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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2권, 태종 1년 12월 21일 을해 1번째기사 1401년 명 건문(建文) 3년

예조 전서 김첨이 적전과 선잠의 법식을 새로 정할 것 등을 건의하다

예조(禮曹)에서 적전(籍田)의 가는 법을 다시 정하였다. 예조 전서(禮曹典書) 김첨(金瞻)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은 상고하건대, 적전을 가는 예(禮)는 신명(神明)을 공경하고 농업(農業)을 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제통(祭統)》에 말하기를, ‘천자(天子)·제후(諸侯)가 다 밭을 간다.’ 하였고 《국어(國語)》에 말하기를, ‘백성의 대사(大事)는 농사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 무제(漢武帝)는 3월에 거정(鉅定)에서 갈았고, 한 명제(漢明帝)는 2월에 하비(下邳)에서 갈았고, 당(唐)나라 개원례(開元禮)와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모두 2월에 적전을 갈았습니다. 예서(禮書)에 이르기를, ‘후세(後世)에서 간혹 맹춘(孟春)을 쓰는 것은 대개 진(秦)나라 예(禮)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일찍 따뜻하여지는 중국땅에서도 경칩(驚蟄)이 지난 뒤에 썼는데, 하물며 우리 동방은 맹춘(孟春)이면 몹시 추워서 농사가 시작되지 않는 때이겠습니까? 전조(前朝)의 예관(禮官)이 진(秦)나라 사람 여불위(呂不韋)의 월령(月令)의 설(說)에 혹(惑)하여 적전(籍田)을 가는 것을 반드시 맹춘(孟春)의 달[月]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 폐법을 인순(因循)하여 한갓 허문(虛文)092) 만을 숭상하였습니다. 또 월령에 보리를 천신(薦新)하는 것이 맹하(孟夏)에 있는데, 본국(本國)에서는 중하(仲夏)를 쓰니, 기후가 조금 늦어서 미처 여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홀로 적전을 가는 예(禮)만 반드시 여불위의 설을 쫓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내년 정월 4일에 적전을 가는 법을 파하고, 마땅히 경칩이 지난 뒤에 전농시(典農寺)에 명하여 그 땅이 기름지고 갈 만한지 상태를 살펴서 본조(本曹)에 보고하게 하고, 서운관(書雲觀)으로 하여금 택일하게 하여 계문(啓聞)케 해서 제사를 지내고, 백묘(百畝)를 재어서 깊이 갈고 파종(播種)하면, 거의 선왕(先王)의 전례(典禮)에 합하고 전하의 경근(敬謹)하시는 마음에 맞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바야흐로 지금 물건을 갖추고 예문(禮文)을 다하는 때에 적전(籍田)과 선잠(先蠶)의 두 제사에만 악장(樂章)이 없으니, 대단히 불가합니다. 원컨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짓게 하소서."

하여,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1책 221면
  • 【분류】
    농업-권농(勸農) / 역사-고사(故事) / 왕실-의식(儀式) / 예술-음악(音樂)

  • [註 092]
    허문(虛文) : 실상이 없는 법제(法制).

○乙亥/禮曹更定耕籍田之法。 禮曹典書金瞻等上疏曰:

臣等竊詳耕籍之禮, 所以敬神明而重農業也。 《祭統》曰: "天子諸侯, 莫非耕也。" 《國語》曰: "民之大事在農。" 是以 武帝三月耕于鉅定, 明帝二月耕于下邳, 《開元禮》 仁宗俱以二月耕籍。 禮書曰: "後世或用孟春者, 蓋禮也。" 夫以中國早暖之地, 尙用驚蟄之後。 況吾東方, 孟春冱寒, 東作未興之時乎? 前朝禮官, 惑於呂不韋月令之說, 耕籍必用孟春之月, 因循弊法, 徒尙虛文。 且月令薦麥在孟夏, 而本國用仲夏, 以其天氣較遲, 不及成熟也。 獨於耕籍之禮, 必從不韋之說者, 何哉? 伏望殿下, 罷來歲正月四日籍田之法, 宜於驚蟄之後, 命典農寺, 視其土膏可耕之候, 以報本曹, 令書雲觀擇日啓聞行祭, 度其百畝, 深耕播種, 則庶合先王之典禮, 而可以副殿下敬謹之心矣。

又曰: "方今備物盡文之時, 籍田先蠶兩祭無樂章, 甚不可也。 願令攸司製作。"

上皆允之。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1책 221면
  • 【분류】
    농업-권농(勸農) / 역사-고사(故事) / 왕실-의식(儀式) / 예술-음악(音樂)