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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3권, 태종 2년 4월 22일 갑술 1번째기사 1402년 명 건문(建文) 4년

밀기에 붙인 이외의 사사전을 혁파하여 군자에 소속시키다

밀기(密記)외의 사사전(寺社田)을 혁파하여 군자(軍資)에 소속시켰다. 서운관(書雲觀)에서 상언(上言)하기를,

"신 등은 듣건대, 불씨(佛氏)의 교(敎)는 깨끗하여 욕심이 없고[淸淨寡欲], 세속을 끊고 떠나는 것[離世絶俗]으로서 종지(宗旨)를 삼는다 하옵고, 아직 국가를 다스리는 도(道)가 있다고 듣지 못하였습니다. 전조(前朝)의 왕태조(王太祖)가 삼한(三韓)을 통일한 처음에 어떤 사람이 진언(進言)하기를, ‘산을 등지고 물이 거슬러 흐르는 곳에 절을 짓고 부처를 안치하여 아무 도량(道場)을 설치하면 국가를 편안케 하는 하나의 도움이 될 것이다.’ 하므로, 곧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마땅한 곳에다 절을 짓고 전지(田地)와 종[奴]을 주어, 청정 과욕(淸淨寡欲)한 사람으로 주지(住持)를 삼아 중들을 이바지하게 하였음은 다만 사직(社稷)을 편안케 하기 위함이었고, 양(梁)나라 무제(武帝)와 같이 죄(罪)와 복(福)을 두려워하고 사모하여 부처에게 아첨함은 아니었습니다. 후세의 군신(君臣)들이 이를 더욱 믿어 커다란 가람(伽藍)을 창건하여 각각 원당(願堂)이라 부르고, 전지(田地)와 백성을 시납(施納)하게 되니 대대로 증가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5백 년 동안에 경외(京外)의 사사(寺社)가 이루 기록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선교(禪敎)의 각종(各宗)은 전지와 백성이 있는 절을 다투어 가지려고 하여 비보(裨補)의 문부(文簿)에다 등재(登載)하기를 청하고, 중의 무리들은 그 전조(田租)를 거두고 노공(奴貢)을 거두어 중에게는 이바지하지 않고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옷을 입게 되었으며, 심한 자는 주색(酒色)에 빠져 그 욕심이 세속의 배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절이 비록 수천이 되고, 중이 수만 명에 이른다 하더라도 그들이 하는 바가 이와 같다면, 비록 불도(佛道)에 혹시 나라를 편안케 하는 이치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일호(一毫)의 보탬이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3년의 저축이 없으면 그 나라는 나라가 아니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군대를 내는 것이 오래면 국용(國用)이 부족하다.’ 하였사오니, 이것은 옛 성현(聖賢)의 부국강병(富國强兵)하는 데의 경계이오니 염려치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나라에 지금 축적된 것으로 본다면 수만 명 군대의 1년 양식도 오히려 부족하온데, 하물며 오늘날 천하는 병란(兵亂)이 있습니다. 만약 군대를 일으키고 대중을 동원하게 된다면 앞으로 무엇을 가지고 여기에 응하겠습니까? 신 등은 군대의 양식 갖추기를 염려함이 당장의 급무(急務)라고 생각합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 만약 불씨(佛氏)의 도(道)를 없애기가 어렵다고 여기신다면 선종(禪宗)을 합하여 조계(曹溪)로, 오교(五敎)를 합하여 화엄(華嚴)으로 하시어, 밀기(密記)에 붙인 경외(京外)의 70개 절을 양종(兩宗)에 분속(分屬)시키고, 그 가운데서 덕행이 사표(師表)가 될 만한 사람을 택하여 주지(住持)로 삼으시어 중[僧]이 없게 하고 그의 임명(任命)을 중지하면 금후(今後)로 전구(田口)의 이(利)를 사모하여 중이 될 사람이 적을 것이며, 자기의 재행(才行)이 합당치 못함을 헤아리고 환속하여 국역(國役)에 이바지할 사람이 많아질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밀기에 붙인 70개 절 외의 그 나머지 비보(裨補)에 등재(登載)된 경외(京外) 각사(各寺)의 토전(土田)의 조(租)는 군자(軍資)에 영속(永屬)시켜 3년의 저축에 대비하시고, 그 노비(奴婢)는 각사(各司)와 주군(州郡)에 분속시키면 군대의 식량이 넉넉하여질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이 폐단을 혁파하지 않고서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방법을 신 등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성상의 재가를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의정부에 내려보내 의논하여 아뢰게 하니, 의정부에서 사평부·승추부와 함께 의논하여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서운관(書雲觀)에서 장계(狀啓)한 바 사의(事意)가 진실로 마땅합니다. 다만 밀기(密記)에 붙인 사사(寺社) 안에 전지와 백성이 부족하다면 혁파한 사사의 전지와 백성으로써 적당하게 요량하여 가급(加給)하고, 비록 밀기에 붙이지 아니한 것이라 하더라도 상주승(常住僧) 1백 명 이상으로 법회를 하는 곳은 아직 그대로 두어 움직이지 마소서."


