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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3권, 태종 2년 4월 1일 계축 1번째기사 1402년 명 건문(建文) 4년

내서 사인 이지직과 좌정언 전가식이 국사를 논한 상소문

내서 사인(內書舍人) 이지직(李之直)과 좌정언(左正言) 전가식(田可植)이 상소하여 국사(國事)를 논(論)하니, 그 상소를 3부(府)에 내려보내 의논하게 하였다. 상소는 이러하였다.

"옛부터 제왕(帝王)으로서 근검(勤儉)으로 일어나고 방탕한 욕심으로 망하지 아니한 자가 없는 까닭에, 대우(大禹)는 궁실(宮室)을 낮게 짓고 좋은 의복을 입지 않고, 성탕(成湯)은 새벽에 일어나 간하는 말을 따랐고, 문왕(文王)은 조심하며 좋지 못한 옷을 입고 밭일을 나감으로써 한없는 아름다움을 열었습니다. 공경히 생각하건대, 전하께옵서는 총명한 자질로써 경사(經史)를 널리 보시와 무릇 일을 하심에 있어서 움직이면 옛 선왕(先王)을 본받기에 편안한 여가가 없으시니, 신하와 백성들은 다 삼대(三代)의 문명(文明)한 다스림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일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의복과 어가가 아름답고 화려한 것을 매우 좋아하여 제도를 따르지 아니하시고, 대간(臺諫)의 말이 어쩌다가 뜻에 거슬리면 엄하게 견책(譴責)을 가하시며, 매[鷹]와 개[犬]를 좋아하고 성색(聲色)을 즐겨 하심이 아직도 여전(如前)하십니다. 이것이 곧 신민(臣民)들이 실망으로 여기는 것이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검약(儉約)을 숭상하시고 방탕한 욕심을 경계하시며, 간쟁(諫諍)을 받아들이시고 희노(喜怒)를 삼가시어 날이 갈수록 조심하십시오. 하물며 중국이 갈라지고 무너져 서로 다투어 공격하고 정벌하니 우리 나라에서도 재변(災變)이 자주 일어나오니, 바로 우리 군신(君臣)이 경인·신축의 난(亂)을 거울삼아 근심하고 조심하여야 할 때입니다. 삼가 얕은 소견[淺見]을 아래와 같이 조목별로 열거합니다.

1. 군수(軍需)는 갖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경중(京中)이나 외방(外方)의 창고에 묵어가는 곡식도 없사온데, 저화(楮貨)를 무역함으로써 군량(軍糧)이 모두가 장사아치의 집으로 들어가게 하오니, 식자(識者)들이 유감으로 여기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무역을 하지 말도록 하시어 군자(軍資)를 갖추게 하소서.

1. 군정(軍政)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말[馬]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 중국 조정에서 먼저 상(賞)으로서 내려 주고 말[馬]을 바꾸는 것으로써 뒤를 따르니, 이것은 이(利)로써 속여 좋은 말을 얻고자 함이오라, 천왕(天王)으로서 제후(諸侯)를 대접하는 도리가 아니옵니다. 전하께옵서 사대(事大)의 정성을 가지시어 감히 명(命)을 어기지 아니하옵고, 신민(臣民)으로 하여금 다 매매(賣買)하게 하여 운(運)을 지어 진헌(進獻)하시니, 예절로 말하면 옳은 일입니다. 그러하오나 좁고 작은 나라에서 나는 한도 있는 말을 가지고 끝없는 욕심을 채우려고 한다면, 신 등은 말이 다 없어져서 힘이 기울어질까 염려되옵니다. 만약 긴급한 사태가 있다면 장차 무엇에 의지할 것입니까? 《서경》에 ‘기이한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말고 물건의 사용을 아끼면 백성이 넉넉해진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남의 나라에서 나는 이어대기 어려운 물건을 중외(中外)에 펴서 민속(民俗)이 사치를 숭상하게 하심은 나라의 상서(祥瑞)로운 일이 아니옵니다. 원컨대, 이미 바꾼 말을 제외하고는 바꾸지 못하게 하시고, 남은 말값은 모두 다 중국에 돌려보내시며, 능라 단자(綾羅段子)는 진상(進上)하는 의복과 어가를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모두 금단(禁斷)하소서.

1. 도망한 자를 부르고 배반한 자를 받아들임은 《춘추(春秋)》에서 깎아내리는 것이옵니다. 오늘날 요동(遼東)·심양(瀋陽)의 백성들이 기근(饑饉)을 핑계하고 망명하여 와서 붙습니다만, 이들은 비록 본조(本朝)의 백성이라 하더라도 전에 이미 우리를 배반하였고, 오늘은 또 저들을 배반하니, 반복하여 믿기 어려움을 알 만합니다. 또 이제 대국(大國)을 신하로서 섬기옵는데, 다시 배반자를 받아들인다면 사대(事大)의 의리에 어긋납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도망하여 와서 붙는 자는 바로 붙잡아 되돌려 보내게 하고 나라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임금이 이지직(李之直)전가식(田可植)을 부르고, 지신사 박석명을 시켜 전지하기를,

"나의 과실(過失)을 비밀히 아뢰어도 내 어찌 안 듣겠는가? 이제 글[狀]을 이루어 사책(史冊)을 쓰게 하니, 내 매우 가슴 아프다."

