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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8권, 태종 4년 10월 4일 임신 1번째기사 1404년 명 영락(永樂) 2년

한양과 무악 중에 어느 곳을 도읍으로 정할 만한 것인지를 논의하다

어가(御駕)가 무악(毋岳)에 이르니, 임금이 중봉(中峯)에 올라 사람을 시켜 백기(白旗)를 한수(漢水) 가에 세우게 하고, 사방을 바라보고 말하기를,

"여기가 도읍(都邑)하기에 합당한 땅이다.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096) 이 말한 곳이 백기(白旗)의 북쪽이라면, 가히 도읍이 들어앉을 만하다."

하고, 산을 내려오다가 대신(大臣)·대간(臺諫)·형조와 지리(地理)를 아는 자인 윤신달(尹莘達)·민중리(閔中理)·유한우(劉旱雨)·이양달(李陽達)·이양(李良) 등을 모아 명당(明堂)을 찾았다. 임금이 윤신달 등에게 이르기를,

"거리낄 것 없이 각기 자기 말을 다하도록 하라. 이 땅과 한양(漢陽)이 어느 것이 좋은가?"

하니, 윤신달이 대답하기를,

"지리로 논한다면, 한양(漢陽)의 전후에 석산(石山)이 험(險)한데도 명당(明堂)에 물이 끊어지니, 도읍할 수 없습니다. 이 땅은, 참서(讖書)로 고찰한다면, 왕씨(王氏)의 5백 년 뒤에 이씨(李氏)가 나온다는 곳입니다. 이 말은 이미 허망(虛妄)하지 않았으니, 그 책은 심히 믿을 만합니다. 이씨가 나오면, 삼각산(三角山) 남쪽에 도읍을 만들고 반드시 북대로(北大路)를 막을 것이라는데, 지금 무악(毋岳)은 북쪽으로 대로(大路)가 있으니 그 참서(讖書)와 바로 합치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눈 앞에 세 강(江)이 끌어 당기기를 만월(滿月)과 같이 한다는데, 이 땅에 세 강(江)이 눈 앞에 있으니, 또한 참서(讖書)와 합치합니다. 태상왕 때 이 땅을 얻지 못하여 한양에 도읍을 세웠던 것입니다."

하니, 유한우(劉旱雨)가 말하였다.

"한양은 전후에 석산(石山)이 험한데도 명당(明堂)에 물이 없으니, 도읍할 수가 없습니다. 지리서(地理書)에 말하기를, ‘물의 흐름이 길지 않으면, 사람이 반드시 끊긴다.’ 하였으니, 대개 불가한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 땅도 또한 규국(規局)097) 에 바로 합치하지는 아니합니다."

민중리(閔中理)가 말하기를,

"도읍을 정(定)하려고 한다면, 천리(千里)의 안쪽에 산수(山水)가 빙 둘러싸고 있는 곳은 모두 찾아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만약 삼각산(三角山)에 올라가 사방으로 바라보고 명승지(名勝地)를 찾는다면, 혹은 요행히 얻을른지요."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또 이 땅의 규국(規局)을 말한다면 괜찮은가?"

하니, 민중리가 대답하기를,

"이 땅도 또한 규국(規局)에 바로 합치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외산(外山)이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을 살펴야 합니다."

하고, 이양(李良)이 말하기를,

"이 땅은 한양에 비하여 심히 좋습니다."

하고, 이양달이 말하기를,

"한양이 비록 명당(明堂)에 물이 없다고 말하나, 광통교(廣通橋) 이상에서는 물이 흐르는 곳이 있습니다. 전면에는 물이 사방으로 빙 둘러싸고 있으므로, 웬만큼 도읍할 만합니다. 이 땅은 규국(規局)에 합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도읍하려고 한다면, 여기는 명당(明堂)이 아니고, 아래쪽에 명당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어찌 신도(新都)에 이미 이루어진 궁실(宮室)을 싫어하고, 이 풀이 우거진 땅을 좋아하여, 다시 토목(土木)의 역사(役事)를 일으키겠는가? 다만 석산(石山)이 험하고, 명당(明堂)에 물이 끊어져, 도읍하기에 불가한 까닭이다. 내가 지리서를 보니, 말하기를, ‘먼저 물을 보고 다음에 산을 보라.’ 하였으니, 만약 지리서를 쓰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쓴다면 명당은 물이 없는 곳이니, 도읍하는 것이 불가한 것은 명확하다. 너희들이 모두 지리를 아는데, 처음에 태상왕을 따라 도읍을 세울 때, 어찌 이러한 까닭을 말하지 아니하였는가?"

윤신달이 말하기를,

"신은 그때 마침 친상(親喪)을 만나 능히 호종하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유한우가 말하기를,

"신 등이 말하지 아니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전단(專斷)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양달을 불러 말하였다.