  • 【태백산사고본】 1책 3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1책 232면
  • 【분류】
    농업-전제(田制) / 역사-고사(故事) / 사상-불교(佛敎) / 군사(軍事)

○甲戌/革密記付外寺社田, 屬軍資。 書雲觀上言:

臣等竊聞, 佛氏之敎, 以淸淨寡欲、離世絶俗爲宗, 未聞有治國家之道也。 前朝王太祖統三之初, 或者進言曰: "背山逆水之地, 置寺安佛, 設某道場, 則安國家之一助也。" 乃命有司, 隨地置寺, 給田與奴, 以淸淨寡欲者爲住持, 俾供佛僧, 但爲安社稷耳, 非如 武帝畏慕罪福, 求媚于佛者也。 後之君臣益信而創大伽藍, 各稱願堂, 施納田民, 代代增加。 由是五百年間, 京外寺社, 不可勝記。 於是, 禪敎各宗, 爭執有土民之寺, 請載裨補之籍。 僧人之徒, 收其田租, 斂其奴貢, 不供佛僧, 肥馬輕衣, 甚者溺於酒色, 其欲倍俗。 然則寺雖數千, 僧雖數萬, 其所行如此, 雖佛道儻有安國之理, 何有一毫之補哉! 古人有言曰: "國無三年之蓄, 國非其國。" 又曰: "暴師久, 則國用不足。" 此古之聖賢富國强兵之戒, 可不慮乎? 以我國今之蓄積觀之, 數萬之兵, 一年之餉, 尙且不足。 況今天下兵亂, 萬一興師動衆, 則將何以應之! 臣等竊謂慮備兵食, 方今之急務也。 伏惟殿下, 若以掃除佛氏之道爲難, 則禪宗合爲曹溪, 五敎合爲華嚴, 以密記付京外七十寺, 分屬兩宗, 擇其德行足爲師表者爲住持, 無其僧闕其差, 則自今以後, 慕田口之利而爲僧者鮮矣, 量其才行之不合, 還俗供國役者多矣。 伏願殿下, 將密記付七十寺外, 其餘裨補所載京外各寺土田之租, 永屬軍資, 以備三年之蓄, 其奴婢, 分屬各司與州郡, 則兵食足矣。 竊惟不革此弊, 而富國强兵之術, 臣等所未敢知也。 伏惟聖裁。

下議政府議擬申聞。 府與司平承樞兩府同議: "書雲觀狀申內事意允當, 獨於密記付寺社內田民不足者, 乃以革罷寺社田民, 量宜加給, 雖不付密記者, 常住僧一百已上作法處, 姑依舊不動。"


  • 【태백산사고본】 1책 3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1책 232면
  • 【분류】
    농업-전제(田制) / 역사-고사(故事) / 사상-불교(佛敎) / 군사(軍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