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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7권, 태종 4년 5월 3일 계묘 1번째기사 1404년 명 영락(永樂) 2년

사간원에서 노이를 탄핵하자 전리에 방축토록 명하다

사간원에서 다시 노이(盧異)를 탄핵하니, 명하여 전리(田里)로 돌려 보내었다. 노이에게 주상(主上)을 향하여 공손치 못한 말을 하고 바깥 사람에게 떠들어 말한 까닭을 물으니, 이(異)가 대답하기를,

"말이 불손한 것이 아니라, 곧게 말하는 것이 본래 간관(諫官)의 직책이며, 또한 밖에 떠들어 말한 것이 아니라, 다만 동료들과 말한 것뿐입니다."

하였다. 조휴(趙休) 등이 상소하기를,

"좌정언 노이가 지존(至尊)을 향하여 함부로 불순한 말을 지어 내었고, 밖에서 사람들에게 떠들어 말하였으니, 청컨대 직첩(職牒)을 거두고 해외로 물리치소서. 우정언 신효(申曉)도 또한 노이를 도와서 말하였으니 아울러 죄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처음에 휴(休) 등이 이(異)를 탄핵하기를 의논하니, 효(曉)가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더불어 의논한 것이다"

하였다. 휴(休) 등이 이에 효(曉)를 아울러 탄핵하여 죄주기를 청하였다. 휴(休) 등이 또 종친(宗親)·공신(功臣)에게 이르기를,

"노이(盧異)가 이르기를, ‘주상이 외식(外飾)만 힘쓰고 실덕(實德)이 없어 썩은 참외 같고, 남의 처첩(妻妾)을 빼앗아 궁중에 들이었다’ 하였다."

하였다. 임금이 듣고 이(異)효(曉)를 불러 물으니, 이(異)가 대답하기를,

"옛날 소신(小臣)이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에, 해주(海州)에 호가(扈駕)하여 어리석은 충곡(衷曲)을 앙달(仰達)하여 곧 가납(嘉納)을 입었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감격하여 항상 생각하기를, 만일 언관(言官)이 되어 말할 것이 있으면 전후를 돌보지 않고 다 말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말하고자 한 것은 다른 것이 없고, 주상께서 실덕(實德)은 힘쓰지 않고 밖으로 인의(仁義)를 꾸미시고, 이신(李伸)·김보해(金寶海) 등이 여색(女色)을 바치어 전하를 속이었는데도, 일찍이 죄를 받지 않았으므로 죄를 청하려고 한 것은 그래서였습니다. 썩은 참외에 비유하고 남의 처첩을 빼앗았다는 말은 신이 한 말이 아닙니다. 효(曉)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들은 자가 잘못 들은 것입니다."

하고, 드디어 본말(本末)을 끝까지 말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이와 같은 말이 있으면 어찌하여 면대(面對)하여 진달하지 않고, 사석(私席)에서 말하였느냐?"

하니, 이(異)가 대답하기를,

"신(臣)이 사석(私席)에서 말한 것이 아니고, 다만 동료들과 더불어 원의(圓議)에서 말하였을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 백이(伯夷)·숙제(叔齊)가 주(周)나라에 벼슬하지 않았는데, 네가 반드시 백이·숙제의 뜻이 있어서 이런 말을 하였을 것이다. 지금 마땅히 전리(田里)로 놓아보내겠다."

하였다. 이(異)가 말하기를,

"신의 죄가 죽어야 마땅한데 전리(田里)로 돌아가게 되오니, 덕택(德澤)이 지극히 후(厚)합니다. 그러하오나, 신이 백이·숙제의 마음이 있다면 마땅히 일찍 물러갈 것이지 어찌 오늘에 이르렀겠습니까? 간관(諫官)이 되어서 한번도 미충(微忠)을 바치지 못하고 갑자기 전리(田里)로 돌아가니, 이것이 한스럽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의 이 말을 들으니 나도 또한 슬프다. 눈앞에서 오랫동안 임용(任用)한 사람을 하루에 내치니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

하였다. 효(曉)는 집에 있으라고 명하고 상소(上疏)는 머물러 두고 내려보내지 않았다. 좌헌납(左獻納) 박초(朴礎)가 대궐에 나와 상언(上言)하기를,

