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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5권, 태종 3년 6월 29일 을해 4번째기사 1403년 명 영락(永樂) 1년

사간원에서 전제를 바로잡기를 청하는 상소

사간원(司諫院)에서 상소하여 전제(田制)를 바루기를 청하였다. 소(疏)의 대략은 이러하였다.

"귀천(貴賤)의 분수는 하늘이 세우고 땅이 베풀어 놓은 것 같아서 어지럽힐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혹시 어지럽힌다면, 백성의 뜻이 정하여지지 않아서 능멸(陵蔑)하고 참람(僭濫)한 풍기(風紀)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물며 아조(我朝)에서는 귀천의 분수에 더욱 엄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전제(田制)의 일관(一款)에 이르기를, ‘경성(京城)에 살면서 왕실(王室)을 호위하는 자는 마땅히 과전(科田)를 설치하여 염치(廉恥)를 기르게 하고, 공사 천례(公私賤隷)·무격(巫覡)·창기(娼妓)·공상(工商)·승니(僧尼)·매복 맹인(賣卜盲人)043) 등은 그 자신과 자손이 밭을 받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만세(萬世)의 영전(令典)입니다. 지금 공사 천례가 외람하게 토전(土田)을 받아서 성법(成法)을 어지럽힌 것이 열 일곱 사람인데, 받은 밭이 모두 6백 90여 결(結)입니다. 아아! 법(法)이 세워진 지 오래지 아니하여 전제(田制)의 문란함이 이와 같은 데에 이르렀으니, 그 말류(末流)의 폐단은 반드시 공상(工商)·천례(賤隷)가 모두 분수를 넘어 밭을 받으려고 할 것입니다. 원컨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공사 천례가 받은 밭을 회수하여 군자(軍資)에 붙이게 하고, 이제부터 이후로는 공상·천례의 무리들이 만일 보기드문 공(功)을 세우는 자가 있으면 다른 물건으로 상을 주고 토전(土田)은 허락하지 말아서, 전제(田制)를 바루고 귀천(貴賤)을 정하소서."

또 상소하기를,

"군국(軍國)의 일은 양식(糧食)이 중합니다. 경상(慶尙) 일도(一道)의 조운(漕運)과 육전(陸轉)이 모두 폐단이 있어 행할 수 없으므로, 신 등이 어제 과전(科田)을 바꾸자는 등의 한두 가지 조건으로 소(疏)를 갖추어 아뢰고, 또 천례(賤隷)가 받은 밭을 회수하여 군자(軍資)에 붙이자고 잇대어 의논[續議]하여 신문(申聞)하였사온데, 전하께서 우정언(右正言) 이명선(李明善)을 불러 하교(下敎)하시기를, ‘상소한 일의 조건은 행할 만한 것이 없지 않으나, 과전(科田)을 바꾸자는 것은 인심(人心)이 부동(浮動)할까 두렵고, 천례(賤隷)가 밭을 받은 것은 국초(國初)부터 이미 그러하였다.’고 하시었습니다. 신 등은 생각건대, 전조(前朝) 때에는 사전(私田)은 모두 하도(下道)에 있고, 경기(京畿)에는 비록 달관(達官)이라 하더라도 다만 구분전(口分田) 십수 결(結) 뿐이었는데도, 역시 넉넉히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과전(科田)을 비록 그 반(半)을 감(減)하여 하도(下道)로 옮긴다 하더라도, 경기에 있는 것이 구분전의 수보다 몇 배나 될 것이니, 어찌 인심(人心)이 동요되겠습니까? 천례가 밭을 받는 것이 비록 국초 때부터 그러하였으나, 밭을 받는 것을 허락치 않은 것도 또한 국초 때에 정한 제도입니다. 그런데 우리 태상왕과 상왕께서 허락하신 것은 우연에서 나온 것이요, 뜻을 두고서 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직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신 성학(聖學)으로 모든 시위(施爲)가 장차 만세(萬世)의 법(法)이 될 것이니, 지금 만일 그대로 인습하여 고치지 않는다면, 후세의 인군(人君)이 누가 능히 고치겠습니까? 이와 같이 된다면 전제(田制)가 바르게 될 수 없고, 귀천(貴賤)이 정하여질 수 없을 것이니, 바라옵건대, 유윤(兪允)하여 시행하소서."

하였다. 대궐에 머물러 두고 내리지 아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5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1책 270면
  • 【분류】
    농업-전제(田制) / 신분(身分) / 교통-수운(水運) / 군사-병참(兵站) / 정론-정론(政論)

  • [註 043]
    매복 맹인(賣卜盲人) : 돈을 받고 점을 쳐 주는 맹인.

○司諫院上疏請正田制。 疏略曰:

貴賤之分, 猶天建地設, 不可亂也。 苟或亂之, 則民志不定, 而陵僭之風起矣。 況我朝尤嚴於貴賤之分! 是以田制一款云: "居京城衛王室者, 宜置科田, 以養廉恥。 公私賤隷巫覡娼妓工商僧尼賣卜盲人等, 身及子孫, 不許受田。" 此誠萬世之令典也。 今者公私賤隷, 濫受土田, 以亂成法, 十有七人, 其所受之田, 摠六百九十餘結矣。 嗚呼! 法立未久, 而田制之亂, 至於如此, 其流之弊, 必至於工商賤隷, 皆有踰分受田之望矣。 願令攸司, 收其公私賤隷所受之田, 以屬軍資, 自今以往, 工商賤隷之徒, 如有樹立奇功者, 賞以他物, 不許土田, 以正田制, 以定貴賤。

又上疏曰:

軍國之務, 糧餉爲重。 慶尙一道, 漕運陸轉, 皆有弊而不可行, 故臣等昨以科田易換等一二條件, 具疏以聞, 又以收其賤隷所受之田, 屬之軍資, 續議申聞。 殿下召右正言李明善敎曰: "上疏事件, 不無可行, 而易換科田, 則恐人心之浮動。 賤隷受田, 則自國初而已然。" 臣等竊惟, 前朝私田, 皆在下道, 而京畿則雖達官, 但口分田十數結而已, 亦足賴以遂其生矣。 今科田雖減其半, 移於下道, 在京畿者, 當(倍簁)〔倍蓰〕 於口分之數, 尙何人心之浮動哉? 賤隷受田, 雖自國初而然, 不許受田, 亦國初之定制也, 而我太上王、上王許之者, 出於偶然耳, 非致意而爲之也。 惟我殿下, 天縱聖學, 凡所施爲, 將爲萬世之法。 今若因循不革, 則後世之君, 誰能革之哉! 如此則田制無由而正, 貴賤無自而定矣。 伏望兪允施行。

留中不下。


  • 【태백산사고본】 2책 5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1책 270면
  • 【분류】
    농업-전제(田制) / 신분(身分) / 교통-수운(水運) / 군사-병참(兵站) / 정론-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