"네가 도읍을 세울 때 태상왕을 따라 가서, 명당(明堂)이 물이 끊어지는 땅이어서 도읍을 세우는 데 불가하다는 것을 어찌하여 알지 못하였느냐? 어찌하여 한양에 도읍을 세우고 크게 토목(土木)의 역사(役事)를 일으켜서 부왕(父王)을 속였는가? 부왕이 신도(新都)에 계실 때 편찮아서 거의 위태(危殆)하였으나 회복되었다. 살고 죽는 것은 대명(大命)에 관계되는 것이다. 그 후 변고(變故)가 여러 번 일어나고 하나도 좋은 일이 없었으므로, 이에 송도(松都)에 환도(還都)한 것이다. 지금 나라 사람들은 내가 부왕의 도읍한 곳을 버린다고 허물한다."

이양달이 대답하기를,

"명당(明堂)이 비록 물이 없다고 말하나, 전면에 물의 흐름이 시작됩니다. 더군다나, 그때에 말을 다하고 숨기지 아니하였습니다. 다만 신(臣)이 전단(專斷)할 바가 못되었을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너희가 내 앞에 있으면서 억지로 말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어찌 다른 곳에서 자복(自服)하겠는가?"

하고, 임금이 조준에게 묻기를,

"도읍을 세울 때 경(卿)은 재상이었다. 어찌하여 한양에 도읍을 세웠는가?"

하니, 조준이 대답하기를,

"신은 지리를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옳도다. 또 1리(里)를 내려가서 명당(明堂)을 찾도록 하라."

하니, 하윤이 대답하기를,

"좋은 명당(明堂)은 송도(松都)강안전(康安殿) 같은 것이니, 이 명당은 송도수창궁(壽昌宮)과 같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8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1책 309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註 096]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 하윤(河崙).
  • [註 097]
    규국(規局) : 도국(圖局). 길지(吉地)로 획정하는 범위 안의 땅.

○壬申/駕至毋岳。 上登中峯, 使人建白旗於漢水之際, 瞻望四方曰: "此合都邑之地, 晋山府院君之所言也。 白旗之北, 可以邑居。" 下山, 會大臣臺諫刑曹及知地理者尹莘達閔中理劉旱雨李陽達李良等, 求明堂。 上謂莘達等曰: "毋有所諱, 各自盡言。 此地與漢陽孰愈?" 莘達對曰: "以地理論之, 漢陽前後石山險, 而明堂水絶, 不可爲都。 此地以讖書考之, ‘王氏五百年後李氏出。’ 此言旣不虛矣, 其書甚可信也。 ‘李氏出, 則三角山南作都邑, 須防北大路。’ 今毋岳北有大路, 則此地正合其讖。 又曰: ‘眼前三江, 挹如滿月。’ 此地三江在前, 亦合讖書。 太上王時, 未得此地, 建都漢陽矣。" 劉旱雨曰: "漢陽則前後石山險, 而明堂無水, 不可爲都。 地理書曰: ‘流水不長, 人必絶。’ 蓋言不可也, 此地亦未正合規局。" 閔中理曰: "欲定都邑, 千里之內山水回抱處, 皆當求之。 若登三角山, 四望求勝地, 則或幸得之。" 上曰: "且言此地規局可也。" 中理對曰: "此地亦未正合規局, 須考外山回抱。" 李良曰: "此地比漢陽甚善。" 陽達曰: "漢陽雖曰明堂無水, 自廣通橋以上有水流焉。 前面有水, 四方回抱, 稍可爲都。 此地則未合規局, 然欲都之, 則此非明堂, 下有明堂。" 上曰: "予豈厭新都已成宮室, 而好此草莽之地, 更興土木之役乎? 但石山之險, 明堂水絶, 不可爲都故耳。 予觀地理書, 曰: ‘先看水後看山。’ 若不用地理書則已, 用則明堂無水之地, 不可爲都明矣。 汝等皆知地理, 初從太上王建都邑, 何不言此故乎?" 莘達曰: "臣於其時, 適遭親喪, 未能扈從。" 旱雨曰: "臣等非不言, 但不得專耳。" 上呼陽達曰: "汝於建都之時, 從太上而行, 豈不知明堂水絶之地不可建都也, 乃何建都於漢陽, 大興土木之役, 以欺父王乎? 父王在新都不豫, 幾殆而復存。 沒則關乎大命矣。 厥後變故屢興, 無一好事, 乃還松都。 至今國人咎予棄父王所都。" 陽達對曰: "明堂雖曰無水, 前面始流。 況其時盡不諱, 但非臣所專耳。" 上曰: "汝在我前, 强言如此, 豈於他處自服?" 上問趙浚曰: "建都時, 卿爲相, 何建都於漢陽?" 對曰: "臣不解地理。" 上曰: "然。" 又下一里求明堂, 河崙曰: "上明堂如松都 康安殿, 此明堂如松都 壽昌宮。"


  • 【태백산사고본】 3책 8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1책 309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