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실록3권, 태종 2년 4월 10일 임술 2번째기사
1402년 명 건문(建文) 4년
마암에 행차하여 윤하 등 27명에게 무과 복시를 시행하다
마암(馬巖)에 행차하여 무과(武科)에 윤하(尹夏) 등 27명을 복시(覆試)를 시행하여, 성달생(成達生)으로 제1등을 삼았다. 의정부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전 감무(監務) 장온(張蘊)이 제4등으로 뽑히니, 이때의 사람들이 장온이 이미 문과(文科)에 급제하고도 무과(武科)에 든 것을 비방하였다. 삼관(三館)에서 상소하여 말하기를,
"신 등이 국가에서 문무(文武) 양과(兩科)의 제도를 설치한 것을 보건대, 벼슬하는 사람들이 출신(出身)하는 곳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미 문과(文科)에 든 사람은 문학(文學)에 종사하되 겸하여 무예(武藝)에 통해도 가하지만, 다시 무과(武科)에 응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문과 출신자로서 ‘국가에서 무과에 합격하면 수를 더해서 이를 준다.’는 영(令)을 듣고, 무과에 응시하려고 하여 염치(廉恥)의 도(道)를 잃습니다. 원컨대, 이미 문과에 합격한 자는 다시 무과에 응시할 수 없게 하여 사풍(士風)을 바루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최윤덕(崔閏德)은 이미 회시(會試)에 합격하였으나, 그 아버지 최운해(崔雲海)를 따라가 이성(泥城)을 수비하라고 명하였던 까닭에, 전시(殿試)에 응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를 방(牓)의 끝에 넣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3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1책 231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인사-선발(選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