 辛酉, 退居廣州 古垣江村, 與慈恩宗林爲方外交。 重創板橋沙平兩院, 自稱院主, 敝衣草屨, 與役徒同其勞, 過者不知其爲達官也。 戊辰, 起爲密直提學。 時, 朝議以各道按廉使秩卑, 不能擧職, 選兩府有威望者, 爲都觀察黜陟使, 授敎書鉞斧遣之。 云仡西海道, 頓綱振紀, 抑强扶弱, 有犯法者, 毫髮不貸, 部內以治。 召拜簽書密直司事。 壬申秋, 太上卽位, 除江陵大都護府使, 有惠愛, 府人爲立生祠。 癸酉秋, 以病辭, 拜檢校政堂文學。 云仡退居廣州別墅, 時檢校例受祿, 云仡辭不受。 政丞趙浚云仡有舊, 因送客過漢江, 與同列宰相, 率妓樂齎酒饌, 往訪之, 云仡緇衣箬笠, 扶杖出門長揖, 迎至茅亭。 坐定, 張樂置酒, 云仡佯聾不聞, 閉目危坐, 高聲唱南無阿彌陀佛者再, 傍若無人。 謝曰: "先生厭是矣。" 命止樂, 啜茶而還。 其玩世自高類此。 及病, 自作墓誌, 翛然坐化。 其誌曰:

資憲政堂文學趙云仡, 豐壤縣人, 高麗 王太祖臣平章事趙孟三十代孫。 恭愍王興安君 李仁復門下, 登科, 歷仕中外, 佩印五州, 觀風四道。 雖大無聲跡, 亦無塵陋。 年七十三, 病終廣州 古垣城。 無後。 以日月爲珠璣, 以淸風明月爲奠, 而葬于古楊州 峨嵯山摩訶耶 孔子杏壇上、釋迦雙樹下。 古今聖賢, 豈有獨存者! 咄咄人生事畢。


  • 【태백산사고본】 3책 8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1책 316면
  • 【분류】
    인물(人物)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