하고, 마침내 의정부에 내려보내어 사평부·승추부와 함께 의논하게 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쌀로써 저화(楮貨)를 바꾸는 것은 저화가 민간에 유행하게 하려는 것이며, 이미 숫자를 정하여 바꾸오니, 그 쌀이 서울의 장사아치의 집에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오며, 각각 그곳의 실농(失農)한 민가(民家)에서 포화(布貨)와 잡물(雜物)로써 바꾸는 까닭에 민간(民間)에게 유리합니다. 과반수를 바꿈에 이르러 이것을 금하면 조정의 명령이 가벼워지옵고, 말의 무역을 그치고 남은 말값을 되돌려 보내자는 일은 처음에 약속을 7천 필로 하여 6천 필은 벌써 바꾸어 보냈사온데, 그 나머지 1천 필에 대하여 바꾸기를 그친다면 이미 바꾸어 보낸 6천 필은 도리어 공이 없어집니다. 아직 뚜렷한 이유도 없이 남은 말값을 되돌려 보내는 것도 어렵사오며, 도망온 사람들을 되돌려 보내자는 일은 삼부(三府)의 기로(耆老)들이 일찍이 헌의(獻議)한 장내(狀內)에 있는 뜻이오라, 모두 마땅치 못하옵니다."


  • 【태백산사고본】 1책 3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1책 229면
  • 【분류】
    금융-화폐(貨幣) / 재정-군자(軍資) / 역사-고사(故事) / 상업(商業) / 외교-명(明)

○癸丑朔/內書舍人李之直、左正言田可植上疏論事, 下其疏于三府擬議。 疏曰:

自古帝王, 莫不以勤儉而興, 逸欲而亡。 故大卑宮室惡衣服; 成湯昧爽丕顯, 從諫不咈; 文王小心翼翼, 卑服卽田功, 以啓(無彊)〔無疆〕 之休。 恭惟殿下, 以聰明之資, 博覽經史, 凡所施爲, 動法古先, 不敢遑寧, 臣民咸望三代文明之治, 此誠千載一時也。 然而殿下服御, 頗好巧麗, 不(順)〔循〕 制度, 臺諫之言, 或有忤旨, 嚴加譴責, 鷹犬之好, 聲色之(悞)〔娛〕 , 猶未盡除, 此臣民之所缺望。 伏願殿下崇儉約, 戒逸欲, 納諫諍, 謹喜怒, 日愼一日。 矧今中國分崩, 爭相攻伐, 而我國災異屢興, 正吾君臣鑑庚寅辛丑之亂, 憂勤惕厲之秋也。 謹以淺見條列于後。 一, 軍需不可不備也。 今中外倉廩, 未有陳陳之粟, 而以貿易楮貨, 使軍食皆入於商賈之家, 識者憾焉。 願殿下勿令貿易, 以備軍資。 一, 軍政所須, 莫過於馬。 今朝廷先以賞賜, 繼以易馬。 是啗之以利, 欲得良馬, 非天王所以待諸侯之道也。 殿下以事大之誠, 不敢違命, 而使臣民皆得賣買, 分運進獻, 禮則然矣。 然以褊小之土, 有限之馬, 塡無窮之欲, 則臣等恐馬盡而力虧矣。 如有緩急, 將何以哉! 《書》曰: "不貴異物賤用物, 民乃足。" 今異土難繼之物, 布於中外, 俗尙奢侈, 非國之瑞也。 願除已易馬匹外, 勿令易換, 所餘馬價, 悉還上國, 其綾羅段子進上服御外, 一皆禁斷。 一, 招亡納叛, 《春秋》所貶。 今 之民, 托以飢饉, 亡命來附。 此輩雖是本朝之民, 曩旣叛於我, 今又背於彼, 其反覆難信, 可知也。 且今臣事大國, 而復納叛, 有乖事大之義。 願自今, 逃軀來附者, 卽令捉拿還遣, 勿許入境。

上召之直可植, 使知申事朴錫命傳旨曰: "予之過失, 密啓以言, 予何不聽! 今乃成狀, 使書史冊, 予甚痛焉。" 遂下議政府, 與司平府承樞府同議。 乃啓:

以米易楮貨, 欲楮貨流行於民間, 已定數而貿易, 且其米非入於京中商賈之家, 各於其處失農人戶, 易布貨雜物, 故有利於民間。 至過半貿易而禁之, 則朝令輕易。 停易馬, 其所餘價還送事, 初約七千匹, 六千匹已易送, 其餘一千。 若停貿易, 已易送六千匹, 反爲無功, 未有明降, 還其餘價亦難。 逃來人還送事, 三府耆老已曾獻議, 狀內事意, 皆未允當。


  • 【태백산사고본】 1책 3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1책 229면
  • 【분류】
    금융-화폐(貨幣) / 재정-군자(軍資) / 역사-고사(故事) / 상업(商業) / 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