"노이는 죄가 중한데 벌이 가볍고, 신효노이와 죄가 같은데 벌이 다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노이가 말한 것이 근거 없는 일이 아니니, 어떻게 죄를 주느냐? 다만 노이가 사관(史官)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근시(近侍)한 지가 오랜데, 나더러 ‘겉으로는 옳은 체하고 속은 그르다’ 하였으니, 내가 이를 분별하고자 하나, 내가 덕(德)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급암(汲黯)이 한 무제(漢武帝)더러 ‘안으로는 욕심이 많고 겉으로는 인의(仁義)를 베푼다’고 하였는데, 무제(武帝)의 웅재(雄才)와 대략(大略)은 내가 미칠 바는 못되나, 또한 급암과 같은 신하가 있었으니 족하다. 노이신효의 말은 다만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것뿐이다."

하였다. 초(礎)가 다시 아뢰기를,

"노이의 죄가 작지 않사오니 마땅히 중벌(重罰)을 가하여야 하고, 신효는 죄가 같은데 홀로 면하게 되니, 또한 불가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노이의 말이 모두 곧으니, 내가 죄주지 않으려고 하나, 잠시 너희의 청을 따랐고, 또 그의 벼슬하지 않으려는 뜻을 이루어 주기 위하여 전리(田里)로 놓아 보내는 것뿐이다. 또 이 말은 누구나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어찌 신효가 말할 수 있었던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다만 집에 돌아가게 한 것이니 다시는 말하지 말라."


  • 【태백산사고본】 3책 7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1책 295면
  • 【분류】
    사법-탄핵(彈劾) / 정론-정론(政論)

○癸卯/司諫院復劾盧異, 命放歸田里。 問向上發不遜之言, 而揚言於外之故, 答以"非言之不遜也, 直言, 固諫官之職也。 亦非揚言於外, 但與同僚言之耳。" 等上疏曰:

左正言盧異, 向至尊妄造不順之言, 外揚於人, 請收職牒, 屛諸海外。 右正言申曉, 亦助爲言, 宜幷罪之。

初, 等議劾, 而曰: "此吾所與議。" 等乃幷劾而請罪。 等又謂宗親功臣曰: "謂上務外飾, 而無實德, 如(朽瓜)〔朽瓜〕 ; 奪人妻妾, 納于宮中。" 上聞之, 召問之, 對曰: "昔小臣爲史官, 扈駕海州, 仰達愚衷, 卽蒙嘉納。 由是感激, 常竊以爲若爲言官, 有可言者, 不顧前後而盡言。 向之欲言者無他, 以上不務實德, 而外飾仁義。 李伸金寶海等, 獻色而欺殿下, 曾不受罪, 欲請罪則然矣。 朽瓜之譬、奪人妻妾, 非臣所言。 若則不與焉, 以聞者過耳。" 遂極陳本末, 上曰: "汝有如此之言, 何不面陳而言於私乎?" 對曰: "臣非言於私, 但與同僚言於圓議耳。" 上曰: "昔不仕于。 汝必有之志, 然後出此言也。 今當放歸田里。" 曰: "臣罪當誅, 得歸田里, 澤至渥也。 然臣有之心, 則當早退, 豈至于今日乎? 得爲諫官, 不得一貢微忠, 遽歸田里, 是可恨也。" 上曰: "聞汝此言, 予亦悲矣。 眼前久任之人, 一日黜之, 豈不悲哉!" 命沈于家, 留其疏不下。 左獻納朴礎詣闕上言: "盧異罪重罰輕, 罪同罰異。" 上曰: "所言, 非無根之事, 何以罪之? 但自史官至于今日, 近侍已久, 謂予以爲外是而內非, 吾欲辨之, 然予無德也故云爾。 汲黯 武帝爲內多慾而外施仁義。 武帝雄才大略, 非予所及, 然亦有汲黯之臣則足矣。 之言, 但聞諸人而已。" 更啓曰: "之罪不細, 宜加重罰。 罪同而獨免, 亦不可。" 上曰: "盧異之言皆直, 予欲不罪, 姑從汝等之請, 且遂其不仕之心, 放歸田里而已。 又此言非人人之所能言, 豈申曉之所言耶? 故但令歸家而已, 更勿復言。"


  • 【태백산사고본】 3책 7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1책 295면
  • 【분류】
    사법-탄핵(彈劾) / 정론-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